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프리칭이란 월간지가 있습니다. 설교를 하시는 분들을 돕기 위한 잡지입니다. 그곳에 2005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인간적 감동과 진리의 감동"이란 제목으로 행 4:17-31을 본문으로 한 설교입니다. 글 뒤에는 설교노트라는 소제목으로 설교하는 자세와 방법 등에 대한 짧은 서면인터뷰도 있습니다. 이 글이 조금이나마 읽는 분들에게 유익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적 감동과 진리의 감동
한국 사람에겐 감옥에 갇히는 일이 그런 낯설지 않습니다.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나, 해방 후 사회주의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은 사람들이나, 또 민주화 투쟁을 한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감옥에서 보낸 세월을 회상하며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감옥생활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자기들이 감옥에 왜 갇혔고, 자기들을 감옥에 가둔 체제와 사람들에 대해 어떤 증오심과 생각을 갖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그의 동류들은 과연 이것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풀려난 두 사도를 본 동류들은 한 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두 사도의 갇힘을 보는 시각은 항일투사나 민주화 투사들과 그 격이 달라, 이들의 시각은 바로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이들은 25-26절을 말하는데 이것은 시편 2편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2:1-4절을 보면 땅과 하늘의 큰대조가 나옵니다. 땅에 열방과 민족들이 있고, 이들을 통치하는 군왕들과 관원들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서 얼마나 많은 왕과 영웅과 무사들이 할거했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각 나라의 대통령과 수상들이 자기 나라를 부국강성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동분서주하고 있고, 국가 못 지 않는 위력을 발휘하는 대기업의 기업가들은 이윤창출을 위하여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간단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라고 표현하고 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은 땅이 아닌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땅에서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군왕들과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고 할 때에 하늘에 계신 자는 비웃으십니다. 하늘에 계셔서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데, 이것을 모르고 오히려 대주재를 대적하자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드니 얼마나 가소롭겠습니까?
사도행전 4:17-18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을 잡은 이들이 사도들을 위협하며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이 비록 이스라엘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 영향력이 누구로부터 왔는지 그 근원도 모르고 함부로 행동하는 꼴이 우리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그러자 두 사도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말합니다. 두 사도는 “하나님 앞에서”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돌들은 분명히 소리 지릅니다. 결코 시적인 표현만은 아닙니다.
땅과 하늘의 대조! 이것은 참으로 큰 차이입니다. 땅만을 바라보는 자는 지금 자기에게 벌어지는 일에 얽매어 이 일의 결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진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래서 이 일을 무엇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4:27절에서 헤롯, 본디오 빌라도, 이방인, 이스라엘 백성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 그 후에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위협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러한 행동을 28절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냥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서로 꾀한 바를 자기들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으로 예전에 결정하신 바를 이루는데 사용된 수단들입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감옥에 갇힌 것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나 민주화 인사 중에 누가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습니까? 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서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논했습니까? 이들이 쓴 글에는 감옥에 있으며 느낀 여러 심정과, 밖의 가족과 자연에 대한 뼈저린 그리움과, 그리고 자기들이 몸을 바치며 싸우고 있는 국가와 이념과 민주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담겨 있지만, 그래도 이것들은 인간적인 것입니다. 인간적이기에 감동이 있고 슬픔이 있고 동정이 있고 소중함이 있지만, 그래도 이것은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스러지는, 때때로는 그 격한 감정이 젊은 한 때의 이상과 순수함에 지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때때로는 자기 감정과 사상에 자기가 취했다고 후회해보는 그러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이 왜 발생하는지, 누구로 말미암는지 알면서 행동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결코 누구 때문에 발생했다고 불평하거나, 바로 그 작자가 없어지면 우리 일을 이룰 수 있을텐데라고 분노의 칼을 갈지 않습니다. 언제 사도들이 사단 때문에 이 일이 발생했다고 한 적이 있습니까? 언제 이들이 헤롯 때문에, 빌라도 때문에 예수님이 죽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보다 더 먼 원인을 보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원인을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어떤 어려움을 해결해주어서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찬양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겪으며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정말 우리에게 소중한 진리와 영생과 천국을 받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강력한 어떤 신을 하나 믿는 것인지 좀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전자는 자칫 잘못하면 인간화된 하나님이 되기 쉽습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 발생할 때마다 슈퍼맨처럼 갑자기 나타나 해결해주는 그런 감동의 신이 되기 쉽습니다. 더구나 그 해결하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기도하며 응답을 강요하는 사람인 경우에는 자기가 만든 가공의 신을 믿는 것은 아닌지 더욱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의 필요를 위해 자기가 만든 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9-30절이 바로 사도들의 기도입니다. 이들은 헤롯과 빌라도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을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현 상황을 뿌리 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힘이 부족하여 사단에게 밀려 현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높으신 뜻 가운데 현 상황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 상황을 송두리 부인하며 전혀 다른 상황을 달라는 대신에, 다만 그 상황에서 자기들이 해야 할 바를 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기도문을 문맥과 떨어져 살펴보면 많은 오해를 하여, 병이 낫는 것과 표적과 기사가 이루어지는 일 자체에 너무 많은 관심을 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죽음을 위협하는 이들 앞에서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이것이 효과적으로 전하여지도록 이러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잘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이 순교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 왜 순교했습니까? 엄청난 이적을 일으키는 이들이 이적을 일으켜 도망하지 않고 왜 피를 흘리며 죽음을 택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순교를 통한 복음의 전파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기꺼이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을 진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이들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자기들의 죽음을 통하여 참된 복음이 선포되고 뿌려지는 것을 확신하기에 순종하는 것이고, 죽음 그 자체가 두렵지 않고 그 이후에 자기들에게 열리는 세계를 확신하고 사모하며 이들은 죽는 것입니다.
이들은 죽을 때 한이 있을까요?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일을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에 한이 맺혀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을까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분에게 하지 못할 일이 그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하지 못하면 돌들이라도 그 일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어찌 한을 품으며 죽는 일이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꺼이 가벼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순교는 애국자의 순국이나 소방관의 순직과 격이 다릅니다. 저들은 땅만을 바라보며 인간의 감동으로 죽어가지만, 이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진리의 감동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교와 사역은 이러한 차원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초월하여 우리의 힘으로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신성을 훼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내가 바로 그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없어져야 하는데, 그 체제가 전복되어야 하는데와 같은 우리 수준에서 현 상황을 판단하고 구체적으로 미래상을 열거하는 것이 때때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과 대주재되심을 손상하게 됩니다.
시편 2: 10-12절로 가서 10절을 보면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에게 지혜와 교훈을 얻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지혜와 교훈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잠언 1:7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잠언 9:10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합니다. 욥기 28:28절은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혜와 교훈과 명철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한다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모든 것은 자기 열심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일이 일을 부르고 열심이 열심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을 할 때 어떠한 하나님을 믿느냐 입니다. 땅만을 쳐다보며 우리의 힘으로 무엇 무엇을 하겠다고 열심히 꾀하고 행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인간과 자기에 대한 경외로 이러한 일을 하며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이런 인간적인 것에 있지 않고, 진리에 있습니다.
설교 제목인 “대주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짓고 다스리시는 분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대주재이신 분을 믿는다면 우리의 신앙과 사고와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여보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많은 경우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오해에서 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라고 시편 2:12절이 말하고,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시편 1:2절이 말합니다. 이러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움이 있고, 직장과 가정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일이 없고 온전히 즐길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감동에서 진리의 감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 이번 설교의 주제를 선정한 이유
사회가 개혁이 되어가고, 문화가 세련되어질수록 그리고 이에 반하여 기독교회들은 사회적으로 여러 잡음을 낼 때, 기독교의 진리는 상대화되는 위험이 있다. 꼭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 문화와 사회에도 깊은 감동이 있다고 여긴다. 이런 시대에 기독교가 말하는 감동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전하고 싶었다.
2. 본문 선택 배경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으로 자기 인생의 한 때를 보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많이 있다. 이들은 어떤 가치와 감동으로 이런 일을 했는데, 그렇다면 감옥에 갇히고 순교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한 사도들은 어떤 가치와 감동으로 했는가? 본문은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이들을 맞이하는 동류들의 신앙관과 가치관이 잘 나와 있어 비교할 수 있다.
3. 설교 작성과정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하던 중 13번째로 설교한 본문이다. 칼빈 주석을 참조하는 편이다. 설교 작성은 이 본문에 대한 묵상과 여러 준비도 필요하지만, 그전에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이 기본적으로 되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본문을 이용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쉽다고 생각하여 평소에 조직신학을 공부하는 편이고, 인터넷 서핑을 통해 여러 뉴스와 자료를 접하여 현대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4. 이번설교를 통해 성도에게 바라는 점
인본적 관점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의 삶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기 바란다.
5. 설교 철학에 대한 내용
설교자의 생각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예수님처럼 쉽고 깊게 전해야 한다.
교회 소개
서초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남서울노회에 속한 교회로 1999년 4월에 서초3동에 설립되었다. 각자의 경험과 성향에 따른 신앙생활이 아니라,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검증된 신앙생활을 지향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깊이 알아 삶과 사고가 진리의 떨림으로 변화되고, 그 시각으로 사회와 문화를 관조하고 해석하고 누리기를 바란다. 신앙고백과 치유와 상담을 공부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1510-3 서초교회 / (02) 3473-6442 / http://www.ch4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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