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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속의 토끼: 시대를 읽는 정확한 눈 - 2003년 5월 12일 작성 정요석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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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잠수함 속의 토끼

부제: 시대를 읽는 정확한 눈

잠수함 속의 토끼하면 루마니아 출신의 작가 게오르규가 떠오릅니다. 그는 한국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1974년 이래 5번이 넘게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국찬가”란 작품을 출간하고, 한국을 ‘새 고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잠수함 속의 토끼는 1949년에 발표한 “25”시란 소설에서 언급되는데, 그의 출세작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25시는 선량한 평범한 농부인 모리츠가 유대인으로 오인되어 도망을 가다 체포되어 강제노동 수용소에 감금되고, 거기서 게르만 영웅족의 순수한 혈통을 이은 후예로 인정된 틈을 타 탈주하지만 다시 적국 병사로 잡혀 수용소에 갇히고, 전쟁이 끝나 석방되지만, 18시간 뒤에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감금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기의 신분에 대해 아무리 설명과 항변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25시라는 시간으로 지칭하며 고발한 이 소설은 25시라는 단어를 상징화하였고, 또 잠수함 속의 토끼라는 상징도 만들어냈습니다. 소설 속에서 잠수함 속의 토끼가 어떤 의미로 언급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에 잠수함에 근무한 일이 있어. 수천 시간을 해저에 잠수하고 있는 거야. 잠수함에는 대게 환기해야 할 시간을 알려주는 특별한 기계가 설치돼있지. 그런데 옛날에는 그런 장비가 없었거든. 그래서 사람들은 잠수함에다 흰 토끼를 태워가지고 다녔다는 거야. 함내에 산소가 부족해지면 토끼들이 먼저 죽는대.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네들도 앞으로 대여섯 시간밖에 살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고 함장이 최후의 결단을 내리게 되는 거지. 필사적으로 해면에 떠오르든가 전원이 함께 해저에서 몰살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한단 말이야. 내가 탔던 잠수함에는 산소 측정기가 있었기 때문에 흰 토끼 같은 건 없었어. 그런데 나는 산소의 양이 조금만 줄어도 금새 알아차렸어. 처음에 사람들은 나의 지나친 민감성을 조롱했지. 그러다가 그들도 나중에는 기계를 보는 대신 나를 관찰하게 되었어. 산소의 과부족을 나는 기계만큼이나 정확하게 알아맞혔으니까 말이야. 다른 사람들보다 산소의 부족을 여섯 시간 먼저 알아낸다는 것, 이건 우리-즉 흰 토끼와 나- 의 천부의 자질이야.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나는 그 옛날 잠수함을 탔을 때처럼 공기가 희박해져서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게 됐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24시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용으로 채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것들은 이 땅에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24시가 아니라 그 영역 밖인 25시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땅은 타락하여 원래 있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 대신에 이와 어긋난 전쟁과 이혼과 폭력과 질시로 가득 차고 있습니다. 존재해서는 안될 것들이 24시의 영역으로 가득 차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하루하루 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는 이들은 압니다. 마치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선이 사라진 줄 알고 숙을 막혀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워하고 그 말씀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와 흠뻑 젖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게오르규는 위에 인용한 말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가 트라이안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게오르규는 자기가 소설가로서 이 시대의 흐름과 상황을 누구보다 일찍 파악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소설가와 시인들, 그들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시대의 흐름과 상황을 누구보다 먼저 파악하고 아파하고 기뻐하는 이들일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들의 소설과 시에 의미가 없는 것이고 생명력이 없는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가와 시인보다 더 민감하고 냉철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입니다. 소설가와 시인은 참으로 인간적인 관점에서 시대를 읽고 아파하지만, 선지자는 신적인 관점에서 시대를 읽고 아파하고 예언합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취해야 할 행동들이 무엇인지 정확히 방향을 제시하고 가르쳐주고 몸소 행합니다. 소설가와 시인은 각자의 성향과 살아온 경험에 따라 제시하는 방향과 길이 다르지만, 선지자들은 모두가 똑같은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고 서로간에 어긋나지 않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합니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일치가 선지자에게는 있습니다.

노아를 한번 볼까요? 노아의 시대에 온 땅은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하였습니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하여 그 끝 날이 하나님 앞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시겠다며, 너는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어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암 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요?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이 암 수 한 쌍씩 거주하고 그들이 먹을 음식을 쌓아두려면 얼마나 큰 배여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큰 배를 전문적인 기술자의 도움 없이 노아 가족만이 만드니 더 많은 세월이 흘렀을 것입니다. 몇 년, 몇 십 년이 걸렸을 터인데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노아 가족을 놀려댔을까요? 날이 청명하여 비가 올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그러기를 몇 년, 몇 십 년 하였는데 노아 가족은 모든 생업을 전폐하고, 모은 재산을 모두 쏟아 부으며 이 일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우리 중 소위 말하는 왕따를 당하고 한 달이나 두 달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직장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취미단체에서 잠시라도 왕따를 당하면 그 낭패감과 상실감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고, 무엇보다 내가 틀린 사람인가 보다라는 생각에 정체성마저 흔들립니다. 나의 생각과 판단에 무슨 이상이 있기래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다름이 발생하여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가라며 자기의 사고와 판단을 자꾸만 살피게 될 때에, 그 판단력과 상식은 갈수록 망가지고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노아는 몇 년, 몇 십 년을 견디어 낸 것입니다. 얼마나 심지가 굳은 사람인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단지 심지가 굳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성격이 무디어 주위의 말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시대를 읽는 정확한 눈입니다. 마치 잠수함 속의 토끼가 산소가 희박해지면 사람보다 먼저 알아채고 고통을 느끼듯, 노아는 그의 시대가 진리는 희박해져 가고 대신 강포는 땅에 충만한 것을 알아채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는 호흡하는 매순간마다 고통을 느끼기에 몇 년, 몇 십 년 동안 방주를 만들어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 땅의 강포를 쓸어버리는 정의의 비가 하늘에서 내려오기를 목 타듯 기다린 것입니다.

노아처럼 시대를 정확히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대를 정확히 읽는 자는 숨을 쉴 때마다 진리와 강포의 농도에 따라 편한 숨과 가쁜 숨을 쉴 것입니다. 그의 호흡과 삶 자체가 진리와 연관이 되기에 그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시대와 상관없이 꿋꿋하게 서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시대를 인하여 고통하며 산 이로는 롯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2:6-8절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벧후 2:6-8)

롯이 자기가 속한 시대를 인하여 고통하고 심령이 상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롯 또한 자기가 살던 소돔과 고모라 성이 정확히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지를 알고, 날마다 힘들어 한 것입니다. 매순간 호흡할 때마다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한 것입니다. 롯은 아마도 알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머지않아 멸망할 것을 말입니다. 자기가 호흡을 해보니 진리는 점점 엷어지고 강포는 점점 진해지는 것입니다. 잠수함 속의 토끼가 산소는 점점 희미해지고 이산화탄소는 점점 진해지는 것을 느끼고 괴로워할 때 머지않아 잠수함 속의 모든 사람이 멸망하는 것처럼, 의인 롯이 그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괴로워할 때, 그리고도 그들의 행실이 고쳐지지 않을 때 너무나 농도가 진해진 그 강포를 인하여 소돔과 고모라 성은 멸망하는 것입니다.

두 천사가 롯을 방문했을 때 소돔 사람들은 사방에서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나와 롯의 집을 에워쌌습니다. 롯의 집을 방문한 자들과 관계를 갖겠으니 이끌어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을 롯이 안 된다며 말렸을 때, 이들은 이방인 주제에 우리의 법관이 되려한다며 흥분하여 이제는 그들이 아니라 너를 더 해하겠다며 롯을 밀치고 그 문을 깨치려 하였습니다. 소돔 사람들의 성 의식이 얼마나 타락하였는지를 알 수 있고, 언제든 무리를 지어 자기들 기분에 따라 폭력을 가볍게 구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고, 무엇이 그들의 기분을 자극하는가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두 천사는 문밖의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들의 강포함이 펼쳐지지 못하도록 막은 후에, 롯에게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밖으로 이끌어내라며, 소돔 성의 불법한 행실이 극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이곳을 멸하러 자기들을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을 때 이들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사위들에게는 소돔 성의 불법한 행실을 읽는 눈이 없었고, 소돔의 비옥한 옥토에서 나오는 풍부한 곡식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풍요한 경제와 찬란한 문화가 더할 나위 없이 좋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을 죄악이 가득한 곳이라 하며 갑자기 멸망한다고 하니 이 말을 그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호흡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돔이 멸망할 이유가 그들에게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내용을 읽을 때마다 마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이런 듯 하여 섬뜩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 시대가 소돔보다 성에 있어서 더 깨끗할까요? 전화와 비디오와 인터넷의 발달은 사람에게 여러 편리를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성과 폭력과 같은 죄를 짓는데 있어서도 편리함과 신속성과 즉시성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무리를 지을 필요도 없고, 남에게 들킬 필요도 없이 원하는 즉시 성과 폭력을 마음껏 구사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위험한 칼을 안겨준 것처럼, 정직과 절제에 있어 어린 아이인 현대인들에게 위험한 인터넷과 비디오와 전화를 안겨준 것 같기만 합니다. 혹 저만 이렇게 이 시대를 읽는 것은 아니겠지요?

롯은 참 위대한 것 같습니다. 그런 불법한 행실로 가득 찬 소돔 땅에 거하면서도 의로움을 유지했으니 말입니다. 예전에는 롯의 그러한 행실이 당연하게 보였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처음의 깨끗함과 밝은 분별력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됩니다. 이미 많은 부분에서 오염되고 타협되어버린 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하고, 어떤 행동을 끝까지 취해야 하는지 분별하는데 있어서도 자주 헷갈리고 혼동될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목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기회가 일반 성도보다 훨씬 많고, 항상 그런 분위기에 살면서도 이러한데, 강포함으로 가득 찬 소돔에 살면서도 의로움을 유지했으니 롯은 대단한 자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54-57에서 시대를 읽는 눈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눅 12:54-57)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기상에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농사와 고기를 잡는데 날씨는 중요합니다. 그들은 축적된 경험을 통하여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남풍이 부는 것을 통하여 날씨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였습니다. 무엇이 옳은 지를 스스로 판단치 못하였습니다. 시대를 읽는 눈은 자꾸만 어두워지고, 기상을 읽는 눈은 밝아지기만 하였습니다. 농사와 고기잡이를 통한 돈벌이에 관심이 있을수록 기상을 읽는 눈은 밝아지고, 시대를 읽는 눈은 어두워집니다.

요사이 일기예보의 정확도는 갈수록 정확해지고 있습니다. tv의 9시 뉴스는 끝 부분에서 기상 뉴스를 전하며 일주일간의 날씨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일주일 후의 날씨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정확성을 가지고 말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보다 얼마나 큰 발전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대를 읽는 눈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슈퍼 컴퓨터의 발달과 망원경의 발달과 기상 위성의 출현 등 기상예측을 위한 도구는 갈수록 발전하지만, 이 시대를 읽는 눈은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과학의 발달은 외면적인 물리 현상에 대한 관찰의 정확도를 높힐 뿐이지, 훨씬 더 중요한 정직과 절제와 공의에 대한 예측은 오히려 뒤로 물러나게 합니다. 관측하고 비교할 수 있는 객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도록 방임할 뿐입니다.

요사이 얼마나 많은 신문이 있습니까? 언론은 거의 재벌에 가까울 정도인 큰 자본으로 많은 기자들과 인력으로 국내만 아니라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일에 대한 탐지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tv와 각종 시사 잡지는 수시로 뉴스를 전하고, 심층적으로 분석하기도 하고, 시대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전문가들과 당사자들이 모여 몇 시간씩 토론도 합니다. 사회학과 심리학 등 발달된 학문을 통해서 분석하는 여러 시각을 가지고 철저히 해부하고 살펴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말로 이 시대를 정확히 읽는 것일까요? tv의 토론 프로그램을 보고 나면 정말 제대로 바라보고 올바르게 판단하였다는 느낌이 듭니까? 풍성한 말과 전문적 단어가 오갔지만, 그래도 본질이 아닌 피상적인 단견의 분석인 듯 하여 그 허전함이 강하게 밀려오곤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들은 본질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인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를 알아 그 코드에 맞추어 화려한 말잔치를 부리는 것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13-24)

정확한 판단은 정확한 신학에서 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이들이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워야한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엡 4:13절에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그렇다고 그의 편지를 읽는 모든 에베소서 성도들에게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아도 신학은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와 가르침을 통하여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성경을 배우며 믿음이 자랍니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분명히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됩니다.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됩니다. 감동적인 영화나 재미있는 드라마나 재치있는 코메디 프로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밑에 흐르는 이상한 전제를 이미 받아버리고 동의하면서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녀간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이미 결혼하여 이룬 가정도 파괴될 수 있다는 전제 속에서 전개되는 기혼 남녀의 우연한 만남과 애틋한 사랑을 보며 우리도 눈물을 짓고 감동하고 안타까워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영화와 드라마를 통하여 반복되고, 실제로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대로 연출이 될 때 우리가 이 영향을 받지 않겠습니까? 가까운 우리의 이웃과 친지와 친구들이 이런 일을 실제로 연출할 때, 우리 또한 이것이 대세인 줄 알고 받아 드리고, 이것에 대한 경계를 풀게 되고 비판과 비난의 손길은 훨씬 무디어져 아예 그런 인식마저도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결국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시대를 올바르게 읽는 분별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반복되는 답이지만, 엡 4:21절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듣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아 우리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지 않는 한,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한 때 좇았던,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에 머무는 한 우리는 시대를 읽고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미혹되어 오히려 시대를 즐거워할 뿐입니다.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은 감각 없는 자입니다. 문둥병을 아실 것입니다. 문둥병 환자는 자기의 썩어져 가는 사지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어느 날 또르르 굴러가는 소리를 듣고 살펴보면 자기의 사지 한 부분이 신체에서 떨어져 굴러가는 소리입니다. 바로 이런 문둥병 환자처럼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은 시대를 읽는 감각이 없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총명은 어두워졌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정신은 문둥병 환자처럼 썩어가고 절단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감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할 뿐입니다. 마치 노아의 시대에 사람의 죄악이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듯이 말입니다. 마치 소돔 사람들이 두 천사를 보고는 무엇이 옳은지 생각지 않고 마음에 이는 욕정에 따라 관계를 가지려 하고, 말리는 롯을 가만두지 않으려고 미친 자처럼 행동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를 읽고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시대를 호흡하는 데 있어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숨을 가빠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가빠하기는커녕 시대가 주는 향락과 편리함에 어느덧 젖어들어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며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시대를 즐거워할까요? 선지자들은 어느 때에 활동을 하였든 매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성 사람들이 풍요와 편안함을 즐길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의 악독이 하늘에 이르렀다고 외쳤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습니다. 모두가 편안한다, 편안하다 할 때에 선지자는 깨어 그 시대가 편안하지 않음을 외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게오르규는 소설가와 시인이 잠수함 속의 토기와 같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잠수함 속의 토끼는 오직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소설가와 시인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시대를 비판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에서 비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판만이 시대를 넘어서서 진리를 전하는 비판입니다. 그 누구보다 일찍 시대의 부패와 잘못된 흐름을 감지해냅니다. 모두가 그 부패된 길로 가도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인해 물들지 않고 꼿꼿하게 진리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원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원해도 이렇게 되지 않지만 우리는 가능합니다. 시대를 인해 아파하고 호흡을 가빠하며, 하지만 진리를 인해 쉼과 숨을 얻고 즐거워하는 이가 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분명히 죄가 관영하여 멸망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의 죄가 관영할지라도 회개를 하였다면 용서를 받았을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처럼 요나의 경고를 들은 후에,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었다면, 그래서 이 소문을 듣고 왕도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았다면, 그리고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못하게 하고,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고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면 그들 또한 용서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놀라운 사실은 설령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이렇게 회개하지 않았을지라도 거기에 의인 열 명만 있었다면 멸망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의인 롯과 같은 자가 10명만 있었다면 소돔과 고모라는 니느웨처럼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롯과 같이 시대를 읽고 아파하는 자가 10명만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 의인 열 명 때문에 멸망을 거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 10명만 있으면 실제로 그 땅은 변화가 있습니다. 의인 10명이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만큼 그렇게 부패하지 않도록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의인의 말과 행동이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죄악의 관영함이 훨씬 덜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의인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 이 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자입니다.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이는 과학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고, 뛰어나 야구나 골프 선수도 아니고, 역량있는 탤런트나 가창력 있는 가수도 아닙니다. 이들 모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의인뿐입니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감정이 무엇이겠습니까? 노래와 운동 경기를 보며 열광하는 이들은, 실제로 사람이 죽어가는 정당하지 않은 동기에 발생한 침략 전쟁을 보면서도 애국심이라는 잘못된 감정을 인하여 열광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는 감정을 자연스럽다고 하여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르고 간직할 감정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감각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이 시대가 지향하는 감정과 사상이 어떤 면에서 잘못되었는가를 말해줄 수 있는 선지자가 그러기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선지자만이 시대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힘이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키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대를 호흡하기가 어떠하십니까! 물 만난 고기처럼 편하십니까? 아니면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숨을 가빠오는 것을 느끼십니까? 골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성찰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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