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콤플렉스: 20030306 작성 | 정요석 | 2017-03-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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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농구에 관한 이야기 좀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프로농구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아니고, 겨우 유명한 선수 몇 명에 대해서만 아는 상식적인 수준입니다. SK 나이츠란 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팀은 진로 팀을 인수하여 새로이 프로농구에 참여한 팀입니다. 진로가 한 때 부도가 나며 소유하고 있던 농구팀을 SK에 매각한 것이지요. 그 때 진로에는 우리 나라 프로선수 중에서 가장 키가 큰 서장훈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서장훈과 같은 훌륭한 선수를 보유하고서도 왜 꼴찌를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 해에 진로는 전체 프로농구 팀 중에서 꼴찌를 했습니다. 비록 꼴찌를 하여 명예는 실추당했지만, 꼴지 팀에는 신인 드래프트에 참여한 선수를 제일 먼저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이 40%주어집니다. 40%라는 표현이 무슨 뜻이냐면, 한 통에 구슬 100개를 집어넣습니다. 40개는 빨간색, 30개는 하얀색, 20개는 파란색, 10개는 노란색으로 하여 썩습니다. 40개는 맨 꼴찌팀에 해당하고, 30개는 그 다음 순위, 20개는 그 다음 다음 순위에 해당합니다. 성적 역순으로 구슬수가 많아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썩은 구슬들에서, 요사이 로또 복권 추첨하듯이, 하나씩 선택을 합니다. 첫 번째 나온 구슬이 빨간색이면 맨 꼴찌팀이 드래프트에 참여한 신인 선수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선수를 고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나오는 구슬에 해당하는 팀은 두 번째로 마음에 드는 선수를 고를 수 있습니다. 꼴찌가 아무래도 구슬이 40개가 되니 1등이 될 확률이 40%로 가장 많습니다. 하지만 확률이란 것이 매우 재미있는 말이지 않습니까? 빨간색이 나올 확률이 40%로 가장 높지만, 빨간색이 나오지 않을 확률은 60%로 더 높습니다. 그러므로 꼴찌라고 해서 안심할 사정이 아닙니다. 그 해는 프로농구 각 팀이 신인 드래프트에 관심이 무척 많았는데, 왜냐하면 서장훈 못지 않게 키가 크면서 출중한 실력과 인기를 지닌 현주엽이란 선수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SK는 만약에 자기 팀에 현주엽 선수가 오게 된다면 서장훈 선수와 함께 더블 포스터를 구성하여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오를 것이라며 큰 기대를 나타냈습니다. SK만 아니라 다른 팀들도 해외 용병급에 해당하는 실력을 가진 현주엽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드디어 신인 드래프트를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저는 딱히 프로농구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신인을 지명하는 날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9시 뉴스를 듣고 이어지는 스포츠 뉴스에 아마 첫 번째인지 두 번째인지 이에 대한 뉴스가 나왔습니다. 현주엽 선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보니 빅 뉴스로 선정되어 앞부분에 나왔나 봅니다. 첫 번째 구슬은 꼴지 팀인 SK에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SK 감독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현주엽을 지명했습니다. 그리곤 그는 주위 사람들이 들을 정도로 “이제 나의 시대가 열렸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촬영하던 기자는 SK 감독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기자는 “현주엽 선수를 1순위로 선발할 줄 알았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SK 감독은 전혀 주저함과 거침없이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기자는 무언가 있나보다 하며 놀라서 “왜 그런 자신감을 가졌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감독은 “오늘 아침 추첨하러 나오기 전에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안수 기도를 받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연히 현주엽을 지명하게 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프로농구에 대하여 별 지식과 관심도 없는 제가 이런 내용을 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대답 때문에 그 이후로 관심을 갖게 되어서입니다. 교역자인 저로서, 그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기에 놀랍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목사님에 대한 존중과 순수한 믿음에 흐뭇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과연 이것이 참된 믿음과 확신에 속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여 갸우뚱했습니다. 복잡한 느낌으로 그 뉴스를 보고, 이내 이어지는 스포츠 뉴스에 관심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해가 지나 프로농구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 전문가들은 SK의 우승에 많은 가능성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게임이 시작되니 SK는 의외로 강한 팀이 아니었습니다. 서장훈과 현주엽이란 국내의 일등과 이등에 해당하는 선수를 보유하고도, 이들을 제대로 가동시키지 못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출중한 선수들로 인해 오히려 팀웤이 깨져서 그런지 연패를 하며 참담한 성적을 거둔 것입니다. 꼴찌였는지 아니면 하위권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간 예상외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그러자 SK 프런트는 연패의 책임을 물어, 감독을 전격 해임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SK 감독이 신인 드래프트에서 현주엽을 지명할 때 너무 기뻐하고 너무 들떠하는 표정과 몸짓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의 시대가 열렸다”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또 재미있는 것은 현주엽을 지명하게 된 것을 목사님으로부터 안수기도를 받았기 때문이라며 하나님과 연관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오히려 팀은 하위권의 성적을 기록하여 그렇게 뛰어난 두 선수를 갖고도 연패를 당했다며 본인은 해임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한 것입니다. 현주엽을 지명하게 된 것은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통한 확실한 하나님의 뜻이라며 좋아하던 분에게, 오히려 그것이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으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볼 수 있는 성경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상 11:26-40절입니다.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저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요 그 어미의 이름은 스루아니 과부더라. 저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는 까닭은 이러하니라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그 부친 다윗의 성의 무너진 것을 수축하였는데,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소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지라.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의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왕상 11:26-40) 28절을 보면 솔로몬은 여로보암이 큰 용사이고 부지런하여 감독자로 삼습니다. 솔로몬에게는 건축해야 할 일이 많이 있는데 그 일의 적임자로 여로보암을 발견하고 감독자로 임명한 것입니다. 직장이나 군대 같은 데서 자기 밑에 있는 부하 직원이 능력 있고 재치 있다면 일을 추진하고 달성하는데 있어 얼마나 편하고 안심이 되는지 모릅니다. 마음에 드는 능력 있는 부하 직원을 갖는 것은 큰 기쁨이고 행복이고 복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바로 그런 적임자로 여로보암을 발견한 것이고, 그래서 감독으로 임명합니다.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발견한 날 매우 기뻤을 것입니다. 해야 할 많은 일들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자를 찾았으니 얼마나 안심이 되고 기대가 되겠습니까? 아마 그는 그날 기뻐서 자기 아내들에게 이 일을 자랑했을지 모르고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는 이 일을 인하여 감사했을 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임명한 여로보암이 솔로몬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보내어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다스리게될 것이라고 알리셨습니다. 요사이 시민단체 같은 데서 자기들이 알리기를 원하는 내용을 퍼포먼스라고 하여 간단한 촌극과 같은 형태로 나타내지 않습니까? 그냥 단순한 구호와 피켓만으로는 전달에 있어 한계를 느끼고, 퍼포먼스 형태를 취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곤 합니다. 그런데 선지자 아히야가 바로 이와 같은 형태로 여로보암에게 자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있습니다. 아히야는 새 옷을 입었습니다. 지금은 옷이 흔하다고들 하지만, 아직도 비싼 옷은 매우 비쌉니다. 비싸게 구입한 새 옷을 지금도 찢는다고 하며 아까울 것입니다. 그 당시는 더 했습니다. 옷을 가지고 이불로도 사용하던 옷감이 귀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아히야는 입고 있는 새 옷을 열 두 조각으로 찢어 여로보암에게 열 조각을 줍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여로보암 너에게 준다고 말합니다. 여로보암은 아주 생생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받았습니다. 보이는 형태로 전달받았습니다. 솔로몬이 아히야 선지자의 퍼포먼스에 대하여 전해들었나 봅니다. 여하간 그는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다스리게 된다는 소리를 듣고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큰 용사이고 부지런하여 자기의 감독관으로 삼았는데 이제는 그가 자기 나라를 빼앗는 역적이 되므로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그런 솔로몬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가 솔로몬이 죽기까지 있었습니다. 일종의 정치적 망명을 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솔로몬이 살아있는 동안 둘은 더 이상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친구가 철천지 원수가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성경 말씀을 보며 매우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이미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격언을 통해서도 현재 벌어지는 일만으로 행과 불행을 판단해서는 안됨을 알고 있었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새옹지마가 무엇입니까? 변방에 한 노인이 살았는데 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말이 사라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노인에게 와서 참으로 안되었다고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사라진 그 말이 며칠이 지나서 다른 말 한 마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짝을 지어 온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번에는 말 한 마리가 거저 생겼으니 너무 기쁘지 않느냐며 축하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그 말을 타고 놀다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그 말이 망할 말이었다며 아들이 다리를 다쳤으니 어떻게 하냐며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곧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건강한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끌려가 죽거나 병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노인의 아들은 이미 다리를 다쳐서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아도 되어 전쟁을 무사히 피할 수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와서 일희일비(一喜一悲)했지만 노인은 크게 슬퍼하지도 않고 크게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일이 반전이 되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생각하며 감정을 조절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상의 말씀은 이런 새옹지마에 더하여 역사의 주체가 누구이시며, 우리가 무엇을 기뻐해야 하고, 무엇을 먹고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왜 하나님은 솔로몬이 기쁘게 임명한 감독관, 여로보암으로 하여금 솔로몬을 반역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왜 그에게 열 지파를 주시는 것이고, 주시더라도 솔로몬이 그를 감독관으로 임명하기 전에 주시지, 너무나 짓궂은 느낌이 들 정도로 감독관으로 임명된 후에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솔로몬이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에 대한 경고로서 이미 하나님이 몇 번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1:1-13절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의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새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왕상 11:1-13) 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솔로몬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시어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벌로 이 나라를 그에게서 빼앗아 그의 신복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간이 흘러 그대로 집행되는데, 그 과정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먼저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감독관으로 임명을 하는데, 솔로몬은 분명히 그간의 자기 경험을 통해 형성된 사람을 보는 안목으로 여로보암이 훌륭한 감독관이 될 것임을 알고 임명을 합니다. 그 누구도 솔로몬에게 여로보암을 임명하라고 압박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여 내린 결정입니다. 여로보암 또한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큰 용사란 소리를 듣고 부지런한 자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이런 좋은 평을 듣는 중에 솔로몬이 어떤 계기를 통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여로보암의 큰 용사됨과 부지런함을 직접 확인하였고, 마침 솔로몬에게는 여러 건축의 일이 있었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여로보암을 감독관으로 삼았습니다. 여로보암은 그냥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히 일을 하였는데 어느 날 감독관으로 임명이 되었고, 마침내는 이것이 애굽으로 정치적 망명을 해야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진행된 것입니다. 여로보암이란 신복을 통하여 솔로몬에게서 나라를 빼앗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반영된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과 판단으로 무엇을 결정하고 집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결정하였기 때문에 자기가 무언가 일을 이루고 진행시키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하나님의 손 가운데 있습니다. 조금 우수운 표현이지만 부처 손바닥의 손오공과 같은 것입니다. 손오공은 자기가 멀리 멀리 날아갔다고 생각했지만 겨우 부처 손바닥에서 돌아다니지 않았습니까? 서유기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은 인생을 오래 살다보면 이런 막연한 힘을 느끼나 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 큰 흐름 속에 묻혀 행한 작은 몸짓에 지나지 않음을 인생의 경륜 속에서 느끼는 것 같습니다. 불교는 그것을 인연이라는 막연한 개념으로 표현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과 역사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솔로몬이나 여로보암이나 모두 하나님의 손안에서 놀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왕이므로 큰 일들을 기획하고 온 백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들을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아닌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그런 권위와 신분과 능력을 주시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을 할 뿐입니다.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단지 사람의 수준에서 무언가를 행할 뿐이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어떤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어떤 새로운 국면을 창출해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해야 하겠습니까? 새옹지마에 나오는 마을사람처럼 지금 당장 눈 앞에 발생하는 일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해야 합니까? 당연히 아닐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그 노인이 충분히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은 일희일비해서는 안됩니다. 그 일이 미래에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역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변수가 존재합니다. 현주엽이 SK 나이츠에 감으로 해서 감독은 기뻐했지만 결국엔 이것을 인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도 여로보암이란 능력있는 부하를 발견해서 기뻐했지만 그는 반역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눈 앞에 발생하는 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당연히 안됩니다. 우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 너머를 보아야 합니다. 그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겸손히 현실을 수용해야지, 지나치게 기뻐하는 것도 옳지 않고, 지나치게 슬퍼하고 좌절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힘으로 이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불신입니다. 자기가 꾸려나가 이러한 결과를 거두었다고 그래서 지나치게 기뻐하고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입니다. 가변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역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부인하고 현실에 집중하고 일희일비하는 자는 역사의 주체자는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종의 불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뻐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먹고사는 가와 같은 질문이 됩니다. 몇 년 전에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여자가 1위로 나왔다고 합니다. 남편들이 겉으로는 아내를 무시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아내의 필요성을 크게 인정하고 있나 봅니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아내는 그 날부터 고생 끝이라며 자식들을 데리고 잘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먼저 죽으면 남편들은 술을 먹으며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내가 없는 썰렁한 집 들어가기를 싫어하고 무서워하여 밖에서 술로 보내다 마지못해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여하간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을 기뻐해야 하고 무엇을 먹으며 살아야 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인 답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 8:1-6절입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신 8:1-6) 하나님이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으로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낮추시기도 하시고 주리게도 하셨습니다. 광야의 길을 40년 동안 걸은 그 자체가 그들을 낮추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시련과 곤란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뿐만이 아니라 만나도 주셨습니다. 그들의 열조도 알지 못하였고, 그들 자신도 들어보지도 못한 만나를 이적으로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적까지도 왜 주셨냐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전 인생의 경험을 통하여 사람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것임을 알게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 바로 이 말씀을 가지고 첫 번째 시험을 이기시지 않았습니까? 마귀는 40일 금식한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러한 능력이 있어서 굶주림을 단번에 해결하여야 하지 않느냐고 부추긴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능력을 표출하며 자아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원리로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양식과 명예와 권력 등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무엇이 제일 근본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함을 예수님은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수단이고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8:5-6절을 보아도,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잘못하면 아들이 잘되도록 징계하지 않습니까? 그렇듯 하나님도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궁극적 목적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하도록 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것은 궁극적으로 여호와를 깊이 알게 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를 경외하도록 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여로보암의 반역을 허락하신 것도 솔로몬으로 돌아오게 하심에 목적이 있습니다. 징계를 통하여 그를 겸손케 하여 하나님을 더욱 깊이 고백하도록 함에 목적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신명기 말씀을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상 11:26-40절의 말씀과 비교하여 보면 궁극적인 면에서 너무나 비슷한 것에 놀랄 것입니다. 신명기 8:12-20절입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신 8:12-20)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질적인 면에서 많은 복을 주어도 이것은 궁극적인 복이 아닙니다. 이것을 줌은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도록 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물질적인 축복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빼앗으시고, 이뿐만이 아니라 이들을 징벌하시고 멸망시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솔로몬에게서 나라를 빼앗아 여로보암에게 주는 것이고, 여로보암에게 열 지파를 주시면서도 여호와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그분에게 합당한 일을 하며 다윗과 같이 율례와 명령을 지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없으면 여로보암에게 준 열 지파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나에게 어떠한 외적인 축복이 있느냐로 기뻐해서는 안됩니다. 주위에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얼마나 잘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까? 부와 명예와 권력으로만 본다면 그들은 모두 축복 받은 자들이 됩니다. 솔로몬도 아내를 수 백명 거느렸으니 축복 받은 것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징계하셨습니다. 그의 아내들과 부를 인해 타락하므로, 원인들을 제거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판단하고 있고 결정하고 있고 행동하고 있느냐로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에 의한 선택과 결정과 행동이라면 어떠한 상황이 연출되든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옹지마와 같이 역전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현재 슬프고 괴롭고 힘들지라도 위축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가를 기대감과 사모감을 갖고 진지하게 지켜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 있어 낙천적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외척의 횡포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시정배와 어울리면서 서민층의 고통을 체험한 야심 만만하고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려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대한 평입니다. 안동 김씨 일족은 외척으로 3대째 영화를 누려왔습니다. 강화 도령으로 유명한 철종은 후사가 없기 때문에 다음 왕은 왕족 중에서 결정되어집니다. 안동 김씨 일족은 자기들에게 반항적이거나, 기상이 꿋꿋한 왕족은 차후 왕이 된 후 자기들을 멸하까 두려워 역적과 같은 누명을 쓰여 모두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왕족들 중 똑똑한 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는 형국이고, 왕족들은 항상 안동 김씨 외척의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이를 오래 전에 예지한 흥선대원군은 강화 도령이 왕이 되자 도총관이란 직위를 미련없이 버리고, 술과 노름과 기생질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몸에 밴 간사한 미소와 비굴한 태도로 김씨 일가의 잔치집을 구걸하며 각종 희롱을 감수했습니다. 15년간의 훌륭한 연기 끝에 그는 ‘타락한 왕족’, ‘난봉꾼 이하응’, ‘쓸개도 없는 자’란 소리를 듣게 되고, 그 덕에 의심 많을 수밖에 없는 김씨 일가의 검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도총관 시절, 뜰의 먼지 하나 추녀 끝의 거미줄 하나 그의 눈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본시 상큼한 미소와 명랑한 태도 그리고 넘치는 위엄을 가진 그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할 때, 그의 마음속은 얼마나 울분과 복수심에 치를 떨어야 했을까요. 그럴지라도 그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자신이 있었기에 이 모든 치욕을 묵묵히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망나니로 행세를 하면서도, 철종이 임종할 때 다음 왕위 결정권을 가진 조(趙) 대왕대비마마께 접근하여 자기의 참모습을 들어내며, 오직 자기만이 외척의 세력을 물리칠 적임자임을 인식시켰습니다. 조 대왕대비마마가 그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지명하도록 그 와중에서도 작업을 벌였고, 실제로 철종이 죽은 후 모든 일이 그의 예측과 준비한 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철두철미한 그가 한 가지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의 부인으로 이미 어렸을 적에 혼약이 되어 있는 김병문의 딸 대신에, 민씨(閔氏)를 택했는데 이것이 그에게 인생 최대의 실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이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오래 전에 약정된 혼약까지 취소하며 민씨를 택하게 했는지 아십니까? 바로 민비가 천애의 고아이기 때문에 가까운 친척이래야 육촌, 칠촌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큰 폐단 중의 하나가 바로 외척의 방자한 정치개입임을 진저리나게 체득한 그는 ‘가까운 일가가 없는 양반집 딸’이라는 이유 하나에 이끌려 민비를 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민비는 훗날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세력을 꺾으려고 동성 동본이면 모두 일가라 하여 민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마구 끌어들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아이러니컬하게 그가 적임자라고 선택한 여인 때문에 오히려 거꾸러진 것입니다. 15년 후의 일을 예측하며 준비해 온 그였지만, 하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천추의 한을 남긴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보며 재미있는 상상을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민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성황후가 자기의 판단과 달리 강한 세력이 되어 오히려 자기를 억누를 때, 콤플렉스에 빠졌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전까지는 무슨 판단을 내리는데 있어 자신이 있었지만, 민비를 며느리로 선택한 일이 최악의 악수로 들어나며, 그 때부터는 무슨 판단을 내리는데 있어 주저와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현재의 정보와 상황만으로 최선의 선택을 했는데 이것이 예기치 않은 변수에 의하여 의외의 결과를 가져올 지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솔로몬 왕도 여로보암을 감독관으로 삼은 이후에는 이런 콤플렉스에 시달리지 않았을까요? SK 전 감독은 어떠했을까요? 우리들에게도 이런 콤플렉스가 조금씩은 모두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선택하지 않은 쪽이 더 좋은 결과로 드러나는 것을 최소한 몇 번은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비등하게 보이는 선택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주저하고 망설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콤플렉스를 이기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그 방법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창 13:5-11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 지라. (창 13:5-11) 정말로 아브람과 롯에게는 큰 선택이 앞에 닥쳐 있지 않습니까? 한번 우하면 좌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 한번의 선택으로 물의 풍부함과 땅의 비옥함 등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담대히 그 선택권을 롯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롯은 철저히 현장 조사를 합니다.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고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으므로 이곳을 선택합니다. 롯은 눈앞에 펼쳐지는 정보와 현실에 충실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현실 대신에 믿음을 가졌습니다. 맨 처음 그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에도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앞으로 갈 곳이 정확히 어떠한 곳인지 몰랐고,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 지 모르는 가운데서 떠났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실 것을 믿고 떠났습니다.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어떤 장소를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을 하나님과 동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롯에게 선택의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롯은 그곳에 가서 물질적 풍요를 누렸을 지 모르지만 강퍅한 사람들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강퍅한 사람들의 영향 때문인지 그의 딸들은 아버지와 관계를 갖고 부끄러운 족속 모압과 암몬 족속을 출산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로똑 복권은 굳이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나 열풍이라고 합니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대박에 대한 꿈은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보다 오래 전에 로또 복권을 도입한 미국의 통계를 보면 놀랍게도 로또 복권 당첨자들의 그 이후의 생애가 예전보다 불행한 경우가 무려 80%라고 합니다. 몇 십억, 몇 백억의 상금에 당첨되어도 그 순간은 매우 좋을지 모르지만 그 이후에 전개되는 생애는 행복과는 관계가 먼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돈과 물질과 명예 등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미래는 결코 돈으로 전개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로또 복권은 “인생역전”이라는 문구로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분명히 인생에 있어서 역전이 되는 면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돈이 차지하는 면이 워낙 크기 때문에 아무도 쉽게 이것을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역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복권 당첨 이후에 겨우 20%만이 예전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겸손한 자는 1등에 당첨되는 순간에 미래를 두려움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아마도 그런 자들이 20%에 해당할 것입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자는 미리 절제력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절제력이 없이 당첨되는 자는 아이의 손에 칼을 쥐어주는 것과 흡사하므로, 로또를 구입할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흥선대원군 콤플렉스를 이기는 방법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나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 선택하는 이 일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하나 결국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룰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반드시 선하게 우리를 인도할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결과가 와도 그것이 최종 결과가 아니고, 그것은 단지 우리로 하나님을 더 깊게 알도록 하는 중간 과정이고 수단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결과에 얽매이는 신앙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먹고 살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의하여 선택한 것이면 그 자체로 이미 승리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의한 결정이 승리임을 알고, 말씀 자체를 기뻐할 줄 알면, 선택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가변성과 역전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 어떤 결과이든 받아들이고 미래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 콤플렉스를 이깁니다. 미래에 대한 낙관만이 있을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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