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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찾아서: 20030312 작성 정요석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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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학교 때부터 느껴온 슬픔이란 감정에 대하여 써 본 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감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감정을 못 느끼는 비신자는 사람에서 너무 멀리 나간 존재이지요.


제목: 슬픔을 찾아서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우주 정거장엔 햇빛이 쏟아 지네 ...... 엄마잃은 소년의 가슴엔 그리움이 솟아 오르고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999......”라는 김국환 가수의 서글픈 음성으로 시작되는 은하철도 999를 아실 것이다. 재미만이 아니라 의미를 담고있어 어른을 위한 만화라는 평까지 들은 작품이다. 결코 잘 생기지 않은, 아니 오히려 못생기기까지 하여 보편성을 띤 철이라는 어린 남자 아이가, 검은 외투를 길게 늘어뜨려 입어 비애미가 있는 메텔과 함께 은하철도 999를 타고 안드로메다까지 가는 먼 여행을 한다. 엄마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영원히 죽지 않는 기계의 몸을 얻으려고 가는 여행이다. 안드로메다까지 가는 동안 은하철도 999는 여러 별을 경우하게 되고, 각 별은 각각의 특징이 있다. 기본 환경이 틀리고 적용되는 물리 법칙까지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인간 고유의 가치와 정서는 일관된 가치로 밑을 흐르고 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장면을 tv에서 봤는지 아니면 만화로 보았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철이와 메텔이 어느 별에 도착하였다. 기차에서 승객들이 내리는데 많은 이들이 마중을 나왔다. 특징은 모두가 헐렁한 검은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환영을 나온 이들이 갑자기 헐렁한 옷에 감추어든 총을 꺼내더니 승객들을 향하여 무차별 난사를 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 자리에서 죽고, 철이와 메텔은 가까스로 피하여 목숨을 구하였다. 철이와 메텔은 그들이 계속 추격하여 오는지 주시하는데, 그들은 추적은 커녕, 죽은 이들을 정성스럽게 장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지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입에서는 구슬픈 울음이 흘러나온다. 너무나 슬프게 울어 지켜보는 이들조차 마음이 아려올 지경이다. 

그들은 왜 기차에서 내리는 승객을 죽이고, 죽은 승객을 이번에는 온 정성을 다하여 장사를 지내며 슬퍼하는 것인가? 이들은 슬픔을 즐기는 것이었다. 이 별의 사람들은 슬픔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었다. 슬퍼하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며 최대한 슬퍼하며 그 슬픔을 즐기는 것이었다.

은하철도 999는 일본 만화이다. 그들에게는 아마 이런 슬픔을 즐기는 정서가 있는가 보다. 청년 시절에 토플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영어 공부이었는지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짧은 영어이지만 나름대로 번역한 내용과 함께 실어본다. 

The cultivation of the emotion of natsukashii, interpretable as "pleasant sorrow", brings Japanese to Kyoto in the spring, not to savor the cherry blossoms in full bloom but to grieve over the fading, falling flowers.

“즐거운 비애”로 번역될 수 있는 나츠카시이란 감정의 수양은, 일본인들을 봄이 되면 교토로 이끄는데, 그것은 완전히 개화한 벚꽃을 음미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그러들며 떨어지는 꽃을 슬퍼하기 위해서다.

벚꽃 축제가 우리나라도 진해나 최근에는 여의도 윤중로에서 이루어지곤 한다. 하지만 일본과 같이 만개한 꽃보다 떨어지기 시작하는 꽃을 슬퍼하며 즐기려고 찾는다는 소식은 잘 듣지 못한다. 나츠카시이란 정서가, 만개한 꽃을 보고 좋아하며 즐기는 정서보다 더 세련된 정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운 비애로 번역될 수 있는 슬픔을 즐기는 정서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나라도 판소리를 들어보면 이런 슬픔을 자극하며 웃음을 던지는 대목들이 곳곳에 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빨리 판단이 서지 않는 해학과 같은 것이다. 엉거주춤 망설이다 얼굴로는 웃음을 띠지만 속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웃으면서 흐르는 눈물이기에 마음 속 더 깊이 스며들며 흐르는 눈물이다.

일본만이 나츠카시를 아는 것은 아니다. 사람 사는 곳이면 모두 나츠카시를 알고 있다. 슬픈 노래가 없는 곳이 어디인가? 비극이란 형태의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가 없는 나라가 어디인가? 희극보다 비극에 명작이 많고, 아니면 희극일지라도 중간에 최소한 비극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작품은 대비가 없고 절정이 없고 카타르시스가 없다.

우리 때에는 안톤 슈낙이란 독일 작가가 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작품이 국어 교과서에 있었다. “우리에 갇힌 범의 불안, 죽은 새 위로 쏟아지는 가을 햇빛, 먼 훗날 만난 높은 직위의 동창이 거만스럽게 쳐다보는 눈길”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작가는 쓰고 있다. 그 글을 읽으며 슬프기만 했던 내 마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한번 슬픔에 젖어들면 계속해서 상승작용이 일어나며 사소한 것에서도 슬픔을 찾을 수 있다. 사방 도처에 슬픔이 널려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슬픔을 찾아 나설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눈길이 머물고 생각이 머무는 곳마다 슬픔이 배어있다 튀어나오는 통에, 오히려 슬픔의 습격을 받아 정복된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나는 그 시절 아이들의 동요에서 슬픔을 느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가공되지 않은 목소리로 부르는 동요는 참 슬프다. 우리 나라 동요는 왜 이리 곡조도 슬프고 가사도 슬픈지 모르겠다. 한국민들의 기본 정서는 한(恨)이라고 했던가? 그 한이 동요를 만드는 어른들에게도 깊이 배어 있어, 아이들의 천진난만함마저도 가려버리는가 보다. 그래도 우리는 너무 일찍 아이들에게 슬픔을 가르치고 몸에 배게 한다는 염려의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아마 서울 우유 광고인 듯 하다. “서울우유, 서울우유”라는 단어가 끝 부분에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를 통해 불려지는데, 나는 거기서도 슬픔을 찾았다. 아이들이 높은 톤으로 부르는 노래는 슬펐다. 이 정도면 아무래도 나에게 원인이 있는 듯 하다. 어른들의 한이니, 아이들의 높은 톤이니 하기에 앞서 그 시절 나는 슬픔의 습격을 너무 받아 초토화되었었다.

장은숙 가수로 기억되는데 그가 이런 노래를 불렀다. “함께 춤을 추어요. 행복한 춤을 추어요. 잊어버려요. 당신의 슬픈 기억일랑. 당신의 검은 머리엔 어느새 하얀 꽃 피고, 당신의 고운 얼굴엔 어느새 눈물 자국이 있어요. 함께 춤을 추어요. 행복한 춤을 추어요. 잊어버려요. 당신의 ......” 나는 이 노래가 슬펐다. 분명히 행복한 춤을 추자고 가수는 말하는데, 그 목소리가 허스키의 저음이라 슬펐고, “당신의 검은 머리엔 어느새 하얀 꽃 피고, 당신의 고운 얼굴엔 어느새 눈물 자국이 있어요”라는 가사가 덧없는 인생을 말하는 듯 하여 슬펐다. 이 노래는 숱한 젊은이들이 좁은 디스코 장에 모여 빠른 음악에 만개한 젊음을 추어대는 춤이 아니라, 무대의 넓이에 비해 한산하기까지 한 무리들이 섹스폰 소리에 맞춰 사그러들며 떨어지기 시작하는 초로(初老)를 추어대는 춤을 말한다. 행복한 춤이라고 노래하지만, 실상은 즐거운 비애의 춤이다.

아파트를 빠져 나오는데, 아파트 후미진 공간에서 아파트가 쏟아낸 거대한 쓰레기를 치우는 일단의 청소부들이 있었다. 맨정신으로 치우기에는 냄새가 역겹고 지나가는 이들이 눈총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들은 술을 마셨다. 스스로에게 기합을 불어넣으며, 술기운으로 열심히 왔다갔다하는 그들에게서 나는 슬픔을 보았다. 그들이 불쌍했는지, 그들의 늙음이 서글펐는지, 그들의 신분 낮음과 사회의 구분이 서러웠는지, 이유 모를 그 슬픔에 지하철로 가는 내내 속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폴란드 망명 정부! 일제시대에 만주에 있던 우리의 임시정부와 같은 것이다. 망명 정부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어떤 시인은 낙엽을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라고 비유했다. 망명 정부의 지폐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낙엽은 모든 생을 마쳐 가치를 잃고 이리저리 바람에 뒹굴다 마지막 남은 앙상한 존재마저도 소멸을 기해야 한다. 철거를 기다리는 앙상한 골조만이 남은 건물에서도 낙엽이 모두 떨어진 스산한 나무를 보는 슬픔이 배어 나온다. 

여름의 인파가 모두 떠난 늦가을의 해변가도 슬프다. 건장한 부모였건만 어느새 계단을 오르내리락 할 때 지쳐하고, 손자 보기도 힘들어 할 때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사람에게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해서들인지, 짜장면 배달원과 외판원에게 가장 엄격한 수위와, 어리숙한 촌부에게 아랫 사람 대하듯 하고 상사에게 한없이 낮아지는 면직원과, 자기가 할 말을 이미 다 예상하고 지루해하며 바짝 군기든 표정을 보여주는 병사에게 한껏 권위를 부리는 중사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최진희의 노래도 슬프다. 계속 슬퍼지고 싶을 때, 무언가 서러워 감정이 복받칠 때 문을 꼭 닫고 볼륨을 높여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정말이지 슬픔을 즐기며 어떤 카타르시스를 맛보며 견딜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단조로운 창법인지라 그 슬픔은 일정했다. 어떤 노래이든 그는 그의 풍성한 음량과 깊은 호흡으로 조금은 일률적으로 불렀다. 그런데 조용필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여러 창법이 있다. 한 오백년을 부를 때와 고추잠자리를 부를 때는 전혀 틀리다. 여행을 떠나요를 부를 때도 틀리다. 미워 미워 미워를 부를 때는 또 틀리다. 그런데 그는 같다. 그의 노래엔 슬픔이 깊이 깔려 있다. 여행을 떠나요라는 경쾌한 노래를 부르는데 왜 슬픔을 깔고 부르는지...... 고추잠자리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밝게 부르는 것 같지만, 실상은 비애가 깃든 노래이다. 그는 뜸북 뜸북 뜸북새를 부를 때도 너무 슬프게 불렀다.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실 때......”의 그 오빠가 오지 않음에 너무나 섧음을 느끼게 되고, 오누이간의 정이 그렇게도 깊을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 만치 모든 곳에서 슬픔을 찾아내어 노래로 부르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88 서울 올림픽이 열렸을 때 이것을 주제로 많은 노래가 발표되었다. 그 노래들의 공통점은 올림픽의 축제를 연상케 하는 밝음과 경쾌함이었다. 그런데 그 노래들은 잠시 그 때만 불러지고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오직 조용필이 부른 노래만이 오래도록 불려졌다. “해가 지면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고......”로 시작되는 “서울 서울 서울”이란 노래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왜 올림픽과 어울리지 않게 그런 애잔한 곡을 만들었냐고? 그는 올림픽이 끝나면 우리 사회가 슬퍼질 것 같다고 대답했다. 온 나라가 올림픽에 몰두하는 것이, 이후에는 슬퍼질 것 같았다고. 그래서 슬프게 노래를 만들었다고. 그는 단조로움을 강요하고, 이런 강요의 사실조차 모르고 우르르 몰려가는 단색의 사회가 갖는 슬픔을 예술인의 감각으로 느끼고 노래한 것이다.

그는 슬픔을 아는 자이고, 사회와 인생에 대해 무언가를 느끼는 나이에 접어든 느낌이다. 그의 여러 경험들이 그를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듯하다. 그는 부인의 죽음으로 인해 더욱 슬플 것이다. 그가 앞으로 어떤 노래를 발표할지 궁금하다. 다른 이들은 슬프면 그의 노래를 들으며 슬픔을 달래고 즐기지만, 그는 정작 아내가 죽은 슬픔을 어떻게 달래고 이기는가? 지천에 널린 시간들을 무엇을 하며 보낼까? 그의 인생을 보는 눈은 다음 작품에 어떻게 반영이 될까? 아니면 그 죽음이 하도 부당하여 인생도 작품도 오히려 엉거주춤해져, 거대한 벽 앞에 작기만 한 모습으로 턱없이 늙어가는 초로의 남성이 될지, 궁금하다. 

사람은 왜 슬픔을 느낄까? 왜 많은 작품들에 슬픔은 그 밑을 깔고 있는지? 왜 만개한 꽃이 아니라 사그러드는 꽃을 보며 “줄거운 비애”를 즐기는가? 그것은 모든 것의 유한한 한계와 반복 때문이리라. 안톤 슈낙이란 사람만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나열한 것은 아니다. 이 시대의 뛰어난 문인 고은 시인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제목으로 두꺼운 책을 썼다. 얼마나 인생에 슬픈 것이 많으면 이렇게 두꺼운 책이 슬픔으로 채워질까? “여보”라고 부르던 남자를 “저놈”이라고 부른 이혼 소송의 여자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고은은 말한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슬픔에 대하여 말한다. 

되풀이 동작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시지프스는 영원히 산을 오르내리는 되풀이의 고통으로 끝이 없고, 도스토에프스키의 소설 속에서는 한 남자가 물통의 물을 다른 물통에 붓는 일을 끝없이 한다. 그뿐이 아니다. 인간의 도처에서 되풀이 동작은 그치지 않고 있다. 무용 교사는 언제나 똑같은 기본 동작을 해야 하고, 잠자는 것은 언제나 다리를 뻗고 눕는 동작의 되풀이다. 남자 디자이너는 언제나 단골 여자의 몸을 재고, 식자공은 아연의 굴 속에서 활자를 주워 내야 한다. 모든 것이 되풀이다.

어찌 이것만이 되풀이인가? 인생 자체가 되풀이인 것이다. 우리 각자의 삶이 이미 앞서 산 자들의 삶이고, 우리를 이어 오는 후손들이 똑같이 살 삶이다. 해 아래서 새 것이 없다. 전도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전 1:9-10). 

고은 시인이 말한 반복도 이미 전도서가 말을 하였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땅이 그대로 영원히 있는데 무엇이 새로울 수 있겠는가? 그 물리 법칙을 영원히 적용받는 사람이 무엇을 새롭게 할 수 있는가? 

음악과 미술에 무슨 새로움이 있겠는가? 정직한 예술인은 고백할 것이다. 음악과 미술에서 수많은 예술품을 만들었지만, 그럴수록 사용한 음과 색과 기법은 너무 많이 반복되어 오히려 바래지고 너덜너덜 거리는 느낌이라고. 글 쓰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몇 천 가지를 넘는가? 좋아하는 단어는 몇 백 번씩 사용하지 않는가? 이 글에서만도 그렇다. “슬픔”이란 단어를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가? 처음에는 마음에 와 닿는 상큼함과 비장미가 있었지만, 갈수록 너덜해져 전혀 슬퍼지지 않고, 오히려 지루함과 누추함을 느끼기까지 한다. 못 살던 시절, 소뼈를 사다 우리고 우려 물보다 더 진하지 않게 되듯, 그런 정도로 우려먹은 느낌이다. 단어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문장으로 표현되는 기법이 또한 그러하다. 도대체 주어와 술어와 목적어를 얼마나 변형할 수 있단 말인가? 10가지도 넘지 않을 것이다.

지루함. 반복. 너덜해짐. 우려먹음. 이것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새로운 줄 알고 정신없이 몰두하지만, 이내 익숙해지기 시작해버리고, 그러면서 이미 누군가 시도한 것이고 그 또한 지루하여 떠나버렸고, 나는 다만 거기에 세련이라는 느낌을 조금 더 부여한 것뿐이고...... 아! 인생은 지루하고, 그래서 지겨운 슬픔이다. 이 슬픔은 즐길 수조차도 없는 더러운 슬픔이다. 아니 슬픔이라고 하기보다는 허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반복은 유한함의 한 표현이다. 유한함이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죽음이다. 사람은 죽는다. 백 살을 살지 못하고 죽는다. 자기가 한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두고 떠나야 한다. 참,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에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늙음이다. 오래 전 은사를 우연히 만났는데 너무 늙어 허리가 구부정 거리고 눈에 초점이 없고 만남 자체를 기뻐하는 감정마저도 조금은 잃은 듯 할 때 우리는 죽음의 길목에 서 있는 늙음의 벽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나는 일주일에 한번 양로원에 가서 성경 말씀을 전하고 각 방을 다니며 대화를 나눈다. 그들 중 젊어서 권력과 돈에 있어 화려한 인생을 산 이들이 적지 않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권력도 돈도 모두 떠나고 자식마저도 떠나버려 양로원에 와서 기거하고 있다. 그럴 때는 차라리 정신이 또렷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좋을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 그 치욕과 외로움을 삭이기에는 죽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들이 놓여 있다. 이렇게 늙고 죽는 것, 이것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슬프게 한다. 영원하지 않은 것, 이것이 우리를 허무하게 한다.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을 슬프게 했더라도,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을 슬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내가 곧 후회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슬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슬픔을 당함으로써 회개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슬퍼했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 때문에 손해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슬픔은 죽음을 가져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여러분에게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징계하는 정신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후 7:8-11, 표준새번역).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 영원에 대한 사모와 하지만 영원에 이르지 못하는 유한함. 이것이 사람을 슬프게 하고 허무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사람은 회개하고, 그래서 구원에 이른다. 영원에 대한 사모와 좌절로 인한 슬픔과 허무가 없다면 누가 회개하고 누가 구원받고자 하겠는가? 영원에 이르는 슬픔은 구원이다. 영원에 이르지 못하는 세상의 슬픔은 죽음이다. 불교! 조용필의 아내가 불교식으로 장례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온통 슬픔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조용필 그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못하고 참 슬프게 운다. 너무나 인간적이다. 스타의 모습이 아무 곳에도 없다. 하지만 거기에 그친다면,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슬픔을 찾아 슬픔 속에서 사는 그 별 사람들과 아무 차이가 없다. 슬픔은 중간 과정이다. 올바로 이해하는 자는 회개와 구원이고, 인간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자는 영원한 파멸에 이르는 죽음이다.
전도서는 슬픔을 말하며 영원을 말하고, 그 영원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전도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일의 결국은 허무하고 허무한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행동 하나도 무의미한 것이 없다. 슬픔은 단지 하나의 색에 지나지 않는다. 기쁨과 같은 하나의 톤(tone)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즐거워하며 맞이하는 삶에도 모든 것에 침투하여 괴롭히는 기본색이 아니다.

하나님을 깊이 안 후에 슬픔과 허무는 모두 달아나고 단지 하나의 톤으로 나에게 왔을 뿐이다. 어떤 때 최진희와 조용필의 음악을 듣지만, 예전과 같이 오래 동안 들을 수 없다. 정서까지도 변한 것이다. 나는 사그러들며 떨어지는 벚꽃도 좋지만, 완전히 만개한 벚꽃도 좋다. 모두에 다 의미가 있고, 이제는 슬픔에서 오히려 기쁨을 찾고 있다. 슬픔을 즐긴다는 것은 바로 그 뜻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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