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2003년 6월 작성 | 정요석 | 2017-03-10 | |||
|
|||||
2006년 5월 7일 주일설교에서 엡 4:19절의 "감각 없는 자 되어"라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3년 전에 이 구절을 묵상하며 글 하나를 썼는데 이곳에 올립니다. 제목: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부제: 감각 없는 자 되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을 아십니까?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한하운 시인이 문둥병에서 나은 뒤 헤어진 여인이 너무 보고 싶어, 결혼하여 살고 있는 그 여인 집의 골목길에 거지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남편과 아이와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돌아섰다는 국어선생님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가슴 졸이며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는 1919년에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태어나 함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목축업에 종사시키려던 부친의 뜻을 따라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학과에 지원하여 19대 1의 경쟁을 돌파하고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졸업반인 5학년 때에 문둥병을 선고받습니다. 문둥병은 피부가 문드러진다 해서 나온 이름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일종의 피부병입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발생 원인과 전염 경로를 모르고 특별한 치료법도 없어 단순한 피부병을 넘어 천형병(天刑病)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지은 큰 죄에 대해 하늘이 내린 벌로 사람의 치료 영역을 넘어서므로 하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지요. 지금은 나균(癩菌)을 인해 조직이 파괴되는 전염병이라는 것을 밝혀냈고, 이에 대한 적절한 치료법도 개발되었습니다. 아직 전염 경로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지만, 예전과 달리 문둥병을 천형병으로 보지 않고, 문둥이에 대한 편견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정식 명칭도 이 병의 연구에 자기 몸을 바치며 헌신한 노르웨이 의사 한센(Hansen)의 이름을 따 문둥병은 한센병이라고 하고, 문둥이는 한센병 환자(Hansen's disease patient)라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문둥이는 병을 나으려고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속설이 있어, 동네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돌을 들고 쫓아내곤 할 정도로 편견이 심했는데 말입니다. 이 병이 무서운 것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살이 문드러져 썩어가고 있는데 그것을 못 느낍니다. 그래서 특별한 치료약이 없던 예전에는 환자들이 자고 난 후에는 발가락과 손가락을 만져보며, 10개가 되는지 세어보았다고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발가락과 손가락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하운 시인이 한센병 환자들을 집단으로 수용하고 있는 전라도 소록도로 가는 길을 시로 표현한 작품을 보면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全 羅 道 길 …소록도로 가는 길에… 한 하 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全羅道)길 숨막히는 더위 속을 정상도 아닌 한센병에 걸린 채 터벅터벅 걸어가는 시인을 상상하여 보십시오.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에 숨막히는 더위뿐이라고 말한 시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다가 쉬느라고 버드나무 밑에서 신을 벗어보면 어느새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습니다. 한센병 환자는 발가락이 없는 것을 신을 벗고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또르르 굴러가는 소리에 눈을 들어 살펴보니 발가락이 굴러가는 소리인 것입니다. 한하운 시인은 이리 농림학교 시절에 육상선수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순발력과 반사신경이 뛰어나 출발신호를 알리는 총소리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이고, 자기 몸의 근육을 힘차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균이 침투함으로 인해 발가락이 잘라져도 감각이 없어 아무 반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각이 없는 것은 무섭습니다. 지하철역에 보면 좋은 글들을 액자에 담아 걸어놓는데, 언젠가 수술실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소리에 대해 적은 글을 보았습니다. 환자가 아프다고 고통을 지르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큰 고통이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살아있다는 반가운 징후라며,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 가는 환자는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것은 아직 행복한 것으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회복되는 것이라고 결론짓는 글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아이 셋을 기르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 크고 작은 사고로 우는 일이 발생하곤 합니다. 침대에서 놀다 밑으로 떨어져 울기도 하고, 계단에서 구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아이들은 여지없이 울어 대는데, 셋을 키우다 보니 이제는 울음소리만 듣고도 어느 정도 다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큰 울음소리로 오래 울면 많이 다친 것이 확실합니다. 아이들이 작게 짧게 울어주기를 바라며 다친 부위를 확인하곤 합니다. 하지만 정말 큰 사고를 당했을 때는 아이들이 울어주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울면 괜찮은 것이라고 어른들이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크게 다쳐 정신을 잃으면, 울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운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소리이고, 자기 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온전하여, 전체적으로는 정상이라는 소리입니다. 이 만큼 감각이 살아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입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17-24) 육신의 사지가 점점 굳어져 온 몸 전체로 퍼지면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육신의 이러한 굳어짐과 감각 없음이 육신만이 아니라 총명과 마음에도 있습니다. 에베소서 4:18절 말씀을 보면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고 합니다. 19절에는 저희가 감각 없는 자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들은 육신에 있어서는 한센병에 걸린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육신과 머리는 감각이 살아 있고 반사신경도 빠르게 반응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총명과 마음은 둔하여지고 감각이 없습니다. 이것들에 감각이 없으면 비록 육은 살아있어도, 영은 죽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지고 감각이 없어진다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적나라하게 확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6개월 전부터 교회당을 짓고 있습니다. 교회당을 짓다보니 현장 소장과 자연스럽게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위암 초기라서 위 절제 수술을 6개월 전에 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나니 음식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빠졌던 살도 많이 붙었습니다. 한 달 전에는 같이 점심 식사를 하며, 대화 중에 위 절제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전도할 생각에 위 절제 수술을 할 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병은 위암 초기라 수술하면 간단히 해결된다는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저는 의외의 대답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습니다. 그 분은 계속해서 자기는 위암을 발견하기 전에 자기의 삶에 대한 보호와 준비로 보험을 12개 들어놓았는데, 이번 수술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이렇게 삶을 준비해왔고, 지금부터는 은퇴 이후의 노년에 대해서도 준비해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기회다 싶어, 그러면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준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죽음 이후가 무슨 말이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장께서 보험 12개를 들며 삶을 준비해왔는데, 사람이 그렇게 살다가 죽게 되는데 바로 그 죽음 이후를 준비해두었냐는 물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조금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제가 아주 좋은 질문을 하여, 드디어 죽음과 영생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뿌듯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저의 뿌듯함은 그의 대답에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는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준비해 두었다며, 자기 가족들까지 포함해서 12기가 화장해서 들어갈 묘자리를 준비했노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대답에 너무나 놀랐습니다. 어떻게 죽음 이후의 준비에 대해 그런 대답과 생각이 나올 수 있는지 너무나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고, 거듭되는 죽음 이후에 대한 제 설명을 듣고는, 죽음이 아직 먼데 무엇 하러 벌써부터 죽음 이후에 대해 생각하느냐고 오히려 반문했습니다. 자기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일반적이라며 오히려 저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분은 초상집에 가서도 한 번도 죽은 후에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어느 세계로 가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결국은 모두 죽게 되는데 이것을 인해 허무함을 느껴 본 경우도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 이후의 준비에 대해 현장 소장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분이 오랜 동안 건설업에 종사하며 많은 경험을 쌓아 건설에 있어서는 좋은 감각을 가진 실력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분은 건설업 분야에서는 총명이 있고 감각이 있을 지 모르나, 하나님의 생명에 있어서는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지고 감각이 없는 분입니다. 육신이 살아있는 생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단견자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치를 모르는 분이고, 아예 이에 대한 감각이 없는 분입니다. 같은 단어에 대한 개념과 뉘앙스가 서로 간에 너무 다른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며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보니 이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서로 다툰 사람이 상대방을 비방하며 “저 사람과는 말이 안 통한다, 저 사람과는 대화가 안 된다, 저 사람은 달을 보라고 손가락을 가리키면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단세포적인 사람이다, 저 사람은 정과 낭만을 모르고 물질만 아는 차가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다” 등의 표현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도 이런 경우를 특히 하나님의 생명에 관한 감각에 있어서는 그 동안 많이 당한 것입니다. 분명히 저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교제를 나누고 대화를 하는데, 하나님의 세계에 관한 내용이 나오면 전혀 다른 문화에서 사는 사람과 외국어로 대화를 하는 것 같습니다.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우리 인생도 결국 저무는 때가 있다는 것을 느끼며 죽음에 대해 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살아있는 모든 것이 죽고 변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며 허무함에 왜 빠지지 않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신혼 부부가 어느덧 사랑의 열정은 식고 권태로운 부부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왜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느끼며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에 대해 목말라 하지 않는 것입니까? 어떠한 이념과 어떠한 정권과 정부도 이 땅에 유토피아를 가져오지 못한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왜 사람의 별 수 없음과 미래에 대한 비관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까? 진화론에 대해서 할 말이 있습니다. 저는 진화론을 볼 때마다 사후약방문이라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프로야구 같은 경기에서 감독의 작전에 대해 결과에 따라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노아웃에 1루에 주자가 있을 때, 번트를 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강공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만약에 해설자가 강공을 하는 감독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강공을 하다 병살타를 쳐 더블 아웃이 되었을 때, 갑자기 감독의 강공책을 비판하였다면 누가 이 해설자를 공평하고 정직하다고 하겠습니까? 누구든지 결과를 보고서는 작전에 대해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기린이 목이 긴 것은 높은 나무에 달린 잎사귀를 먹으려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코끼리가 코가 긴 것은 다른 신체 부위가 나무의 잎사귀를 뜯어 먹는데 부적당하여 코가 길게 자라는 형태로 진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형태로 토끼의 뒷다리가 긴 것도 설명하고, 사자가 무리를 지어 집단생활하는 것도 설명하고, 호랑이가 단독 생활하는 것도 설명하고, 치타가 나무를 잘 타는 것도 설명합니다. 저는 이런 설명을 들을 때마다 상황에 끼워 맞추는 설명이라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듭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설명하지 못할 현상이 없습니다. 제가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입원한 첫 날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병실의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습니다. 몇 시간 후에는 간호사가 와서 포도당 주사를 맞아야 한다며 제 왼 손에서 혈관을 찾아 바늘을 꽂았니다. 그런데 익숙하지 못한 간호사였는지 너무나 아팠습니다. 제대로 혈관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근육을 건드린 것 같았습니다. 그 간호사는 끝내 혈관을 찾는 작업을 실패하고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냥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곤 얼마 있다가 다른 간호사가 와서 작업을 하였고, 다행히 간단하게 혈관을 찾아 정확히 주사를 꽂아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포도당 주사를 맞았습니다. 그 다음날에 무사히 수술을 받고, 며칠 더 회복 기간을 가진 뒤 퇴원하였습니다. 10일 정도 되니 수술 부위의 고통도 가라앉아 정상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퍼렇게 멍이 든 채 여전히 고통이 있는 부위는 놀랍게도 그 서투른 간호사가 혈관을 찾느라고 꽂아댄 주사바늘 부위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혈관을 정확히 찾아 주사 바늘을 꽂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잘 아는 후배 의사가 인턴 생활 때 처음 몇 개월간은 문 혈관을 찾아 주사 바늘을 정확히 꽂는 일이 무척 어려워서 고생했다는 고백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기 있지 않습니까? 이 모기가 혈관을 잘 못 찾아 바늘 침을 꽂는데 실패하여 굶어죽었다는 소리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모기는 얼마나 조그마한지 모릅니다. 그 조그마한 모기에게 뇌가 크면 얼마나 크다고 머리가 좋겠습니까? 아이큐가 낮을 대로 낮은 모기가 어떻게 혈관을 정확히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모기는 불이 다 꺼진 어두운 방에서도 정확히 혈관을 찾아내어 바늘을 꽂고, 옷으로 둘러싸여 피부가 보이지 않는데도 정확히 혈관을 찾아내어 바늘을 꽂습니다. 최근에 밝혀졌지만 모기는 뒷다리에 혈관을 느낄 수 있는 감각 기관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모기는 혈관을 찾으면 웬만한 옷은 다 뚫고 바늘을 꽂을 수 있습니다. 그 작은 몸 어디에 그렇게 날카로운 바늘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날카로와도 힘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바늘로 콘크리트 벽을 뚫을 수 없는 이치입니다. 모기의 침은 날카롭고 힘도 있지만, 모기의 타액에서 피부를 뚫을 수 있는 화학 합성물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더 있습니다. 모기는 침을 꽂은 뒤에는 놀라운 힘으로 피를 빨아야 합니다. 피를 빨으려면 모기의 다리들이 잘 지탱하여 받쳐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연약한 다리를 흔히 모기 다리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모기 다리는 가늘고 연약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 다리로 지탱하는데도 피를 빨을 수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동시에 피를 빨아대는 동안 피가 굳어져 모기의 바늘 침이 막히지 않도록 타액까지 집어넣는다니, 모기 자체는 미세한 첨단 과학의 결정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아직 사람의 과학은 그런 수준까지 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사항이 남아 있습니다. 모기는 이 모든 일을 물리는 사람이 알아채지 못한 상태에서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모기는 몸이 가벼운지 사람 몸에 달라 앉아도 사람이 인식하지 못합니다. 혈관을 찾아 바늘을 꽂아도, 꽂고 피를 쭉 빨아도 알지 못하고, 포만감을 느끼며 유유하게 날아가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시간이 흘러 물린 부위가 가렵고 아파 올 때에서야 모기에 물린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사람의 피부를 뚫고 피를 빨아대는데 사람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지 놀랍습니다. 이에 대한 연구를 더하면 세 명의 아이들에게 주사를 맞힐 때마다 겪어야 하는 요란한 울음소리를 면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모기의 피 빠는 능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이 셋을 키우면서입니다. 잠시 한 눈을 팔고 있으면 아이들이 모기에 융단폭격을 받듯 도처에 처참하게 물린 흔적이 있습니다. 잠 자다가도 이런 일을 겪게 됩니다. 그러면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방에 있는 모기를 찾아, 벽에 붙어 있는 모기를 수건으로 때려서 잡는 일을 하게되고, 그러다 보면 30분에서 1시간은 금방 지나가 버립니다. 그 시간 동안 모기의 가벼운 날개 짓과 닌자보다 훨씬 뛰어난 비밀 수행 능력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권투 선수 알리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라고 했는데, 그가 모기에게 많이 물려 보았다면, 모기처럼 날아서 모기처럼 쏘라는 말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기의 이런 능력이 어떻게 갖추어진 것입니까? 진화론자들은 간단하게 말할 것입니다. 동물의 피를 몰래 빨아먹어야 생존할 수 있다보니 점점 몸은 가볍게 진화되었고, 침은 날카롭게 진화되었고, 혈관을 정확히 찾아야 하므로 혈관을 찾는 뒷다리의 감각이 발달하는 형태로 진화되었고, 두꺼운 피부와 옷을 뚫어야 하고 피가 굳어져서는 안되므로 입에서 타액이 나오는 형태로 진화되었다고 설명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설명을 들으며 참 갑갑함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모기와 같은 미물을 보고 이런 진화가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는지 의아스러웠습니다. 무생물에서 단세포의 생물이 처음 나오는 과정도, 그것이 다세포로 진화하고, 끝내는 사람에게까지 이르렀다는 설명은 너무나 많은 우연을 내포하고 있고,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물질에 부여하고, 각 생물의 신비함을 너무 단순하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우주의 처음 탄생도 빅뱅이라는 너무나 희박한 확률로 설명하고 있고, 삶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사람이 어떻게 아름다움(美)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도 물질과 사람 자체에 그런 능력이 있어 자연스럽게 합의되는 가치가 있고 추구되는 가치가 있고 자연스럽게 미를 느낀다는 막연한 설명뿐입니다. 예전에는 진화론의 이런 설명에 대해 매우 답답함을 느꼈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그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감각이 없기 때문임을 알았을 때 답답함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창조론에 대해 설명하고 논쟁한다 하여 설득할 수 있거나 동의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이것은 평행선의 싸움일 뿐입니다. 그들은 이 면에 있어서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지고, 감각이 없어진 자들입니다. 그들의 마음과 감각이 회복되지 않는 한 가능성이 없는 설명과 논쟁일 뿐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동안에도 이런 일은 있었습니다. 노아 당시 사람들의 죄악은 세상에 관영하였고, 그 마음의 생각은 굳어져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모두 쓸어버리기로 결정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결정하실 정도였다면 그들의 썩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감각이 둔하여지고 없어져 자기들이 어느 정도 부패했는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육신은 건강하였지만 정신과 영은 감각을 잃어버린 문둥이들이 되어,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수 년 동안 죄악의 길을 고칠 줄 몰랐습니다. 의인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천사가 롯을 방문한 것은 자기들을 멸망시키려고 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오히려 천사들과 관계를 갖겠다니 얼마나 무감각한 자들입니까? 이런 자기들을 말리는 롯을 보고는 건방지게 자기들의 법관이 되려고 한다하며 롯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런 감각 없는 자들과 무슨 대화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러니 두 천사는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곤비케 하였습니다. 이들은 이 때라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처럼 그동안 자기들의 영이 어두운데 있었음을 깨닫고 회개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여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한 번 무디어진 감각이 회복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왕 중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되는 아합 또한 감각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나타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고, 그대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땅이든지 이슬과 비가 3년 6개월 동안 내리지 않으면 농사와 식수와 위생 등에 그 어려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아합의 죄가 심하면 그런 어려움을 이스라엘에 내리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아합 왕은 그 어려운 3년 6개월 동안 자기의 죄에 대하여 살펴보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는데, 그 또한 감각이 없기 때문에 비 오지 않는 것과 자기의 죄를 연관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비 오지 않는 것을 엘리야가 주문을 외워 그러한 것으로 여겨, 엘리야가 3년 6개월 만에 다시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라고 질책했습니다. 엘리야는 이런 아합에게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고 정확히 아합의 상태에 대하여 진단해주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결국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요사이도 자주 당합니다.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 마음이 둔하여진 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도 듣지 못합니다. 우연하게 벌어지는 사건을 통하여서, 몸에 심각한 병을 통하여, 대화 속에 전해지는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경고하시는데 영의 문둥이는 아무 회개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이상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감각이 없어진 자는 이렇게 인생을 살다 죽는 것입니다. 불나방들이 불속으로 질주하면 뻔한 죽음인데도, 아는지 모르는지 질주하여 죽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감각과는 너무나 다르게 사는 자들이 있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함에 대하여 오히려 화를 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순진함이 오히려 해를 당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 4:13-16) 앞에서 살펴본 엡 4:17-24절 앞에 있는 13-16절의 말씀입니다. 13절에 있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자”는 말씀은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2002년도에 표어로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너무나 쉽게 유혹당합니다. 제 세 아이들도 사탕과 새콤달콤과 쵸코렛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밥을 먹다가도 이것이 나타나면 밥을 먹지 않고 이것을 먹겠다고 야단입니다. 이들은 tv에 나오는 만화와 비디오의 에니메이션도 너무 좋아합니다. 이들은 또 누가 하는 말을 판단한 능력이 없어 쉽게 믿고 쉽게 유혹당합니다. 요사이 우리의 가치와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tv와 영화의 스토리가 전제로 하는 설정 자체가 우리의 가치관을 흐리게 하고, 이혼율이 높아지는 결혼생활도 그렇고, 아이들에 대한 부모들의 지나친 교육열도 그렇고, 돈이라면 무엇이든 상품화되고 무엇이든 허용되는 분위기도 그렇습니다. 자칫 긴장을 풀고 있노라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사회 흐름에 오히려 휩쓸리게 됩니다. 14절에 나오는 모든 교훈의 풍조라는 말씀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잘못된 사상들이 교훈이라는 미명으로, tv를 통해서 말해지고, 신문 칼럼에 연재되고, 책으로 출판되고, 학교에서 가르쳐지는지 모릅니다. 공인을 받은 단체나 기관에서 가르쳐지는 것이기 때문에 큰 권위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쉽게 혼동되어 요동침을 당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 아이일 때 이러한 현상을 더욱 농후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범사에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져,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는 머리이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를 머리로 한 지체들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습니다. 우리는 그와 연결되어 있기에 살아있고, 살아있기에 우리에게는 감각이 있습니다. 중풍 병은 뇌의 모세혈관 하나가 터져도 몸의 한 쪽 부위에 마비가 발생합니다. 다리와 손을 못 쓰게 되고 입이 돌아가 말을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뇌의 모세혈관이 터질 일이 없고 따라서 몸의 지체에 마비가 발생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분명히 감각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방인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지만 우리는 마음이 굳어지지 않아 참된 것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감각이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는 일이 중요합니다. 시대는 더욱 악하여져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판단할 수 없는 혼동과 미혹으로 변하여 가고 있습니다. 악인으로부터 핍박을 받으면 최소한 진리에 대한 강한 분별은 할 수 있어 진리를 붙잡고 인내하며 참을 수 있지만, 참과 거짓이 혼동되면 악에 대항하고 싶고 강하게 싸우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적의 정체가 명확지 않아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한 채 마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감각을 더욱 섬세하고 예민하게 가꿀 필요가 있습니다. 100m 달리기 선수들을 보면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두들 민감하게 반응하여도 조그마한 0.01초의 차이로 승부는 결정납니다. 몇 년 전 국도로 차를 몰고 가는데, 돼지를 키우는 양돈집인지 현수막이 걸렸는데, “고기에도 품격이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보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감각에도 품격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것인지 아니면 장성한 자의 것인지, 장성한 자의 감각이어도 범사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만 할 수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범사를 분별하여 이 시대와 사회를 마음껏 논하고 지적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연과 가정과 결혼과 교제를 마음껏 누리고, 하나님 말씀 속에 들어가 그 깊은 맛에 취하여 즐거워하며 마음껏 헤엄치는 우리가 됩시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