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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놀자! | 정요석 | 2017-03-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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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93년도에 쓴 것을 2002년에 일부 수정했습니다. 청년회 시절에 놀이문화부를 만들며 생각했던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최근에 어느 교회 청년회로부터 겨울수련회 때 강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수련회 주제가 pray and play라고 합니다. 제목이 참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이 글이 떠 올라 올립니다. 제목: 잘 놀자 까뮈의 이방인에 등장하는 주인공 뫼르소는 회사가 끝나면 레스토랑이나 술집에 가서 저녁을 때우곤 했습니다. 특별히 헤어질 이유가 없어 계속 사귀고 있는 여자와 영화관을 가는 것 등으로 시간을 메꿔 나갔습니다. 그런 그는 휴가를 받아 간 해변가에서도 특별하게 재미난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권태와 무료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 강렬하게 쏟아지는 강한 햇빛에 이끌려 별 죄책감도 없이 일상처럼 권총으로 사람을 쏴 죽입니다. 친구와 비디오를 본 뒤 택시를 타고 어디를 가던 고등학생 이 모군은 잘 못 입고 온 누나의 파카 속에 있던 등산용 칼을 우연히 만지게 됩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칼을 꺼내어 운전사의 목에 디 밀고 “꼼짝 마!”라고 위협을 합니다. 위협을 한 뒤에 무엇을 해야 할 줄 몰라 어물거리다가 잡힌 이들이 한 말은 “다시는 비디오를 보지 않을께요...”였습니다. 제 기억에 이 일이 1990년대 초에 있었습니다. 그 때는 한참 비디오의 해악성을 말하던 때입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인터넷이 첨가되었습니다. 인터넷에 있는 섹스와 폭력과 자살을 비롯한 엽기적인 사이트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예전보다 더 쉽게 성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이로 인한 범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와 달리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성과 감정 모두의 측면에서 인생의 의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뫼르소와 달리 무의미와 권태로움 때문에 덜컥수를 범할 가능성은 우리에게는 현저히 적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도 한가한 주말이나 연휴를 어떻게 사용할 줄 몰라 권태로움과 나태 속에서 TV, 비디오, 영화, 인터넷 등으로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왜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이런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성에 질린 삶을 살아야 하는 생각을 종종 하면서 말입니다. 수용자가 지각(知覺)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른 채 받아들이게 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역하지각(域下知覺)이라고 부릅니다. 1초에 24장이 돌아가는 영화필름에서 한 장을 콜라를 마시는 장면이나 팝콘을 먹는 장면을 끼워 넣었더니 관객들은 이 장면을 포착하지 못 하면서도 쉬는 시간에 평소보다 몇 배나 되는 콜라와 팝콘을 사 먹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잠재의식 메시지라고 부릅니다. 자제력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청소년들은 이러한 식으로 비디오나 인터넷을 보면서 성과 폭력과 노름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아 택시강도와 같은 모방범죄를 벌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최소한 두 가지 면에서 놀이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여가 시간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공부, 찬양, 전도, 봉사, 등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겠지만 모든 여가 시간을 이러한 일에 바칠 수는 없는 일이고, 오히려 이렇게 시간을 바치는 일은 우리의 신앙에 부정적인 역할을 끼칩니다. 지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는 일상사의 경험으로도 이것을 알 수 있고,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몇 시간 반복되면 좋게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긴장이 풀려 경시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가 선용은 1년에 7 백만 목 이상이 팔리는 화투 놀이라고 합니다. 만만한 TV나 비디오와 인터넷도 빼놓을 수 없는 놀이입니다. 주로 남을 평가하고 비난할 때 가장 신나는 수다도 시간을 때우는 한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놀이를 하면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다 압니다. 하지만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특별한 대안이 없는 한, 그것을 재미로 반복하는 것이 대중 놀이의 한 속성입니다. 먹을 것이 앞에 있으면 배부른데도 손이 나가는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하나님과 원만한 관계 속에서 지내다가도 주말, 연휴, 휴가, 방학이 되었을 때 안식을 누리며 하고 싶었던 것을 하리란 기대와는 달리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줄 몰라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경험을 한두 번쯤은 하였을 것입니다. 직장인들은 주말과 휴일에 집에 있으면 집안일과 아이들의 등쌀에 오히려 직장에 출근하는 것이 낫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남는 시간을 전 가족이 건전하게 보내는 방법에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말과 휴일을 제대로 보내지 못해서 쉼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심신이 지쳐 다음날 출근을 기다리고, 직장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 속에서 활력을 되찾고 자기의 존재의의와 능력을 확인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놀이문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주 5일 근무로 갈수록 여가 시간이 늘어나는 이 때에 참된 레크레이션(recreation)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레크레이션(recreation)은 말 그대로 재창조입니다.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재창조가 이루어져, 일터에 복귀할 때 충전된 재창조의 내용으로 보다 더 생산성 있게 일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하고 있는 놀이문화가 우리의 심리, 가치관, 대인관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신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 경험, 그리고 절제력이라면 TV, 영화, 음악, 인터넷을 이용하면서 취사선택을 하여 좋은 것만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그 시간에만 단지 즐기는 것으로 끝내기 때문에 후유증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재의식 메시지와 역하지각이란 현상은 우리로 함부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결론 지을 수 없음을 알게 해줍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놀이를 할 때에만 겪는 현상은 아닙니다. 경제력에 비해 과도하게 형성된 광고시장은 우리로 부지불식간에 어디서나 광고를 매일 접할 수밖에 없게 합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사건 때, 지나치게 광고지가 객실 내에 붙어 있고. 객실의 출입문을 수동으로 여는 가르침은 조그맣게 붙어 있어서, 승객들이 제 때에 출입문을 열지 못해 많은 수의 사망이 발생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터넷을 해보십시오. 얼마나 시시각각으로 광고가 우리를 현란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일간신문을 인터넷으로 보아도 성에 관한 광고가 수시로 깔려 있습니다. 마우스로 클릭을 할 때 자칫 실수하면 바로 낯 뜨거운 장면이 실린 포르노 광고가 즉시 떠오르고, 이런 광고는 대개의 경우 한 번의 클릭으로는 그 자취를 감추지 않아 민망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고, 자극적인 장면에 목사인 저임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받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죄성은 무서운 것인지라, 그렇게 순식간에 접한 장면임에도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정보의 시대에 사는 우리로서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되는 이런 매체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감정을 왜곡하여 판단기능을 약화시킵니다. 현대의 산업사회를 사는 우리는 가지각색의 문화를 매순간 접할 수밖에 없고, 외딴 곳에서 따로 살지 않는 한 결코 이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도피할 수도 없고, 동화된다는 것은 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이러한 문화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놀이는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단순하게 오락이나 방정맞은 게임으로 국한하고 매도하여 놀기 좋아하는 한량이나 좋아하는 일로 여겨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또 있습니다. 놀이는 놀이공동체를 형성시킵니다.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간주곡”처럼 긴장 없이 임하게 하면서도 참여자의 심금을 울리며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이 놀이입니다. 군대나 동문회에서 공동으로 하는 행사와 놀이에서 강한 소속감과 동료애를 느끼는 것은 그 좋은 예입니다. 교제가 깊이 이루어지지 않고 공동체성이 결여된 단체에서, 진지하지 않게 임할 수 있는 놀이가 의외로 공동체의 회복을 가져오고 단결을 이루어줍니다. 얼음 깨기(ice break)를 하는데 있어 놀이만큼 좋은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알아야 할 것은 놀이는 놀이라는 것입니다. 놀이가 공동체성의 회복을 가져올지라도 바로 신앙의 성장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놀이는 기독교가 아닌 어떤 단체에서든지 공동체성의 회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고등학교 동문회들이 카니발이라는 이름의 모임을 하곤 했습니다. 일종의 파티 같은 것인데 이 일에 참여한 친구들이 목숨을 걸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곤 했습니다. 돈도 나오지 않고 학점을 받는 것도 아닌데 자기의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하며 준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카니발이란 놀이를 통하여 동문회가 어떻게 깊이 하나가 되는가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회복된 공동체성이 어떤 성격을 띤 것이며 이것을 부작용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이끌 것인가 하는 문제는 놀이와 함께 신경을 써야 할 문제입니다. 카니발이 종종 퇴폐적으로 흐르지 않습니까? 하나가 된 공동체는 그 열기를 어딘가로 분출해야 합니다. 방향이 없으면 술과 춤과 성으로만 탈출구를 찾고 그 끝은 당연히 퇴폐의 적나라한 잔해뿐이지 않겠습니까? 저는 청년회 소속이었을 때 이런 취지에서 놀이문화부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 청년회는 자기가 원하는 내용이 있으면 담당 교역자와 상의하여 부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많은 청년회원들과 젊으신 담당 교역자는 놀이문화부의 취지에 대해 흔쾌히 동의했고 적극 협력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회원으로 가입하였고, 첫 번째 모임을 건전한 비디오를 보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놀이문화부에서 할 일도 의논했습니다. 두 번째는 아마 피자 만들기를 한 것 같습니다. 청년 한 명의 집에서 피자 만드는 도구와 재료를 준비하여 남자와 여자가 모두 참여하여 피자를 만들고 같이 먹었습니다. 이 때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참여했는지 모릅니다. 요리를 처음 해보는 사람들이 재료를 씻고 깎고 다듬고 자르고, 밀가루를 반죽하는 일등이 그 자체로 큰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 아무 것이나 해도 재미있었고, 그러면서 나누는 대화는 신나기만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요리를 해보는 사람에게는 요리가 만만치 않음을 알게 해주었고, 동시에 얼마나 창의적이며 나름대로 성취감도 느끼는 것임을 느끼게 했습니다. 피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처음으로 그 과정들을 지켜본 사람들은 피자 자체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습니다. 세 번째는 아마도 음악 감상회를 한 것 같습니다. 음악을 전공한 청년회원이 클래식 음반을 들려주며 설명해주었습니다. 클래식의 문외한들이 이 기회를 통해 음악에 관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네 번째는 유명한 미술 전람회를 갔습니다. 역시 미술을 전공한 회원이 설명을 함으로 어려운 미술 세계를 보다 친숙하게 접하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놀이문화부는 청년들이 부담 없이 참여하며 놀 수 있는 내용을 만들어 갔습니다. 청년들의 기대와 참여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지금도 그 열기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런 자리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남녀를 살피며 적당한 배우자를 물색하기도 했습니다. 제 개인 생각으로 이런 교회의 공동체를 통하여 신앙을 확인하고 인격과 성격을 확인하며 배우자를 찾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도 많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당회에서 청년회의 놀이문화부가 논의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어떻게 교회에 놀이문화부가 존재하느냐는 것입니다. 놀이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감을 보이신 것입니다. 경건한 교회에서 놀이를 하는 부서가 존재해서 되겠냐는 것입니다. 다행히 그 회의 자리에 인류학을 전공하신 분이 계셔서 놀이가 사람 사는 사회에 얼마나 중요하고 좋은데 그런 소리를 하냐며 적극 변호했다고 합니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었는지 “나보다 더 놀이에 대하여 아는 분 있으며 나와 봐요”라는 한 마디로 다른 분들을 압도하고 제압하여 이 문제는 넘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놀이문화부에서 본 비디오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교회에서 비디오를 보고, 그것도 야한 장면이 있었다고 하는데, 괜찮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담임 목사님과 청년회 담당 교역자께서 그 비디오는 건전한 비디오였고, 문제되는 장면도 전체의 흐름에서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적극 변호하여 더 심각하게 논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흡족히 여기시지 않는 당회원들이 계셔, 담당 교역자의 권유에 의하여 놀이문화부라는 이름을 기독교문화부로 바꾸었습니다. 교회의 덕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지요. 하지만 놀이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삶을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까? 혹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느냐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저는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어쩌면 목사이기에 더 많은 스트레스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기가 어떠십니까? 힘드시지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네. 즐거움과 힘듦이 동시에 존재하네요. 목회라는 것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항상 긴장하여야 하고 힘든 면이 있네요.”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십니까? 오직 기도와 성경읽기만으로 푸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저는 운동이나 산책으로 풀곤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운동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좋아한다고 잘 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좋아해서 꾸준히 하니까 어떤 종목은 잘 한다는 말도 듣게 됩니다. 저는 탁구를 칩니다. 아직 경건의 훈련이 덜 되서 그런지 기도와 성경 묵상으로도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가 탁구를 치면 풀립니다. 아직 세속의 때가 다 씻겨지지 않은 어설픈 목사라 그런지 게임에 임하게 되면 승부를 초월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이기려고 게임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상하게 게임을 시작하면 이기려는 본능이 사람에게 있나 봅니다. 저도 모르게 탄식과 환호가 절묘한 플레이와 아쉬운 플레이가 연출될 때마다 나옵니다. 그렇게 게임하여 땀을 빼고 나면 저를 짓누르고 있던 스트레스는 모두 달아납니다. 심리 상태도 훨씬 밝아지고 높아집니다. 탁구를 치고 난다고 당면한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문제에 임하는 자세는 틀려집니다. 보다 긍정적으로 진취적으로 바뀌어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에 들어갈 때쯤이면 아이들을 위해서 먹을 것도 기꺼이 사갈 수 있는 넉넉함과 여유가 생깁니다. 예전에는 이런 운동 같은 것을 안 해도 스트레스가 없었고 건강했고, 다들 정신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살았고, 목사님들은 목회만 잘했다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특별히 시간을 따로 내어 운동하지 않아도 생활 자체가 운동이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체적으로는 건강할지 모르나 특정 종목을 오래 함으로 인한 해당 부위의 손상이 있습니다. 테니스를 오래 하면 테니스 엘보에 걸리기 쉽다고 하지 않습니까? 조기 축구를 열심히 하는 분들 중에는 무릎을 다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걷는 것이 관절에 영향을 주지 않는 최고의 운동이라고 합니다. 뛰는 것도 관절에 영향이 있는데, 걷는 것은 운동의 부작용이 없는 최상의 것이라고 합니다. 저도 탁구를 많이 치다보니 무릎 쪽이 조금 좋지 않은 것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통신도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편지나 전화나 인터넷으로 신속하고 쉽게 연락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마다 손수 직접 움직여 찾아가 전해야 했습니다. 그 때 무슨 교통수단으로 갑니까? 대개의 경우 최고의 운동인 빠른 걷기로 갔습니다. 노동이라고 할 만큼 걷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또 따로이 시간을 내어 운동을 하는 것은 운동이 아니라 심한 노동에 해당합니다. 예전 분들은 이미 삶 자체를 통하여 충분히 운동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교통의 발달로 더 바빠졌습니다. 청년회 때 부산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생활은 서울에서 십년 넘게 해도 결혼은 주로 고향인 부산에서 했습니다. 친한 이가 결혼을 거기서 하면 부산까지 가서 참석해야 했습니다. 예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인데 교통이 발달하여 이른 아침에 고속버스를 타고 갔다가 결혼식에 참석한 후 올라오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차에 시달립니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몸은 뻐근합니다. 스트레스입니다. 따로이 운동을 해서 풀어야 할 필요가 당장 발생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결혼식을 참석하는 자체가 주위 풍경을 감상하는 즐거운 나들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비행기가 발달하지 않던 시대에 선교사들은 배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비행기로 하루면 갈 거리를 몇 달에 걸쳐 가는 것이지요. 시간의 낭비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런데 선교사들은 배로 가는 시간에 책들을 저술하기도 하고, 밀린 독서를 하기도 하고, 깊은 묵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용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충분했던 것입니다. 결코 시간의 낭비가 없습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면 넓은 배안에서 별의별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바울과 같은 사도들의 시대는 더 했습니다. 바울은 세 번이나 선교 여행을 했지만, 운동의 부족은 없었습니다. 배를 타거나, 걸어 다녔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비행기를 타고 수시로 옮겨 다녔다면 그도 또한 에커노믹 클래스 증후군에 걸렸을지 모릅니다. 좁은 비행기 좌석에 장시간 앉아 있으면 혈액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해 급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선교 여행을 세 번 하면서 위험하고 힘든 경우도 많이 당했지만 동시에 여러 곳의 경치를 구경하고 문화를 체험하고 음식을 맛보는 부가적인 소득을 얻기도 했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겪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이점이 많이 있는 것이고, 그가 쓴 서신서들 중에 아마도 배에서 쓴 것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아직까지 그렇게 보는 학자는 없더군요. 현대의 사람들은 과학의 발달로 편리해지고 스트레스가 많이 없어진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스트레스가 더 증가하는 면도 있고 특별히 따로이 시간을 내어 운동을 해야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특별히 레저에 시간과 물질과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해서 지금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탁구를 칠 상황이 아니라면 산책이라도 합니다. 저를 관찰해보니 산책이라도 안하면 전체적으로 제가 디프레스 되는 것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무기력에 빠지고 소극적으로 변하고 자신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책을 하며 땀을 흘리면 상황이 바뀝니다. 저에게 적합한 스트레스 해소법은 몸을 움직여 땀을 내는 형태입니다. 음악을 듣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저에게 있어서는 몸을 움직여 땀을 내는 것입니다.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사람들이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보다 훨씬 일을 많이 합니다. 주당 근로시간이 40시간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경쟁에 지지 않기 위해 저녁과 휴일에도 일을 하고, 아니면 실력을 기르기 위해 학원에 갑니다. 영어 학원에 가고 회계와 법에 관한 실무 강의를 듣고 아니면 자격증을 따려고 합니다. 이것들까지 계산에 넣으면 실제로는 평균 근로 시간이 예전보다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다만 자기 스스로 근로 시간을 늘인다는 측면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 교회에 도배 전문가가 있습니다. 오래 동안 도배를 하며 실력을 성실하게 연마하여 국내에서 도배라면 그렇게 꿀리지 않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이 분의 말을 들으면 연장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칼이나 가위를 돌에 갈면서 쉬는 시간을 가졌는데 지금은 워낙 좋은 칼과 가위가 나와 돌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투리로 쉴 수 있는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연장의 발달로 순간순간 일을 하는 데는 편리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많은 일을 쉬지 않고 해야 하므로 힘들다는 것입니다. 평균 근로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이런 분들에게도 쉼과 적당한 여가 생활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자연이 아니라, 빌딩으로 갇힌 도시의 깊은 사무실 속에서 전화와 컴퓨터와 팩스와 인터넷으로 일을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여가를 잘 보낼 수 있는 좋은 놀이가 더욱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녁에만 그것도 매우 늦게 얼굴을 마주하거나 아니면 겨우 주일이나 휴일에만 얼굴을 맞대는 현대의 가정에게는 더욱 일치감과 화목을 안겨주는 좋은 놀이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놀이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놀이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제 아이들은 청소에 참여시키는 것만으로도 좋은 놀이가 됩니다. 꼭 스키를 타고 골프를 치고 승마를 해야 좋은 여가 선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들이지 않고도 잘 놀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좋은 비디오 한 편을 빌려 보고 전 가족이 군것질을 하며 대화를 나누어도 얼마나 좋은 여가 선용입니까? 집 뒤에 작은 산이 있다면 전 식구가 같이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최상의 여가 선용입니다. 문제는 놀이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입니다. 스트레스는 누구나 쌓이고, 이것은 풀지 않으면, 고무줄이 계속해서 긴장되어 있으면 언젠가 탄력을 잃고 축 늘어지거나 끊어지듯이, 사람이 스트레스에 항상 노출되어 있으면 언젠가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쳐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 때에 자기에게 적합한 형태로 풀어주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적합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무엇인 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와 성경 읽기만을 강조할 것이 아닙니다. 가족에 대한 배려도 필요합니다. 배우자와 자녀들도 스트레스를 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족 구성원간을 인하여 스트레스가 또 쌓이기도 합니다. 신앙이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트레스가 쌓여서 가족간에 불화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야외에 있는 기도원을 전 식구가 방문하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기도를 해서 무엇보다 좋고, 기도원으로 가는 드라이브가 좋고, 그곳에서 보는 산과 나무가 좋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제 자리를 찾음으로 가족간의 사랑과 화목이 회복되기도 하고, 오고가는 여행과 가벼운 대화를 통해서 회복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놀이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입니다. 자녀들에게 노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건전한 자녀로 자랄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대중문화는 특별한 대안이 없는 한 뻔한 결과를 알면서도 반복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유행과 또래의 소속감에 민감한 자녀들은 다른 아이들이 모두 알고 있는 대중문화를 체험하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끼고 그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재미가 아니라, 또래와 어울리기 위해서도 대중문화에 휩쓸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이겨내며 자기만의 여가 선용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의 배려가 필요한 영역입니다. 잘 놀아야 합니다. 건전하게 노는 것이 무엇인지 내용과 방법을 배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일수록 잘 놀아야 합니다. 교회당에서 시간을 보낼 때 시험에 드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할 때 시험에 빠집니다. 신앙을 위해서 잘 놀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자기에게 맞는 여가 선용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고, 구체적인 실천에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잘 놉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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