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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전제: 2006년 11월 작성 정요석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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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서원에서 "말씀묵상"이란 월간지가 발행됩니다. 그곳에서 2006년 12월 주제 말씀이 잠언이었는데, 잠언을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저에게 원고청탁하여, 잠 25:21-22을 본문으로 하여 직접 서초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그곳에 글을 기고했습니다. "말씀묵상"이란 잡지는 "생명의 삶"보다 더 깊이 성경을 보려는 목회자나 일반 성도들을 위한 잡지입니다. 

 

                                                                                         지혜의 전제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다, 작은 일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모래에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빰을 때렸다." 라고 적었습니다. 싸운 두 친구는 서먹해져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목욕을 했는데, 뺨을 맞은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졌습니다. 그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고, 생명을 건진 친구는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가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준 후에는 돌에다가 적었지?"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는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지워버리도록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해.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는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감동과 교훈을 주는 이 예화가 정확히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아시스와 모래가 나오는 것을 보니 중동의 사막지대에 인접한 나라들인 것 같습니다. “원수는 모래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 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위의 예화는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 라는 우리나라속담을 떠오르게 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원수를 용서하고 은혜를 기억하여 잘 갚으라는 속담이나 격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설교 본문도 원수에게 은혜를 베풀라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오늘 본문 말씀은 “원수는 모래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라는 중동의 격언이나,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 라는 우리나라 속담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오늘 설교는 어느 나라에나 있는 속담이나 격언이나 경구와 잠언의 말씀에는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 학자들은 욥기, 잠언, 전도서를 지혜서라고 말합니다. 지혜에 관하여 말한 내용들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런 지혜서와 유사한 지혜서들이 애굽이나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도 있습니다. 특히, 애굽에 “아멘엠오페의 교훈”이라는 지혜서가 있는데, 이것은 잠언 22:17-23:11절과 유사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잠언 22:17-23:11절은 애굽의 “아멘엠오페의 교훈”을 참고하여 작성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잠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영감된 책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 있는 여러 지혜서들을 후대의 사람이 참고하여 편집한 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는 속담이나 격언이나 경구와 성경에 있는 잠언의 말씀에 어떤 유사점과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잠언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살펴본다는 뜻도 됩니다.

먼저,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 본문을 보니 성경의 어떤 구절이 떠오릅니까? 롬 12:20의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는 말씀이 떠오르기도 하고, 출 23:4,5절의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라는 말씀도 떠오릅니다. 또,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라는 열하 6:22절의 엘리사가 아람 군사들에게 선을 베푸는 장면도 떠오릅니다.

먼저, 출 23장으로 가서 1절-8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구절들도 주변 나라들의 일반 지혜와 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꼭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들을 영감된 말씀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같은 속담과 격언일지라도 비그리스도인이 보느냐 그리스도인이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출 23장의 이 말씀도 신자가 보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의미는 매우 달라집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현재의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을 읽을 때에 하나님을 전제로 하여 읽습니다. 창조자 하나님, 섭리자 하나님, 심판자 하나님을 명백하게 인정하고, 믿고서 이 말씀을 봅니다. 이에 반하여 비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흐릿하게 인식하면서 이 말씀을 봅니다. 그래서 양쪽이 같은 말씀을 보아도 그 뜻에서는 크게 차이가 납니다.

출 23:1-3절이 말하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는 것, 무함하는 증인이 되는 것, 악을 행하고 부정당한 증거를 하는 것, 가난한 자의 송사를 멸시하는 것 모두를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이러한 행위 자체를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압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므로 이런 잘못된 행위를 싫어하시는 것을 알므로, 이런 행위를 안 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이런 행위를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 주실 것임을 뚜렷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떨림과 두려움으로 이 구절을 읽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인 아합 왕이 화살을 맞아 죽었습니다. 성경에는 우연히 이 화살이 날아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 내용을 통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고자 하면 우연히 날아가는 화살 같은 것을 통해서도 벌을 주신다는 것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음을 알고 우리의 행위에 있어서 조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도 하나님이 증인이 되시고 감찰하시는 줄 알고 옳은 일을 행하고자 합니다. 지금 당장은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행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시간 속에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실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같은 구절이라도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서 그 말씀의 의미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같은 말씀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깊이 각인되지만, 비그리스도인에게는 얕게 각인됩니다. 비그리스도인에게는 말씀보다는 상황이 우선되어 자기의 필요에 따라 좋은 바를 선택합니다.

출 23:8절도 좋은 예입니다. 이 말씀은 잠언 17:23의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라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속담이나 격언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습니다. 이처럼 뇌물의 해악을 언급하는 속담이나 격언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다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그 격언 뒤에 전제되어 있는 섭리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 그 격언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섭리하시고 감찰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뇌물에 관한 격언을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그 격언을 무시합니다.

영국에서 잠시 공부를 할 때, 그곳 사람들이 얼마나 정직을 미덕으로 여기는가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시에서 저렴한 임대료에 공급하는 아파트가 있는데, 아이가 있는 부부면 입주할 수 있는 우선순위가 주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유학 온 미혼자들이 결혼을 하지 않았음에도 남녀가 같이 가서 결혼을 했다며 아파트를 신청합니다. 어떤 남녀는 아이까지 빌려서 자기들의 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래도 시당국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우선순위를 부여합니다.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고서, 결혼한 부부라는 증명서나, 데려간 아이가 자기 집 아이라는 증명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또, 제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어떤 기관에서 저에게 졸업증명서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본부에 졸업증명서를 요구했더니, 졸업증명서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했다는 증명서가 한국에서는 쉽게 요구되는 문서이지만, 제가 공부할 당시의 영국에서는 졸업증명서라는 개념이 낯설었습니다. 그만큼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지교회들이 담임목사를 청빙할 때도 대학교부터 신학교까지 졸업증명서를 모두 요구하고 있습니다. 목사의 말도 잘 믿지 못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오래 동안 뿌리내린 서구 사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문화화되어 사회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참된 신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자세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그 사회의 도덕성을 높였습니다. 서로 믿고 사는 사회가 되는데 크게 일조했습니다.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이 수해를 당한 사람들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진실되게 사는 삶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속담과 격언이 무겁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도록 하는 일은 더욱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속담과 격언의 의미를 올바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자와 섭리자와 심판자 되심을 아는 자들만이 속담과 격언의 참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흐릿하게 창조자 하나님, 섭리자 하나님, 심판자 하나님을 느낍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계절과 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별들의 조화, 가을의 단풍 그리고 인체의 오묘함 등을 통해 사람들은 창조자 하나님에 대하여 흐릿하게나마 인식합니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의 죽음, 혈기 부리는 자의 낭패, 착한 일을 한 자에게 돌아오는 사회의 보답 등을 보면서 사람들은 섭리자 하나님에 대하여 흐릿하게나마 인식합니다. 옳은 일을 했을 때의 마음의 떳떳함, 악한 생각과 발언에 대한 마음의 가책 등을 통해 사람들은 심판자 하나님에 대하여 흐릿하게나마 인식합니다.

세상의 속담과 격언은 이렇게 흐릿하게 느낀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생각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속담과 격언은 모두 받을 만한 가치가 일정 부분 있습니다. 사람들이 삶과 사회를 이해하는데 일정 부분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하나님의 실체에 대하여 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은 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하나님에 대한 흐릿한 인식뿐입니다.

더군다나 세상의 속담과 격언, 그리고 이집트의 아멘엠오페의 교훈과 같은 것들이 전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구원자 하나님입니다. 속담과 격언의 의미를 삶에 잘 적응하여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성공을 할지라도, 그 사람이 구원자 하나님을 모르면 궁극적으로 그의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의 전도서가 이것을 잘 말해 줍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지혜로 성공하는 삶을 살지라도, 구원이 없으면 인생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말합니다. 전 2:14,15은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 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라고 말합니다. 지혜자와 우매자가 죽는 일에 있어서 같으므로 지혜자가 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속담과 격언을 통한 이 땅에서의 성공은 결코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지 않으면 이 땅에서의 성공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속담과 격언은 단지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와 옳음에 대하여 말한다면, 성경은 구원까지 말합니다. 성경의 잠언은 그래서 단순한 처세술이나 인생을 요령 있게 사는 법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는 것에 대하여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성공적으로 사는 목표관리 노하우에 대한 언급이 아닙니다. 이런 면이 잠언에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것은 모두 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그리고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전제하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잠언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반 지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롬 12:19-21을 봅시다. 잠언의 오늘 본문에 어떤 전제가 있는지를 롬 12장이 잘 설명해줍니다. 19절의 “진노하심에 맡기라”와 “내가 갚으리라”가 바로 그 전제입니다. 아합 왕이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리고 룻이 어떻게 보아스를 만났습니까? 모두 “우연히”입니다. 아합 왕은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죽었고, 룻은 보아스의 밭에 우연히 들어갔습니다. 물 한 방울도 우연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머리털도 모두 하나님에게는 세신바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므로, 우리보다 악을 더 싫어하시고 진노하십니다. 그러므로 원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갚으십니다.

우리가 원수에게 복수하고 싶을 때, 가장 잔인한 복수는 그대로 놔두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철저하고 정확하게 복수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상대방이 정말로 잘못했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원래의 상황보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복수하고자 하면 상대방이 잘못한 정도를 넘어서서 복수하기 쉽습니다. 복수심으로 일가족을 살해하고 자기도 자살하는 경우들이 그 예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자기의 혈기를 이기지 못해, 도가 넘게 복수한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에게는 어떤 잘못이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 잘못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상대방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만 하나님께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복수심으로 우리의 머리가 들끓는 것도 하나님 앞에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복수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그 마음이 편해져야 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정확하게 복수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얼마나 평안한 마음을 갖느냐에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잘못한 자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신앙의 수준으로 나가야 합니다. 원수가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원수를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우리의 이러한 행위에 얼마나 찔리겠습니까?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 것과 같습니다. 숯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을 받습니다. 바로 이렇게 한 사람이 선지자 엘리사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죽이려고 에워싼 아람 군대의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엘리사는 이들을 사마리아로 인도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죽이려고 했지만, 엘리사는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나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들은 엘리사가 사는 동안은 더 이상은 이스라엘을 침입하지 않았습니다.

잠언은 총 31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한 장씩 읽기에 좋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처세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요사이 취직이 잘 안 되고, 취직이 되어도 평생직장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이다 보니 사람들이 인생의 안정과 성공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기독교 출판계도 이와 관련된 책들을 많이 펴내고, 실제로 이런 책들이 잘 팔립니다. 하지만, 잠언을 이런 관점에서만 읽으면 안 됩니다. 목표 관리 노하우나 사람을 얻는 법에 대해서도 잠언이 말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조자이시고 섭리자이시고 심판자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인생인가를 말하지 단순히 이 땅에서의 성공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성경다워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셨기 때문이고, 성경의 모든 내용은 창조자이시고 섭리자이시고 심판자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이 설령 애굽의 아멘엠오페를 참고하였을지라도,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영감하신 것이 되고, 창조자이시고 섭리자이시고 심판자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전제되어 다른 의미와 격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삶을 통하여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경만을 읽는 분은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계시들을 놓치는 것입니다. 자연과 역사와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우리를 철들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중독이 되어 찬송가만을 듣고, 기도만 하고, 설교만 듣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하여 말을 하고, 성경의 내용을 말하지만, 그 말하는 내용이 상황에 맞지 않고, 깊은 지혜가 없습니다. 자연과 역사와 양심과 사람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상황에 맞지 않는 거룩한 말만, 뜬금없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을 사랑과 격려에 쓰기보다는 남들을 날카롭게 찌르며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잠언과 일반 속담과 격언의 차이를 알았으니, 일반 속담과 격언을 배격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담긴 책들과 예술 작품들도 배격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그것들에는 하나님이 흐릿하게 계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주의하면 됩니다.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와 뮤지컬에는 진리의 흐릿한 한 면만이 담겨 있음을 알고 푹 빠지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성경을 통하여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특별계시를 통하여 그것들에서 하나님의 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구원자 되심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개신교는 일반계시의 풍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 풍부함을 누립니다. 동시에 그 한계를 인식하고 주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반계시를 주시어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을 이해하고 누리게 하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연을 더 관찰하고 더 이해한다는 소리입니다. 기독교인이 농사를 지으면 자연의 섭리와 조화와 미묘함에 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농사를 짓게 됩니다. 기독교인은 지난 역사와 지금 현재 진행되는 하루 하루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찾고 기대하고 의지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삶 자체를 관찰하고, 하나님의 분명한 손길을 느끼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관찰자의 삶, 관조하는 삶을 살며 항상 기쁨과 감사와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롬 1:20절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라고 말합니다. 처음 창조가 된 때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 분명히 보여졌습니다. 분명히 보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여 우리의 어리석은 눈을 띄워주었으므로 이제 그 풍성함을 발견하고 감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이 있는 삶이 성공한 삶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에서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바에 따라, 우리가 원수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이 시간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게 떡과 물을 주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에게 떡과 물을 주는 것이 가장 잔인한 복수이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임을 알아 그대로 실행하도록 이 시간 다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확하심과 사랑을 믿고서 이런 마음을 이 시간 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품을 때 우리의 마음이 평안을 찾습니다. 원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화를 풀어야 합니다. 잠언에 전제되어 있는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사랑을 맛보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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