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생크 탈출에서 본 희망: 20030611 작성 | 정요석 | 2017-03-10 | |||
|
|||||
저는 영화를 통하여 상상력과 영감을 간혹 받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도전도 받습니다.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를 감동있게 보았는데 이것을 매개로 글을 써 보았습니다.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어주십시오. 제목: Hope can set you free. 부제: Fear can hold you prisoner. 작성 날자: 2003년 6월 11일 그리 아기자기하지 못한, 특히 꾸밈과 장식에 있어 털털한 편인 제가 제 방에 영화 포스터 하나를 걸어두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래 동안 저를 따라다닌 포스터입니다. 결혼하여 분가할 때도, 그 후 몇 번 이사할 때도 버리지 않고 챙긴 포스터입니다. 혹 이 글의 제목을 보고 어떤 영화의 포스터인지 알아맞힐 수 있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의 제목은 이 포스터에 있는 문구를 적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영화 “쇼생크 탈출”의 포스터입니다. 그렇게 오래 동안 저를 따라다닌 포스터이고 보면 이 영화를 제가 참 재미있고 감동 있게 보았나 봅니다. 벌써 십 년이 가까오는지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보지 않으신 분들을 위하여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겠습니다. Tim Robbins가 잘 나가는 은행 간부 앤디로 주연했는데 그는 부인과 그녀의 정부를 살인한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그가 갇힌 감옥은 악질범들만 수용하는 쇼생크 감옥입니다. 종신형의 재소자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배심원들이 석방 여부를 정기적으로 판단하는데 대개의 경우 늙어서야 겨우 석방 판정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석방되더라도, 너무 오랜 세월 사회와 격리되어 있어 적응하지 못하고, 반겨주는 곳도 없어, 쇼생크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잡일로 목숨을 연명합니다. 몸은 자유를 얻었지만 어떻게 그 자유를 누려야하는지 잊어버려, 여전히 쇼생크 감옥에 갇혀 있는 꼴입니다. 그러다 자기가 파고 들어갈 틈새가 사회에 전혀 없는 것을 알게 될 때, 여관방에서 쓸쓸이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강력 범죄를 저지르고 들어온 재소자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무시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감옥 어디를 둘러봐도 자기들이 고결한 사람이라는 암시와 인정을 받을 곳이 없습니다. 그런 감옥 생활이다 보니 재소자들은 자포자기의 삶을 삽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도 버리고, 사람으로서의 도덕과 최소한의 품격도 버려버립니다. 동성애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교도소 내에 범죄 집단이 형성되고 각종 비리와 폭력과 협박이 판을 칩니다. 하지만 앤디는 그곳에서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과 사람의 품격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재소자들과 달리 사람으로서의 도덕과 품격과 감성을 여전히 추구합니다. 동성애를 요구하는 일단의 조직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거부하고, 감옥 내에 도서관을 만들기도 하고, 검정 고시반을 만들어 공부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한번은 어렵게 구한 클래식 판을 들고, 몰래 음악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전 재소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판을 틀어주었습니다. 이 음악을 듣는 재소자들은 너무나 오래간만에 듣는 음악 소리에 넋을 잃고, 음악에 빨려들며 무언가에 취한 표정이 되어 버립니다. 아마도 두고 온 고향과 가족과 그리고 잊어버리고 지내온 감성과 사람에 대한 존중을 떠올리며 자기들이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것입니다. 이 일로 앤디는 햇빛도 들지 않고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독방에 갇히는 벌을 받지만 그는 소망이 있기에 거뜬히 이 벌을 감당해 냅니다. 그리고 재소자들도 그때 즈음해서는 그가 무엇을 감옥에서도 추구하는지 이해하고 인정해 줍니다. 그는 우연히 간수들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소장이 직위를 이용해 불법으로 모은 돈을 세탁해주는 일을 맡게 되며 신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는 새로이 들어온 신참 토미를 통해 자기의 아내와 정부를 살해한 진범이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앤디는 이 사실을 소장에게 말하며 무죄를 주장하지만, 소장은 앤디가 석방되면 자기의 돈 세탁과 비리가 알려질까 보아 오히려 토미를 죽여 버립니다. 토미의 죽음을 본 앤디는 그 때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워 탈옥을 추진합니다. 몇 년에 걸친 준비 끝에 드디어 결행하는 날, 낮에는 소장 사무실에서 그의 전 재산을 돈 세탁을 위해 가공으로 만든 계좌에 입금을 시키고, 모두가 잠을 자는 밤에는 수년 간 매일 밤 조금씩 벽을 파서 뚫은 통로로 탈출을 시도합니다. 제 방에 걸린 이 영화의 포스터는 이 날 감옥의 배수구를 통해 탈출에 성공한 앤디가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자유의 환호를 질러대는 장면입니다. 그는 다음날 가공 계좌에 입금된 막대한 재산을 은행에서 세련된 매너로 찾아 유유히 사라지고, 소장은 앤디가 탈출한 것을 알고 부리나케 개인 금고를 확인하지만 그곳에는 회계 장부 대신 벽을 뚫는데 사용한 조그마한 망치가 성경 속에 홈을 파고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표시된 성경 구절이 있는데, 정확한 구절은 잊어버렸지만 그날이 속히 오리라는 의미를 가진 구절이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자기의 모든 전 재산이 사라진 것과 자기의 비리가 공개된 것을 알게 되고, 이미 기자들과 수사관은 취재하고 취조하기 위하여 감옥 입구에 도착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서랍 속에서 총을 꺼내어 생을 마감해 버립니다. 아마 더 이상 삶을 살 소망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이 영화에는 또 다른 주연급 조연이 있는데 역시 종신형을 선고받은 레드로 나오는 흑인 Morgan Freeman입니다. 그는 앤디와 감옥에서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낸 자로, 세월이 흘러 늙은 나이가 되었을 때에야 석방 허가를 받습니다. 그 역시도 사회와 너무 오래 단절된 채로 있어 사회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기를 반기는 것은 없고 모두 소외시키는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도 마침내 목을 매어 자살을 하려고 의자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앤디와 감옥에서 했던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감옥에서 먼저 나오는 자는 자기의 소재지를 적은 메모를 약속한 장소에 두기로 했던 것입니다. 레드는 의자에서 내려와 그 약속 장소로 가서 메모를 확인하고, 앤디가 있는 휴양지 바닷가로 갑니다. 영화는 그들이 만나는 재회를 흐릿한 장면으로 처리하며 끝을 맺습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 포스터에 있는 이 글의 제목인, “소망은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두려움은 사람을 죄수로 만들 수 있다. (Hope can set you free. Fear can hold you prison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진 자와 안 가진 자의 차이가 자연스러우면서도 극명하게, 절제되었으면서도 격정적으로 표현되었기에 사람들은 이 영화를 좋아하고 큰 감동을 받나 봅니다. 소망의 존재 유무가 얼마나 사람들의 행동거지와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지 깊게 각인시키는 영화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영화는 이제 빠비용과 같이 감옥 생활과 탈옥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1995년에 있었던 삼풍 백화점 붕괴 때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소망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최명석씨는 10일 동안 매몰되었다가 구조되었고, 유지환씨는 12일만에 구조되었고, 박승현씨는 무려 17일만에 구조되었습니다. 17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는데 탈수증상을 빼고는 건강한 상태로 구조되었습니다. 그 때 언론과 전문가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이 세 명의 공통점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각기 20세, 18세, 19세로 한창 나이의 건강한 남녀이고, 평소 체력이 튼튼했고, 비록 매몰되기는 했지만 특별한 외상이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관심을 끈 것은 이런 외적 상황 말고 다른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들 세 명이 모두 삶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공통점입니다. 살 수 있다는 강한 정신력으로 그들을 짓눌렀던 깜깜한 어둠의 공포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린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삶에 대한 소망과 강한 정신력은 평소 밝고 낙천적인 성격에서 왔다고 전문가들은 한결 같이 말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비관하여, 미지의 위험과 죽음의 공포를 너무 두려워하며 기력을 소진하게 되면 일시에 신체의 면역체계도 약화되고 신체의 기능도 뚝 떨어져 오래 버틸 수 없게 된다고 정신과 전문의들은 말했습니다. 실제로 붕괴 현장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는데도 죽어 있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단지 소망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의 험난함과 문제해결의 중요성을 말할 때, 동화는 백설공주가 왕자를 만나 눈을 뜨고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나지만, 실제로 이들은 행복하게 살았겠느냐고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낯선 문화를 가진 두 사람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결혼을 하지만, 결혼 이후의 삶은 낭만과 감정만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실제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감옥을 탈출한 앤디와 석방되어 그를 찾아간 레드는 그 이후에 행복한 삶을 살았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방에 걸린 포스터를 보게 될 때 문득, 시원하게 내리는 빗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그가 언제까지 그 자유를 누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합니다. 열악한 쇼생크 감옥에서 그가 포기하지 않고 추구했던 인간과 미래에 대한 소망과 존중심이 언제까지 유지되었을까요? 그들은 이후에 분명히 쇼생크 감옥이 압박하였던 물리적 자유의 통제 말고, 그들의 내적 자유를 통제하는 적을 만났을 것입니다. 인간이 갖는 죄성을 인하여 그 둘의 우정이 여전히 유지되었는지도 의문이고, 재산을 놀리며 겪게 되는 어려움 또한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어느새 소리 없이 그들에게 찾아온 늙음입니다. 시간이 일초 일초 흐를 때마다 어김없이 하지만 사람이 전혀 느끼지 못하게 미세하게 신체에 축적되었던 늙음이 점점 모습을 구체화하였을 때, 그들을 정말 사로잡고 있던 감옥은 바로 늙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쇼생크 감옥은 철창과 높은 담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시간이 가져오는 늙음은 얼마나 그 테두리가 크고 넓은지 사람이 갇혀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게 합니다. 어느 날 늙음의 철창이 두르고 있음을 알게 될 때는 탈출이 이미 불가능한 것을 알게 되고, 그 너머에는 더 지독한 죽음이라는 철창이 더 높게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을 뚫고 지나갈 소망이 있었을까요? 모든 사람이 소망을 버리고 있던 쇼생크의 철창을 뚫었던 앤디는 늙음과 죽음의 벽마저도 뚫을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는 죽음 이후에 펼쳐질 세계에 대한 인식과 그 삶에 대한 존중이 과연 존재하여 이에 대한 준비를 했을까요? 그들이 기독교인인지 여부를 모르므로 이에 대하여 답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영화에서 앤디가 그 날이 속히 오리라는 의미를 가진 성경 구절을 소장에게 표시해놓기는 합니다. 이것은 소장이 자기의 비리가 드러나는 날이 오겠느냐며 거들먹거렸기 때문에 앤디가 그 말에 멋지게 응수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가 성경의 내용에 대해 알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이것 외에는 그가 참된 성도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없고, 영화 전체적으로는 아닌 것에 더 가깝습니다. 식사 기도 장면도 없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장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참된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그들의 한계는 늙음과 죽음입니다. 그들의 소망은 여기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그들이 가졌던 소망은 쇼생크 감옥을 벗어나는 자유를 주었을지 모르지만, 늙음과 죽음을 벗어나는 자유는 주지 못했습니다. 늙음과 죽음에 있어서는 이에 대한 공포로 사로잡힌 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영화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죽음을 담담하고 멋지게 그려내지만, 실은 죽음은 두려운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죽음에 담담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너무 늙어 죽음 자체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고, 아니면 나이를 먹어도 철이 들지 않아 죽음을 만만히 보기 때문이고, 아니면 삶에 너무 지쳐 자포자기의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 힘든 상황에 처한 노인들의 수용하는 곳을 섬긴 적이 있었는데 그분들도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모르고, 죽는 그 순간까지 삶에 대한 끈을 놓치 않으려는 몸짓을 보았습니다. 노인들이 어서 빨리 죽어야지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죽음은 만만히 볼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삼풍 백화점 붕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세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밝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삶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아 구출되었지만, 그 이후에 그들이 맞이한 삶은 어떠할까요? 간혹 매스컴이 그들의 소식을 전하는데 얼핏 들은 바로는 남자는 병역의 의무를 필한 후에 어느 회사에 취직을 했고, 여자 한 분은 대학인가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뭐 그런 정도입니다. 우리가 항상 살고 있는 그 삶을 그들도 삶고 있습니다. 20대 후반에 이른 그들은 그 또래가 사는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삶이 진정한 소망이 되는 삶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인생에 너무나 큰 어려움과 시련이 있어, 차라리 그 때 죽었어야 하는데 하는 한탄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 또한 소리 없이 다가올 늙음과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그들만큼이나 강한 소망으로 인생을 살아온 앤디와 레드가 맞이해야 했던 늙음과 죽음을 그들 또한 어떻게든 처리해야 합니다. 그들 또한 평범하게 일반인처럼 늙음과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 또한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극적으로 죽음에서 벗어났기에, 그들이 맞이하게 될 늙음과 죽음은 더욱 허무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살려고 그 때 매몰 현장에서 살아났느냐는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죽음을 상쇄하고도 남을 멋진 인생은 무엇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Boys, be ambitious!”라는 영어 문장을 번역한 것입니다. 고1 때 영어 선생님이 당신이 좋아하시는 문장이라며 우리에게 큰 뜻을 품고 젊은 시절을 잘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간혹 친구 집을 방문하여서 책상 위에 이 문장이 쓰여있는 것을 볼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너무 대학 경쟁이 치열해서인지, 이 문장을 대입과 연관시켜 좋은 대학의 진학을 위한 격려 문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안 일인데, 이 문장은 원래 두 단어를 더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for Christ로 원래는 “Boys, be ambitious for Christ!”입니다. 이 문장은 미국 메사추세츠 대학의 농학 교수로서 1백여 년 전에 일본 북해도 삿뽀로 농업학교에 와서 1년간 가르쳤던 윌리엄 클라크 박사가 한 말입니다. 그는 낮에는 농학을 가르쳤고, 밤에는 숙소로 학생들을 초청해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1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일본인 지성인들을 복음화시켰고, 일본 사회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이들도 나왔습니다. 그 시절에 일본에까지 와서 그것도 변두리 삿뽀로에 체류하며 농학과 성경을 가르쳤다면, 그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를 위하여 야망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한”이란 말은 쉽게 떼어버립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야망을 가져라”뿐입니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는 천지 차이입니다. 동과 서가 먼 것과 같은 차이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위한 야망을 갖고 그것을 성취한들, 그들을 궁극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늙음과 죽음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리스도가 빠진 야망은 잠시 이 땅에서 즐거워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격입니다. 잠시 오줌을 인해 따스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더욱 발이 어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빠진 야망은 잠시 누리는 따스함입니다. 윌리엄 클라크 박사가 말한 원래의 문장에서 “for Christ”가 빠짐으로 인해 뜻이 완전히 왜곡되듯, 이러한 빠짐으로 인한 왜곡이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에서도 존재합니다. 먼저 독자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 제목에서 탈출은 어떤 단어를 번역한 것이겠습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escape이라고 하겠지만, 놀랍게도 redemption입니다. 성경에서 구속(救贖)의 뜻으로 쓰이는 redemption은 전쟁의 포로나 노예를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자로 풀어주는 의미를 갖는데,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당신을 몸값으로 지불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성경의 의미가 담긴 단어 redemption을 제목으로 채택했지만 영화 자체에는 성경의 의미가 빠져있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Hope can set you free.”라는 문장도 성경에서 따왔습니다. 요한복음 8:32절에 나오는 “The truth will set you free.(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문장을 변형시킨 것입니다. the truth 대신에 hope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정관사 the가 없는 hope는 일반인들이 막연하게 갖는 소망이라는 느낌이 있어 웬지 인본주의의 냄새가 납니다. truth에는 정관사 the가 붙어야 합니다. 아무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유분방한 속성을 인해 아무 방향으로 튀며 자기 소견에 옳은 바를 진리라고 하기 쉬운데, 그러한 사람의 자유로움을 정관사 the로 꽉 붙잡아 하나님의 진리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문화 지체 현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세계 자동차 수출국 중 10위안에 듭니다. 머지 않아 5위안에 들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생산 기술을 수입한지 30여 년만에 이룬 실력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교통 문화는 아직 후진국입니다. 교통 사고 사망률이 세계 1,2위를 다투고, 추월과 과속과 끼어들기 등에 있어서 낙제점입니다.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은 쉽게 습득을 하였지만, 자동차 운전에 따르는 기본적인 에팃겟과 문화는 쉽게 형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물리적 변화보다 늦게 형성되는 문화의 변화를 두고 문화 지체 현상이라고 합니다. 서구 사회는 기독교 문화에 가깝습니다. 2천년 가깝게 기독교라는 종교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언어와 역사와 문화는 기독교와 떼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비기독교인이어도 그들은 몸에 벤 기독교 문화 속에서 자라 기독교인처럼 말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여기에도 문화 지체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서구인들이 받아들인 다른 종교와 철학이 앞으로 문화로 정착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쇼생크 탈출도 이런 문화 지체 현상 속에서 제목에 redemption이란 단어가 들어가고, 카피 문구도 “Hope can set you free.”라는 문장을 만들어내고 이와 대구로 “Fear can hold you prisoner.”라는 문장을 곁들여 놓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기에 성경이 말하는 참된 redemption과 소망과 자유는 없습니다. 그들의 표현은 단지 문화일 뿐입니다. 문화 지체 현상을 인해,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휴머니즘이나 상대주의와 같은 가치를 갖고 있는 이들임에도, 표현은 기독교적으로 한 것뿐입니다. 오히려 이런 유사품을 인해 기독교의 본래의 가치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소망과 자유를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의 선물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 승리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사품이기에 구별하기에 어렵고, 이것이나 기독교의 가치나 같은 것 아니냐는 혼동에 빠질 뿐입니다. 기독교인은 절대로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의 수준에서 머물면 안됩니다. 인간 승리의 관점을 넘어서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소망이고, 성경이 말하는 소망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소망이 늙음과 죽음을 초월하고, 그래서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소망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고전 15:19절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합니다. 정말로 우리의 소망이 다만 이 땅의 삶뿐이라면 얼마나 우리가 불쌍한 자입니까? 그런데 고전 15장은 단지 이것에 그치지 않고, 19-20절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뚫고 살아나셨음을 말하고, 그분을 첫 열매라고 하여 우리도 그것에 이어서 동참하는 열매들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고 다시 시작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곤고한 삶을 넘어서서, 영화로운 삶이 펼쳐지는 부활의 삶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5절과 26절도 볼까요?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The last enemy to be destroyed is death.)” 사망이 맨 나중에 멸망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추상명사가 아닌 것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구체적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파괴하고 멸망시키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늙음과 죽음을 실제로 멸망시켜 그 존재를 없이함으로 우리에게는 더 이상 늙음과 죽음이 존재하는 않는 것입니다. 이것까지 이렇게 해결시키는 소망이래야 소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서 잠시의 삶을 즐겁게 하는 소망은 진정한 소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한 소망에 관심을 두지 못하도록 하는 유혹제이고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의 잠시의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고, 우리도 관심을 갖는 바이지만, 지금 이 글은 소망의 양적인 차원이 아니라 질적인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딤전 4:8절은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의 연습은 신체적인 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명예와 권력과 재산을 얻기 위한 절제, 용기, 노력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분명히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절제, 용기, 노력이 이생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선사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여, 금생과 내생 모두에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연습이 아니라 경건에 이르기를 더욱 연습해야 합니다. 벧전 1:3-4절을 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잇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산 소망(a living hope)이 있게 하십니다. 이 산 소망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더 이상의 근본적인 죽음이 없음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에수님이 죽음을 뚫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이 있게 되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산 소망이라고 한다면 죽은 소망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소망입니다. 산 소망은 위의 베드로 말씀에 의하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합니다. 허무가 없고, 변화와 쇠약해짐이 없고, “영원”이 존재합니다. “무한”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쇼생크 탈출의 소망은 거듭 말하지만 이 땅에서 잠시 누리는 것들밖에 가져오지 못합니다. 공수래 공수거라고 사람은 아무 것도 가져오지 못하고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산 소망을 인하여 우리가 영원과 무한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것을 맛본 자라면 어찌 죽은 소망의 즐거움에 취해 만족하는 자가 되겠습니까? 기독교인은 이처럼 영화 하나에서도 육체의 감동에 취해 머물지 않고 그 너머의 경건의 감동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너무나 크고 맑고 깊고 그리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더 인용하고 싶은 성경 구절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구사전을 통하여 성경에 나와 있는 소망에 관련된 성경 구절을 모두 살펴본다면 우리는 무엇이 참된 소망인지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한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절제하고 몇 구절만 아래에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된 산 소망을 더욱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롬 8:23-25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엡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딤전 6:17-18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히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고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