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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평 땅속의 요코이 쇼이치: 2003년 3월 13일 작성 정요석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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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초등학교 때 일본 군인이 20년 넘게 섬에서 살다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부모님을 통해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쥐도 잡아 먹으며 살았다는 말씀을 들으며 참 외롭고 힘들었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커서 보니 이차세계대전 때 패전한 일본 군인이 전쟁이 끝난 것을 모르고 숨어 산 것입니다. 작년 6월말에 싸이판을 갔을 때에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괌에서 28년간을 산 이 군인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넓은 땅에서 우리는 살지만 자칫 한 평 땅속에 갇힌 이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우리의 삶을 살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제목: 1평 땅속의 요코이 쇼이치
부제: 명예의 전당에 등재된 이들의 허망한 삶! 
작성 날자: 2003년 3월 13일


세상을 살다보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일들이 발생하곤 합니다. 요코이 쇼이치의 경우도 이런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는 무려 28년간을 땅굴 속에서 산 사람입니다. 2차대전이 끝났는데도, 이걸 모르고 28년간이나 땅굴 속에 숨어서 살았습니다. 그는 2차대전 중인 1941년에 군에 입대하여 1944년 괌에 배치되었다가, 자기의 소속부대가 미군에 패배하자 밀림 속으로 숨어들어가, 1m 깊이의 땅굴을 1평 넓이로 파서 숨어 지내며 물고기나 나무 열매 등으로 28년을 버티어 냈습니다.

그는 1972년 1월 그곳 어부들에게 발견되었는데 그 때까지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괌은 미국령이 된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를 발견한 섬주민들이 병원에 데려가 건강 확인을 위해 X레이 촬영을 하려하자, 그것을 단두대로 생각하여 “죽이려면 빨리 죽여달라”고 비장하게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말이 28년이지 얼마나 긴 세월입니까? 어떻게 물고기와 나무열매만으로 체력을 유지했는지 놀랍고,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큰 병에 걸리지 않고 살았는지 놀랍고,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홀로 버티며 정신 이상이 생기지 않고 온전한 정신을 가졌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28년간에 어떠한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승부수를 띄워보는 심정으로 자기를 노출할 법도 한데, 그 좁은 1평의 땅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바라며 살았는지 참 신기합니다. 그 기간 동안 들키지 않은 주도면밀함이 돋보이면서도, 동시에 밀림 속 1평의 땅굴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심약하기 때문이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소심함 때문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그 해 일본으로 귀국해서는 “천황전하로부터 받은 소총을 온전히 가져와 돌려드립니다. 충분히 국가를 위해 공헌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감격적이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일본 보수 우익 국민들은 모두가 감격해 눈시울을 적시었다고 합니다. 저도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일본사람이 아닌데도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의 곧고 변하지 않는 충성심과 일관됨에 감동한 것이지요.

그는 28년간의 땅굴속의 삶을 “천황전하를 위해, 천황전하와 다이와(大和)혼을 믿으면서 살아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천황전하와 다이와혼에 대한 믿음, 일본 군국주의로 철저히 무장되어있는 그의 정신, 이것이 28년간 변하지 않는 충성심과 인내심의 정체입니다. 이것들이 25살의 나이에 입대하여 28살의 한창의 나이부터 28년간을 땅굴 속에서 보내게 한 것이라니, 사람의 가치관과 확신이 얼마나 사람을 좌우하는지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만약에 누군가 그에게 일본의 패전소식을 전하여 주었다면 그는 28년의 삶을 그렇게 무모하게 보냈을까요? 괌에 여행을 온 일본인이 어느 날 우연히 그 숲속을 거닐다 요코이를 만나게 되고, 일본어로 일본의 패전 소식을 알려주고, 지금 미국 당국에 신고를 하면 무사히 본국에 송환된다는 것을 알려준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요? 당장 신고를 했을 것입니다. 항복이 아닌 신고이므로 마음의 거리낌도 없이 경찰에 알렸을 것입니다. 돌아가는 주변 정세에 대한 무지로 그는 28년간을 쓸데없이 땅속에서 보낸 것입니다. 1평 땅속을 벗어나 소식을 듣지 못하여, 28년을 1평 땅속에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일본의 패전에 대한 소식이 그를 28년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했는데, 일본에 송환된 그 이후의 생은 어떤 삶이 되었을까요? 일본에 송환된 후 그는 공교롭게도 28년을 더 살았는데, 그 기간 동안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며 살았습니다.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경제가 어려울 때는 국민에게 다시 한번 뭉쳐 일본을 일으키자는 연설을 하였고, 나중에는 참의원에 출마하여 정치인으로 일본 제일주의를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는 1평의 땅속에 갇혀 28년간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더 좁은 천황전하와 다이와혼이라는 정신 세계에서 갇혀 그 이후의 28년도 살아야 했습니다.

1평이라는 땅속의 구차한 생활은 주민들에게 발견되어 청산되었지만, 천황전하와 다이와혼에 매인 그의 맹목적인 삶은 누구에게 발견되어 청산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의 젊음과 그의 인생을 앗아간 그의 좁은 정신 세계는 어떻게 타파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어찌 요코이 쇼이치뿐입니까? 그와 같이 1평의 땅속에 갇히지 않고, 세상에서 언론매체를 자유롭게 접해도 사람은 정신에 갇히기만 합니다. 일본의 우익보수주의자들은 아직도 천황전하와 다이와혼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아직도 이것을 굳건히 믿으며 이것을 위해 살고 있고, 요코이 쇼이치처럼 목숨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고 합니다. 자기들의 신이 일본을 지켜주고, 오직 일본 민족만이 신의 선택을 받았고, 신의 아들인 천황이 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3년 1월 16일은 일본 천황이 전립샘암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 날입니다. 시민들은 천황이 사는 황거 앞에 몰려와 쾌유를 비는 병문안을 긴 줄로 서서 접수했다고 합니다. 매스컴은, 암으로 사망했던 선대 천황 쇼와는 천황 가문에 암이란 병은 있을 수 없다며 발암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게 하지 못했는데, 현 천황은 발표하도록 “허락”했다며 “용감한 결단”이라고 법석을 떨며 치켜세웠습니다. 신문들은 사설에서까지 이 사실을 말하며 국민들은 무엇보다 천황 폐하의 쾌유를 바라자며, 쓸데없이 동요말고 조용히 지켜보자고 호소했습니다.

아직도 메이지(明治) 천황 이후 역대 천황의 생일은 공휴일이고, 주요 황족들의 생일엔 기자 회견이 따릅니다. 신문들은 황족들을 극존칭으로 표현하고, 생로병사에 따르는 인간적 약점을 발표하는데 아직도 주저하고, 발표할지라도 신적인 표현을 뒤섞어 사용함으로 인간의 냄새를 흐릿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천황을 일본 국민들 56%는 친근감과 경외감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누가 영국 왕실에 대한 영국민들의 사랑과 존중을 탓합니까? 오히려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기본적 전제가 틀리고, 그 정도에 있어서도 도를 종종 넘어서 신앙의 수준에이르러, 오히려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에 가깝습니다.

일본 천황은 죽지도 병들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화장실에 가지도 않고, 부부관계도 없이 자식을 낳는단 말인가요? 그는 철저히 사람입니다. 철저히 사람임을 인정하고도 충분히 권위와 리더쉽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한 때 교황무오설이라고 하여 베드로의 직분을 이어받은 교황은 그 말과 판단에 있어 오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tv에 비치는 교황들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어 부축을 필요로 합니다. 몇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데도 힘이 들어 몇 분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사람이 기억력인들 온전하겠으며, 세상의 빠른 변화를 좇아갈 수 있겠으며, 예전의 경험을 활용하는 옳은 판단과 지혜가 나오겠습니까? 구부정한 늙은 교황을 두고 교황무오설을 말하는 것은, 불교에서 철부지 어린 아이에게 죽은 고승의 영혼이 내렸다하여 신으로 모시는 것과 같은 어설픔과 억지가 보일 뿐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천황이 또한 그렇습니다.

미국의 프로 농구나 골프를 보면 명예의 전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선수 시절에 탁월한 성적을 올리고 적당한 매너와 인품이 있으면, 심사를 거쳐 그곳에 등재됩니다. 운동 선수들은 거기에 등재되는 것을, 명예의 전당이란 이름처럼 명예로 압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을 바꾸어 골프를 잘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지 생각하여 봅시다. 골프채로 공을 쳐서 멀리 정확하게 보내어 작은 구멍에 집어넣는 일이 우리 인생과 이 세계에 무슨 본질적인 변화와 향상을 줍니까?

구멍에 공이 들어가면 그 때마다 아프리카에서 굶어죽는 이들이 건강해집니까? 아니면 그 공을 집어넣은 사람이 갑자기 젊어지고 집안이 화목해집니까? 골프의 기량은 분명히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박세리 선수만 해도 어려서부터 골프 연습을 했습니다. 골프에 맞는 근육을 길렀고, 골프에 맞는 담력을 위해 밤중에 공중묘지를 다녀왔습니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박세리 선수는 만들어 졌습니다. 아무도 이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지적하는 것은 그런 노력이 골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 이외에 어떤 본질적인 것을 인생에서 가져오냐는 것입니다.

명예의 전당이라는 것은 오직 그 해당 분야에서만 가치가 있습니다. 골프 선수는 농구의 전당에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는 농구의 세계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때때로 운동에서 탁월한 성적을 올리며 강한 카리스마를 갖는 선수들이 tv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할 때, 부족한 상식과 더듬거리는 말과 어색한 매너로 우리를 씁쓸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는 tv에서 보지 말아야 했습니다. 체육관이나 그라운드에서만 어울리는 자입니다. 운동을 위해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바치면 바칠수록, 그는 다른 곳에서는 더 어울리지 못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코이 쇼이치가 오직 일본에서만 환영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일본 제국주의에 물든 사람들에게만 명예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양식 있는 일본인이라면 한 개인을 1평 땅만이 아니라 좁은 제국주의의 틀 속에 살게 한 그 시대 정신을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명예의 전당에 현혹당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등재되면 정말 명예가 있는 사람이 되는 줄로 착각하여 너무나 많은 땀을 헛되이 흘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스포츠를 경시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누구보다 스포츠를 좋아하고,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저는 20대에 합기도를 몇 년 했었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마치고 나면 밤 10시가 넘어 도장에 가게 되는데, 그 때부터 밤 12시가 넘도록 운동을 하곤 했습니다. 대부분 돌아간 체육관에서 큰 거울을 보며 발차기를 계속 해대곤 했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발차기를 완성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발차기가 조금 균형이 무너지고, 조금 체중이 실리지 않는다고 하여 제 앞길과 가정의 평화에 무슨 영향이 있다고 그렇게 해댔겠습니까? 완성의 기쁨이 있고, 운동 그 자체가 주는 기쁨이 있고, 땀을 흘리는 상쾌함이 있고..... 더 나은 기량을 위해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면, 운동을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쁨이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빌 게이츠보다 마이클 조던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저는 빌 게이츠가 그렇게 부자가 되는 사회 시스템은 다소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만약에 그가 컴퓨터 운영 시스템 도스(dos)를 구소련 같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연구했다면(실제로는 다른 이가 발견한 것을 구입했다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창작 독점권을 인정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노동 영웅이라는 훈장과 한두 계단 승진이나, 잘 하면 컴퓨터 연구소장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가 실제로 창의한 것은 대부분 사회에 빚을 지고 있으므로, 너무 많은 것을 혼자 가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보장이 없으면 사람들이 연구 발전의 동기가 없으므로, 생산력을 위해 사회는 어쩔 수 없이 특허권을 인정하지만, 아마 그는 자기만의 발견이 아니라 사회의 발견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것들을 사회에 환원하였고, 앞으로도 하고자 할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또 마이클 조던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플레이에서 감동을 보기 때문입니다. 탄탄한 인문학적 배경을 가진 이의 글을 읽을 때 감동이 되듯, 결코 그보다 덜하지 않은 감동을 맛봅니다. 왜 학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탁월한 성적을 거둔 사람보다 뛰어난 운동 선수가 경시되어야 합니까? 학문은 우리 사회에 경제적으로, 물리적 생산력으로 큰 효과를 가져오지만, 운동을 그 당사자에게만 부와 명예를 가져오기 때문입니까? 저는 학자들이 발견한 것이 정말로 이 사회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고 향상시켰는지는 확인된 사실(fact)이 아니라, 여전히 논쟁되는 의견(opinion)임을 알고 있습니다. 자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지 조금 더 편리하고 편안하게 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한 때 내의 선전 광고에 그것을 입으면 “편안하다”라는 try 상표가 있었습니다. 그 때 중학생들이 try의 뜻을 “편안하다”로 알고 있을 정도로 인기 있었던 선전입니다. 바로 과학이 편안하고 편리하게 할 지 모르지만, 평안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내의를 입으면 가볍고 따뜻하고 통풍도 잘 되어 편안할 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부부간의 애정이 굳건하여지고 가족끼리 더 화목하여 진정한 평안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많아도 사랑이 없어 느끼는 외로움은 아무리 좋은 내의를 입어도 여전히 외로울 뿐입니다. 학문도 운동도 모두 본질적 평안을 주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명예의 전당에 등재된 분들, 학문에 탁월한 성과를 거두어 노벨상을 탄 분들, 모두가 그 노력과 업적에 있어 존경을 받을 분들입니다. 누가 이것을 부인하겠습니까? 하지만 단지 그 영역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습니다. 요코이 쇼이치와 별반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노벨 화학상을 받으려면, 실험실과 연구실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합니까? 몇 평 안짝의 실험실에서 숱한 밤을 지새며 28년을 공부해도 못 받는 상이 그 상일 것입니다. 몇 평 안짝의 실험실에서 28년을 보내는 것과 1평 땅속에서 28년을 보내는 것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실험실에서 보낼지라도, 거기에서 형성되는 대인관계와 암투와 많은 독서량이 사람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안목을 갖게 한다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요코이 쇼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1평 땅속에서 누구와 대화도 없이 28년을 보내며 자연만을 벗삼았지만, 성숙해지고 안목이 생겼습니다. 그러기에 일본에 와서 대중연설가가 되고, 정치인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마이클 조던도 농구를 하면서 리더쉽과 안목을 배워 농구팀의 구단주까지 되었습니다. 훌륭한 선수들 중 코치와 감독으로도 성공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학자나 운동선수나 요코이나 나이를 먹으며 인생을 배우지만, 그렇다고 전인격전인 명예의 전당에 등재될 수는 없습니다.

임권택 감독을 널리 알리게 한 서편제가 있습니다. 남도의 질펀한 창소리와 아름다운 들녁과 소리꾼들의 애잔한 삶을 감동 있게 그려 백만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동의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득음(得音),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딸의 눈까지도 멀게 해야 할 것이고, 그녀 자신도 서방 없이 기둥서방을 이리 저리 옮기며 전전해야 한단 말입니까? 서편제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창법도 애달펐지만, 천황전하와 다이와혼 만큼이나 부질없는 득음에 인생이 소진되는 것은 더 애달펐고 우울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게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아람 왕이 가로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 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 (왕하 5:1-6)

나아만은 군인으로서 아람 국가에서는 명예의 전당에 오를 인물입니다. 왕이 얼마나 신뢰하였으면 문둥병에 걸렸음에도 존귀하게 여기고, 이스라엘에 많은 재물을 갖다주며 낫게 하고자 했겠습니까? 그 보다 무(武)에 있어서 더 명예가 있는 자가 아람에는 없습니다. 무인을 길러내는 아람의 사관학교에는 아람의 초상화가 그려져 복도에 진열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문둥병에 걸렸으니 곧 육체가 썩어들어가 칼도 잡을 힘이 없어지고 말도 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장군직에서는 물러나야 하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무(武)일지라도 이 땅에서의 삶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비참하게 만들 문둥병이 그를 참된 명예의 전당으로 인도를 합니다. 아람에 거주하며 아람 왕에게 충실하여 일생을 살다가 죽을 자가, 문둥병을 인하여 자기의 거하던 곳을 떠나게 되며, 자기에게 평생 거주하여 떠나지 않던 정신세계까지도, 문둥병과 함께 이스라엘 요단강에 씻어버리고 왔습니다. 다시 돌아올 때 그가 가져온 것은 노새 두 마리 분의 흙이었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알고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에 쓰는 흙입니다. 그 흙은 문둥병에서 벗어나 새살이 돋아난 것을 말해주고, 더 나아가 그 새살 안에 새 정신을 담은 것을 또한 말해줍니다.

그는 돌아올 때 어린아이와 같은 새살을 인해서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람의 국토에 갇히어 그의 정신까지도 얼마나 갇혔는가를 알게 된 것을 인하여 또한 기뻐했습니다. 그는 그 동안 아람의 신 림몬을 섬겼습니다. 바알과 같은 성격의 신입니다. 풍요와 비옥을 담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도록 충동질하는 신입니다. 이제 그는 이것을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야 할 삶은 무인(武人)의 삶도 아니고, 헛된 림몬을 섬기어 풍요와 명예를 누리는 삶도 아닌 것입니다. 그 너머에 자기의 새살보다도 더 고운 삶이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 그리움이었나 봅니다. 왕이 자기를 아무리 높이고 존귀하여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나 봅니다. 막연한 허기짐으로만 느껴지던 대상을 이스라엘에서 비로소 그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그의 돌아오는 걸음은 경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7-9)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인생을 살며 애써 쌓은 가문과 신분과 학벌과 업적을 모두 해로 여기고, 없는 것처럼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는 출중한 기량과 인격과 매너를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해서입니다. 이 지식만이 그를 구원하여 주고 진리로 인도합니다. 그가 쌓은 어떤 것도 그를 하나님에게로 인도하지 못하고, 이것을 배설물로 알고 그리스도를 알 때만이 그는 하나님께로 가게 됩니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 3:18-21)

19절이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추구하는 신은 배라고 합니다. 배를 배불리게 하는 것들을 그들이 추구한 것이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영광은 부끄러움이 될 것이고, 바삐 땅의 것들을 쌓느라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 못하고, 오직 땅의 일만 생각합니다. 이 땅에 있는 명예의 전당에만 들어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늘의 시민됨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시민이지만, 동시에 하늘의 시민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모합니다. 아무리 이 땅의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어도 우리의 몸은 결국엔 문둥이와 같이 썩게 되지만, 하늘의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면 오히려 우리의 썩는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됩니다. 나아만 장군의 썩는 살이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된 것처럼, 우리의 현재의 낮은 몸이 예수님의 영광의 몸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진정한 명예입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해야할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잃어버려도 되고, 배설물로 여겨도 됩니다.

낙양성 십리하에 영웅호걸이 그 누구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라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오지 못합니다. 영웅호걸과 절세가인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명예의 전당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를 몇 십 년간 연구하여 그곳의 전문가가 된들 무슨 본질적 변화가 있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짓이 진리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 우리가 요코이 쇼이치처럼 1평 땅속에서 인생을 보내고 있지는 않는지? 어떤 가치가 내 머리를 지배하여 나도 알지 못하게 인생을 소진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하고, 부수어야 합니다. 1평 땅속이란 물리적 한계도 부수어야 하겠고, 그 보다 더 작은 머리 속에 있는 정신 세계도 부수어야 합니다. 참된 명예의 전당은 천국에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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