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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20030329 작성 정요석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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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29일에 쓴 글입니다. 학창 시절 이 시를 읽으면서,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보는 사슴의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게 마음속에 각인되던지 한 동안 힘들어했습니다. 마치 제가 이런 모습 같았거든요. 무엇 하나 마음을 둘 수 없던 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제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구나 함을 회상하며 쓴 글입니다. 요사이도 그 시절의 힘들었던 외로움과 허무함이 생각나면, 제가 예수님 없이 어떻게 삶을 살 수 있을런지 몸서리쳐지고, 저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외롭고 지친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하여 그들에게 쉼과 안식을 주고 싶습니다. 


제목: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부제: 높은 족속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鄕愁)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이 시가 몇 해 전 대학 입시에 출제되었습니다. 그 때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무슨 짐승을 가리키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시의 제목을 묻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많은 학생들이 기린이라고 대답을 하여 기성세대로 전통의 단절감을 느끼게 했다고 합니다. 저도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씁쓸한 느낌이었는데, 모가지가 길다라는 말에 사슴을 쉽게 보지 못하는 학생들은 기린이라고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요사이 학생들은 동물들을 tv에서 방영하는 동물의 세계에서 주로 접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기린은 모가지가 길되 너무 길어서 슬픈 느낌은 없습니다. 오히려 강인한 느낌입니다. 초원의 왕자 사자도 기린은 감히 건들지 못합니다. 그가 휘두르는 긴 목에 사자도 맞으면 중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사슴의 모가지가 슬프기에 적당히 길고, 맹수에게 쉽게 먹히기 때문에 슬픕니다.

여러분은 이 시를 읽으며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아마 그리움, 슬픔, 공허, 상실감, 고독, 향수 등을 느낄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시골길을 걷다가 언덕을 보고있노라면 그 언덕 너머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저며온다고 했습니다. 길가의 스러져가는 옛집에서도 그는 저며오는 슬픔을 강하게 느끼곤 했다고 합니다. 어린 왕자를 쓴 생땍쥐베리는 어른들은 언덕 너머에 대한 그리움이나 스러져가는 옛집에 대한 슬픔이란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길가의 옛집이란 말을 들으면 그 집을 새로이 지어 팔면 얼마만큼 이익을 낼 수 있나를 생각할 것이라고 비판할 것입니다. 언덕 너머도 어른들은 그리움이 아니라, 왜 이리 언덕이 높냐고 투정만 할 것이라고 그는 비판할 것입니다.

요사이 얼마나 사람들이 사슴을 보며 모가지가 길어 슬프다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생땍쥐베리가 비판한 것처럼 어른들은 사슴을 보고도 오히려 몸에 좋다는 사슴의 뿔과 피를 연상할지 모르겠습니다. 청소년들도 사슴 대신 기린이나 연상하는 등 이미 시심(詩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모가지가 긴 사슴에게서 왜 슬픔을 느껴야 하냐고 오히려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의 실패와 취직의 실패가 슬픈 것 아니냐고 묻는 것 말입니다.

노천명 시인은 루이스와 같이 언덕 너머를 보면 그리움을 느끼고 스러져가는 옛집을 보면 슬픔을 느끼는 이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슴을 보고 그 긴 모가지에서 슬픔을 찾아내는 것이겠지요. 아마 그는 사슴을 보면서, 바로 자기를 보고, 바로 사람을 보았을 것입니다. 관이 향기로워 무척 높은 족속이라고 사슴을 표현한 그녀는, 사슴보다 훨씬 향기로운 가치와 깊이를 지닌 사람에게서 바로 슬픔을 보았을 것입니다.

시인이기에 노천명 그는 일반인보다 더 섬세한 감각과 분별력과 직감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사슴의 향기로운 관보다 더 향기롭고, 꽃보다 더 아름다운 그 무엇을 발견하고 몸서리쳤을 것입니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는 그 사슴처럼, 노천명 시인은 숱하게 자신의 아름다움과 고귀함과 직관을 발견하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지닌 사람이면서도, 땅에 발을 딛고 서있는 인간이어야 하기에, 그것을 달리 어떻게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를 인해 그 누구보다 가슴 시렸을 것입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슬픈 몸짓을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보는 것일 뿐입니다. 밀려오는 슬픔과 아쉬움과 향수에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요.

이 시를 접한 고등학교 때 아마 이 시를 쓴 노천명 시인보다 더 슬픈 몸짓으로 먼데 산을 바라본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왜 이리 이 시가 가슴을 찌르며 다가왔는지, 너무나도 제 마음을 후벼놓아 오히려 야속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냥 대충 잊고 인생을 그럭저럭 살아가는데, 이런 시를 읽고 나면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몸둘 바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잊고 있던 인생에 대한 허무와, 무엇이 가치이고 본질인지를 추구하는 고된, 하지만 딱히 답이 보이지 않는 힘든 여정을 다시금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 때 인생의 허무감을 해결하고, 언덕 너머에 대한 정체 모를 슬픔을 해결하고, 스러져가는 옛집에 대한 그리움을 해결하는 측면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면이 강하게 있습니다. 인생의 한계는 여러모로 나타나는데 저는 경제적인 면보다, 인격의 결함보다, 모난 성격보다, 힘든 대인관계보다 바로 이 면에서 깊은 한계를 맛보며 허무에 완전히 정복당한 채 허무와 더불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 때, 그동안 저를 괴롭혔던 허무와 슬픔과 그리움의 정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왜 이런 것이 존재하여 사람을 힘들게 하며, 왜 이런 것이 하나님을 알면 극복되는지에 관심을 많이 기울인 것입니다.

노천명 시인은 “잃었던 전설”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되찾을 수 없는 잃어버린 전설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향수로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각종 한계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욱 적나라하게 펼쳐질 때에, 일반인보다 더 섬세하고 여린 시인은 그 실존의 한계에 슬픔과 애달픔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그녀는 사람이라면 어떠해야 한다는 가치와, 그러했으면 하고 바라는 이상을 다른 이보다 뚜fut하게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기에 가지는 한계와 인간이기에 바라는 이상의 이 간격을 어떻게 메꿔야 합니까? 땅에 두발을 딛고 서 있는 인간이 어떻게 그 이상으로 초월하여 날아갈 수 있겠습니까? 메꿔지지 않는 차이와 간격을, 그녀는 슬픔과 향수로 대신 채워 넣으며 슬픈 몸짓으로 먼데 산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원과 진리에 대한 본능적인 갈구와 추구,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향수가 되어버림과 동시에, 인식되되 얻어지지 않기에 더욱 슬픈 나르시이즘이 되어 그녀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영원히 잃었던 전설로 남아 그녀를 두고두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예술과 문학에 심취하는 것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갈급함과 향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과 진리에 도달하려는 욕구가 예술과 문학으로 표현되고, 도달되지 않는 좌절감을 분출하려는 마음이 예술과 문학으로 표현되고, 영원과 진리에 대한 일단의 해석이 예술과 문학을 통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떠날수록 화려하고 감동적이고 슬프고 애달퍼, 자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사람은 여기서 한동안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예술과 문화가 아벨 계열이 아니라, 아벨을 죽인 가인 계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진리를 떠난 그들의 상실감과 퇴폐성과 불안과 자극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고, 그것들이 얼마나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가를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러기에 노천명 시인도 이렇게 나마 슬픈 시를 씀으로 상실감을 달래고 즐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면 왜 허무와 슬픔과 그리움이 극복되는 것입니까? 성경의 시인들은 왜 시편에서 노천명의 사슴과는 너무나도 다른 내용과 정서를 담은 시들을 쓰는 것입니까? 왜 시편의 시들은 사슴대신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그분이 하신 일들을 나열함에서 기쁨을 표현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나면 그 때부터는 사슴과 같은 시를 쓸 수 있는 자극적인 정서를 왜 잊어버리는 것입니까?

여러 답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천명의 시에 맞추어 답을 하면, 우리에게는 “잃었던 전설”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되찾은 전설”이 됩니다. 잊고 살았던 진리를 되찾은 것입니다. 왜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면 향기로운 관을 발견하면서 자기가 무척 높은 족속은 아니었는가 하는 느낌을 갖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부조리로 가득 찬 이 땅에 내던져지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이 완벽하게 준비하신 에덴 동산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완벽한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진리에 따른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바로 이 전설을 되찾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얼마나 높은 족속인가를 알아낸 것입니다. 알아낸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높은 족속이 된 것입니다. 알아낸 것에 그친다면 더욱 비참해질 것이지만, 우리는 알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9-10)

우리는 택하신 족속입니다. 사슴은 관이 향기로워 무척 높은 족속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택함을 받아 높은 족속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살인 사건이 극명하게 그 이후의 인간의 삶을 말해주듯, 우리는 부조리로 가득 찬 삶을 살아온 자들입니다. 아벨을 죽인 불안을 어떻게 달래야 하겠습니까? 고향에서 쫓겨난 상실감과 향수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어떻게 달래야 하겠습니까? 
예술과 문화를 발달시키며 불안을 달래보았고, 나름대로 에덴 동산과 같은 낙원을 만들려고 시도해보았지만, 바벨탑 사건이 말해주듯 모두 부질없는 시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유랑하며 어두운 곳을 전전하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다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높은 족속입니까? 높은 족속은 높아지려는 인간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택함을 받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는 자만이 유일하게 이 땅에서 높은 자가 될 수 있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시를 써도, 아무리 예술과 문화를 발달시켜도 오히려 자기의 적나라한 모습만 더욱 확인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의 놀라운 빛에 들어갔습니다. 어두운데서 하나님께서 그의 기이한 빛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볼 때마다, 잃었던 전설이 아니라, 되찾은 진리를 생각해냅니다. 물 속에 비치는 그 그림자는 이제 어둡지가 않습니다. 기이한 놀라운 빛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몸짓으로 먼 허공을 쳐다보겠습니까? 그런 슬픈 몸짓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선전할 뿐입니다.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널리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시들은 인간의 온갖 감상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와 하시는 일에 대한 나열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감정들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감정을 맛본 자들은 사람들이 추구하여온 예술과 문학이 얼마나 값싼 감상인 줄 알기에, 더 가까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 인생에서 시편의 시에 가까운 시를 쓸수록, 더욱 하나님을 깊이 알아간다는 것이고, 더욱 하나님을 즐거워함을 말해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온 허무와 그리움과 슬픔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불러주실 때 모두 없어져버리고, 감상적인 허무와 그리움과 슬픔도 없어지고, 대신 진리를 인해 정제된 감정과 정서들이 발생되어 더욱 더 곱게 형성되어갈 뿐입니다. 슬픈 몸짓을 하며 먼 허공을 쳐다보는 일이, 평안의 몸짓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로 바뀝니다.

이 글을 쓰느라 다시 노천명의 사슴을 읽어보았습니다. 깊이 생각에 젖어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모르던 고등학교와 청년 시절에 가슴을 시리게 했던 그 자극적인 감정과 느낌은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그 때는 힘들었다는 단편적인 느낌만이 막연히 되살아날 뿐입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세상의 문인처럼 슬픔 속에 잠겨 허무의 몸부림으로 언어와 감정을 매만지며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부르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그토록 지독한 허무도, 그토록 안정된 평안으로 바뀐다고 알리기 위함입니다. 노천명 시인처럼 섬세하고 예리하고 올곧은 삶을 동경하는 이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알아야만 그 지친 날개를 쉴 수 있다고 말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도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분이 계십니까?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욱 아름답고 향기로워 보이는 자기 모습을 분별해 낼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먼 산을 쳐다볼 뿐입니다. 이제 그만 그 시선을 거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향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높은 족속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향기로운 관으로 치장하실 수 있습니다. 물 속의 제 그림자에서 자기를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신 그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얻을 때에만, 우리가 돌아갈 회복된 에덴 동산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가지게 되며, 그래서 슬픈 모가지가 아닌 평안으로, 먼데 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며 찬양하게 됩니다. 그 길로 간절히 초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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