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관점에서 본 조나단 에드워즈의 언약론 | 정요석 | 2017-03-10 | |||
|
|||||
제가 2011년에 조직신학으로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제목은 "삼위일체 관점에서 본 조나단 에드워즈의 언약론"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정통신학에 기여한 바가 많지만 다소 이탈한 면도 있는데, 그 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신학 공부를 계속 하니, 성경을 더 깊고 넓게 볼 수 있고, 또 이것이 설교에도 반영이 되어 유익한 점이 많았습니다. 계속해서 신학공부를 하도록 격려해주시고 지원해주신 세움교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래에 제가 쓴 논문의 내용을 요약해 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논문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삼위의 존재방식을 심리적 유비로 본 것이 그의 언약론과 칭의론 등 신학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하여 살펴본다. 그는 성부는 근원적이고, 기원을 가지지 않고, 그리고 가장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속하는 하나님이고, 성자는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관념을 이해하거나 가짐에 의하여 발생되는 하나님이고, 성령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무한히 사랑하거나 기뻐함 속에서 나오는 행동 속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에드워즈는 자기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여 설명하지만 그 어느 하나도 성자가 하나님의 관념이고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벤자민 워필드와 폴 헬름 등은 그의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적이라고 비판한다. 그가 이렇게 심리적 유비에 의거하여 삼위의 존재방식을 보는 것은 하나님에게 하나님, 하나님의 관념, 그리고 사랑과 기쁨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이성이 충분히 우리에게 말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라고 일컫는 그가 삼위일체론을 이성에 의거하여 바라봄으로써 삼위의 존재방식을 이성에 의거하여 규정하였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그의 심리적 유비가 어거스틴과 다른 점은 어거스틴은 마음・사랑・지식, 기억・지성・의지 등을 들어 한 사람 내에 있는 기능들이 한 사람이라는 통일성에서 구별되면서도 하나가 된다는 것을 보였으므로 자연히 신적인 통일성이 강조되는데 반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관념과 사랑이 각각 성자와 성령이라고 보기 때문에 삼위의 셋 됨이 강조되었다. 에드워즈는 정통 신학처럼 각 위격은 고유한 구별된 영광을 갖지만 구별된 본질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세 위격들의 한 본질을 말하는데, 그로 인한 세 위격들의 놀라운 밀접한 연합을 강조하고, 더불어 그로 인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속성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때 성자에게는 관념이라는 속성이, 성령에게는 사랑이라는 속성이 대표적이다. 그는 각 위격이 한 본질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세 위격들 간에 있는 연합을 통하여 한 위격의 속성이 다른 두 위격들을 통하여 나타내는 것을 강조한다. 그의 신적 통일성을 다루는 방법으로 사용한 페리코레시스는 서방 교회보다는 동방 교회의 경향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위격들의 영광과 존엄에 밑도는 것이 사람을 구속하는데 요구되지 않는다면 단지 삼위의 경륜적 질서 내에서 사람의 구속은 행해지고 구속언약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라고 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만 새로운 특별한 언약의 필요성이 존재한다. 구속언약의 당사자라는 관점에서는 성령이 구속언약에 참여하지 못하고, 성령이 성부와 성자 간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존재방식의 속성으로 성령은 언약을 맺는 두 위격들 사이의 연합의 끈이 되고, 언약이 협정되는 가장 위대한 선이 되고 언약의 목적이 되어 구속언약에 참여한다. 에드워즈는 성령은 구속사역에 있어서 성부에 의해 구입되어진 것을 단순히 우리에게 적용하거나 그대로 전하는 정도로 일하지 않고, 성부가 구입한 것 자체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보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 다른 두 위격들보다 작지 않은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한다라고 하여, 구원사역에 있어서 각 위격의 동등성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존재와 본질과 속성에 있어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심에 둔다. 즉, 각 위격이 구원사역에 있어서 얼마나 동등하게 일을 하는가에 앞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존재와 본질에 있어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전체의 구원사역이 바로 분리되지 않는 삼위일체 자체의 일이 된다. 따라서 삼위일체 자체가 구원사역 모두에 참여하는 것이 되므로, 어떤 일들이 어떤 위격에게 돌려지는 것의 대소 여부로 각 위격의 동등성이 손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삼위의 각 위격의 사역의 동등성을 각 위격이 얼마나 희생을 하며 물리적으로 일을 동등하게 하는가로 본다. 에드워즈가 이렇게 보는 것은 그가 성자와 성령의 존재방식을 하나님의 관념과 사랑으로 보면서 삼위의 셋됨을 강조하게 되고, 따라서 사회적 유비에 의하여 사회적 삼위일체로 구속언약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삼위의 일치는 구속사역에서 각 위격이 서로 합의하여 같은 목적과 같은 방향을 갖고 구속 사역을 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에드워즈는 소위 “구도론”이나 “준비론”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이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나열하고 이것들을 성실히 수행하기를 강력히 촉구하는데, 이것만 보면 에드워즈는 칼빈주의자가 아니라 알미니안이라고 오해받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믿음의 기원이 아니라 믿음의 역할에 대한 표현이다. 에드워즈는 구속언약에서 성자가 자신을 내주고 성부로부터 구입한 것이 성령이고, 이 성령이 성도에게 내주하여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사랑의 원리, 거룩의 원리, 신적인 원칙, 새로운 성향 등이 되어 영생과 견인과 칭의와 중생과 회심과 믿음 등을 일으킨다고 본다. 이때 성령은 사람의 기능과 너무나도 밀접하게 연합되어, 그 자체로 새로운 성품의 원리가 되고, 이것은 사람 안에서 자연스럽고 활력 있는 원리의 방식을 따라 사람의 기능의 사용 속에서 자신의 속성대로 자신을 발휘한다. 그런데 이 원리로 인하여 발생되는 성향(disposition)이나 경향성(habit)을 이상현은 존재론적인 것으로 해석을 하고, 그의 제자 안리 모리모토는 에드워즈에게 있는 “성향적 존재론”(disposional ontology)은 가톨릭과 비슷한 구원론을 전개시킨다고까지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하여 강웅산은 에드워즈에게 있어 성향은 성령의 내주를 나타내는 용어로 회심이 성령의 사역으로 얼마나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의한 것인가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고, “성향적 존재론”은 성령의 인격과 사역을 단순히 “효과적인 존재”(virtual existence)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필자는 강웅산의 “성향적 존재론”은 “존재론적 성향”(ontological disposition)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성령이 성도에게 내주하여 새로운 원리나 성향이 되어 견인과 칭의와 중생과 믿음 등을 일으킨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는 성령의 존재방식을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나오는 행동과 에너지로 보기 때문에 성령의 속성에 항상 이런 행동과 에너지라는 측면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존재방식을 갖는 성령이 왜 성부와 동등한 인격을 갖는지에 대해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렇게 인격성이 충분히 부여되지 못한 성령이 성도에게 내주하여 새로운 원리나 성향이 되어 자신을 발휘하기 때문에, 에드워즈가 비록 성령의 지속적인 내주를 말하지만 성령은 단순하게 행동과 에너지를 발휘하는 존재가 되는 면이 에드워즈가 의식했든 안 했든 있다. 이런 측면 때문에 그는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의 선임자인 스토다드의 중도언약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았고, 성도들에게 분명한 신앙고백과 거룩한 실천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에드워즈는 진실된 성도라면 내주하는 성령에 의하여 당연히 영생과 견인과 칭의와 중생과 회심과 믿음 등을 소유하고, 따라서 외적 고백과 경건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에드워즈가 강한 신앙고백과 실천을 요구하는 것은 그가 작정과 예정이란 관점보다는 신적인 통일성보다는 삼위의 구별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심리적 유비를 사용하여 사회적 유비의 삼위일체 모델로 자기의 신학을 전개해나가 언약이란 관점을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구별되는 위격들 간의 구속언약과 구별되는 위격들과 사람 간의 은혜언약에서 각 언약의 당사자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언약의 당사자의 한 축을 이루는 사람이 무언가 행동을 하고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작정과 예정의 관점에서도 사람의 행동과 반응은 중요하지만, 이러한 것이 보다 크고 넓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 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택자들을 오랜 시간 기다리며 붙들고 성장시킨다는 개념이 있어, 사람의 행동 여하에 따라 하나님이 당장 그대로 반응한다는 개념이 약하다. 필자는 에드워즈는 분명히 알미니안을 반대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실천적 삼단논법에 따라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이것은 적절한 절제와 정도를 넘어서면 그가 반대하였던 알미니안과 같은 인간 내면의 능력을 요구하는 모습을 취할 수 있고, 적절한 절제와 정도에 있다면 자칫 칼빈주의가 범할 수 있는 인간편의 소극성과 운명주의를 타파하여 역동성을 갖게 할 수 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