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2003년 3월 6일 작성 | 정요석 | 2017-03-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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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문학을 좋아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문학의 내용을 모티브로 해서 글을 쓰거나 설교를 하는 편입니다. 이 글의 내용은 제가 중고등부 사역자로 면접을 받을 때 수요일날 저녁에 했던 설교입니다. 용정에 갔을 때 윤동주 시인이 다니던 초등학교에 서시가 쓰여있는 것을 학교 대문 입구에서 봤습니다. 일부러 묘소도 찾아다녀봤고요. 하나님을 모르기 전의 제 모습을 이분의 시에서 가끔 찾곤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설교를 통해 이미 접한 내용일 것입니다. 제목: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부제: 나비효과 우리 나라 사람이 가장 애송하는 시가 윤동주 시인의 서시라고 합니다. 1940년대에 일본인들은 한국 통치에 있어 마지막으로 기승을 부리며 한국어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문인들은 그 때에는 한국어로 된 문학 활동이 전혀 안 이루어진 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윤동주 시인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나중에 발견되어, 한국어로 된 문학활동이 일제의 철권 통치하에서도 중단되지 않고 이루어졌음을 문인들이 알게되며 큰 기쁨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오직 31편의 시만 남기고 감옥에서 해방이 되기 몇 개월 전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시는 그의 유고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이름을 가진 시집의 "서시"입니다. 이 시를 처음 읽고 깊은 감동에 젖었던 학창시절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이 시를 음미하여 보십시오. 序 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윤동주 시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이 시를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몇 편의 시를 쓴 후에 이 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시작하는 시란 의미에서 이 시에 "序詩"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서시를 쓰는 자세와 정서와 느낌으로 다른 시들도 썼기 때문에 이 시에 서시란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으니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그를 평하는 평론가들의 글들에서 자주 눈에 띄는 단어들은 "도덕적 견실과 결백함에의 지향", "자기응시", 그리고 "죄책감" 등의 단어들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하신지요? 그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했는데, 여러분은 윤동주 시인의 이 민감함에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잎새는 아주 미세한 바람에도 영향을 받아 흔들릴 것입니다. 이런 작고 약한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시인의 민감성을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여러분은 혹 이 표현을 깨끗하고 올바른 삶을 살려는 민감한 시인이나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보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청아한 삶을 강조하는 시적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시적 표현이기에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상상의 표현말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로렌스 교수가 행한 실험에 대해 한번 들어보십시오. MIT 공대의 로렌스 교수는 모의기상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온도, 기압, 풍향 등을 변수로 하여 기상실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소수점 이하 여섯 자리까지 변수의 값을 입력해야 했으나, 별 차이가 있으랴 싶어 세 자리까지만 입력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결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기상의 변화를 연출해냈습니다. 소수점 이하 여섯 자리 대신에 세 자리를 입력하면 맑은 날씨 대신에 돌풍이 부는 날씨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소수점 여섯 자리와 세 자리의 차이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0.001과 0.000001의 차이입니다. 이 차이로는 잎새도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차이로 맑은 날씨가 비가 오는 날씨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입니다. 런던의 평화스런 공원에 나비가 한 마리 꽃에 앉아 있습니다. 그 나비가 날개 짓을 하며 살포시 다른 꽃으로 날아갑니다. 그리고 나비의 그 날개 짓으로 인해 이곳 서울에서 거대한 폭풍우가 일어납니다. 나비의 미세한 날개 짓이 폭풍우의 원인이 된다 하여 "나비효과"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도 해마다 여름이 되면 몇 개의 태풍이 지나가곤 합니다. 남쪽 저 멀리에서 태풍이 발생하여 북쪽으로 이동하면 우리 나라는 긴장을 하고 살펴봅니다. 한반도 쪽으로 방향이 정해져 올라올까 유심히 관찰합니다. 그런데 태풍이 한반도 쪽으로 접근해도 정확히 그 진로를 맞추지 못합니다. 워낙 변수가 심해 중국 쪽 서해상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고, 일본 쪽 동해상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중국과 일본 쪽으로 빠져나갈 듯한 태풍이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한반도를 강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태풍의 진로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 있어서 맨 처음의 미세한 값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나비의 날개 짓과 같은 작은 힘으로도 엄청난 위력을 가진 태풍을 발생시키기도 하고, 그 엄청난 태풍의 진로를 결정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면 놀이터에 시소라는 놀이기구가 있지 않습니까? 무게가 같은 사람이 양쪽에 앉으면 시소는 평형을 이룹니다. 그 때 어느 한쪽에 조그마한 무게라도 가해지면 그쪽으로 시소는 움직입니다. 양쪽에 100kg의 무게를 가진 건장한 남자들이 각기 앉아서 평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 때 10g의 저울추를 한쪽에만 두면 시소는 그쪽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물론 시소는 무게에 매우 민감한 기계여야 하고요. 10g이란 무게는 별거 아니지만, 100kg이란 무게를 한쪽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10g으로 100kg을 움직여 큰 운동력을 발생시키는 것이지요. 시소는 단순한 운동 과정을 보여주지만, 날씨는 그 과정이 복잡합니다. 어떻게 평온한 날씨와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가 되는지 여러 변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때에 초기의 조그마한 값이 그 복잡한 메카니즘 속에서 큰 결과를 산출해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나비효과가 됩니다. 이상의 것을 살펴볼 때, 우리는 윤동주 시인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것이 결코 시적 표현만은 아닌 것임을 알게 됩니다. 대충 삶을 산다면 괜찮겠지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추구한다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당연히 괴로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민감히 깨어 있지 않으면, 그 작은 바람으로 인해 언제 어떻게 큰 태풍을 연출해낼지 모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미워하는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면, 그 마음은 강한 분노로 표출되고, 날카로운 말로 표현되고, 어떤 때는 주먹질을 하게 되고 심지어는 살인으로까지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5:21-22절을 보면,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실제 이루어지는 살인만을 살인이라고 하기 쉽습니다.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한 방 치고 싶고 칼로 찌르고 싶은 욕구만으로는 범죄구성요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과 경찰력만 없다면 언제든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의 조짐들이 범죄가 구성될 요건을 다 충족하지 못하여 범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현실의 법과 과학력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 생각을 감지할 수 없고, 그 생각들이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질지 여부에 대해 판가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노하는 것이나 욕하는 것이나 모두 살인과 마찬가지로 지옥에 들어가는 범죄라고 말합니다. 간음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십니다. 5:27-28절을 보면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현실적으로 드러난 행동만이 아니라 그 동기에 대해서도 똑같은 범죄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엄하게 말하는지 모르고, 실제에 있어서는 성경이 엄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과학의 발달로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하던 많은 일들을 쉽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살던 사람이 부산에 있는 결혼식에 참가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내려가는데 며칠씩 걸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사이는 교통의 발달로 원하기만 하면 당일로 비행기나 차로 다녀올 수 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 있는 학술대회도 원하면 비행기로 다녀올 수 있습니다. 통신은 더 편리함을 가져와 원하는 사람과 세계 어디서든 즉시 통화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마음에 원하는 일을 실행하는 방법이 점점 간단해지고 즉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자주 섹스에 관한 광고를 접하게 됩니다. 매우 빈번한 광고들은 많은 경우 성(性)에 관계된 것이고, 고스톱과 포커와 같은 노름에 관한 것들입니다. 인터넷이 과학의 총아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제일 많이 검색되는 단어는 섹스라는 현상은 얼마나 많은 부정적 측면이 있는가를 말해줍니다. 인터넷이 발달하며 더욱 섹스와 폭력을 조장한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인터넷이 우리 사회에 진정한 평화와 평안을 가져온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과학과 평화는 별개의 것입니다. 여하간 지금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즉시 인터넷에서 성 사이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단지 클릭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순간에 간음은 질펀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각종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원하기만 하면 게임을 통해 얼마나 많은 건물과 사람을 파괴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한 도시가 완전히 쑥밭이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요사이 이루어지는 전쟁은 이런 측면이 있습니다. 1990년대 초에 있었던 미국과 이라크 간에 전쟁시에 세계인들은 CNN을 통해 생방송되는 전쟁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컴퓨터 게임을 보는 듯 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지금 미국이 이라크에 전쟁을 선언하고 미사일을 바그다드에 발사했습니다. CNN은 어김없이 이번에도 생중계하고 있습니다. 지상군끼리 근거리에서 소총으로 총알을 주고받거나, 그러다 마지막에는 백병전을 통해 승부가 결정되는 그런 전쟁의 개념이 아닙니다. 첨단 무기를 가지고 멀리서 버튼을 누르는 것입니다. 마음에 적군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면 버튼을 누르면 되고 그러면 즉시 실행되어 적군은 비참한 최후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터넷이 처음 보급될 때 채팅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채팅을 하다 재미가 없으면 상대방은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냥 떠나버리는 것을 종종 겪게 됩니다. 그 때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만드실 수 있으셨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는 도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언제든 공간이동을 하게 되어 많은 무례를 범하게 된다. 우리는 할 능력만 있다면 즉시 살인도 할 것이고 간음도 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하신 물리적인 제한 때문에 우리의 죄성이 그대로 발현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리적인 제한을 가하신 것은 우리에 대한 배려이고, 우리를 통제하는 수단이다. 첨단 과학일수록 더욱 요구되는 것은 정직과 절제와 같은 도덕성이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구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정신의 자유라는 것이 인간 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보장됩니다. 마음속으로는 무엇을 생각하든 통제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도 파악이 되고,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도 죄가 됩니다. 첨단의 세계에서는 그 생각이 즉시 행동화될 수 있기 때문이고,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서도 시간이 걸릴 뿐이지 악한 생각이 행동으로 구체화되는 것을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미워하여 노하고 욕을 하는 것은 살인과 같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이미 간음을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맨처음의 조그마한 생각거리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나비효과에서 본 바와 같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날지 모르고, 어떤 파괴력으로 나타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도덕적 견실과 결백함의 정도는 이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미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찰나의 생각과 동기에 있어서까지 절대무구의 상태에 이르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바이고, 율법이 추구하는 바입니다. 마태복음 5장은 살인과 간음을 언급했지만, 이것은 살인과 간음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 적용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 3:10을 보십시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은 어떤 율법은 잘 지키지만 다른 율법은 매우 약합니다. 간음과 같은 성의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절제된 사람이 질투와 시기에 있어서는 매우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각 사람마다 특히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항상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새벽과 오전에는 보다 경건한 편입니다. 하지만 해가 지는 저녁이 되면 음탕한 생각이 나고 각종 범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또 계절적인 영향도 있습니다. 생체 리듬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모든 율법을 다 지킬 듯 경건한 상태가 유지되고 절제가 잘 되지만, 어떤 때는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여 어처구니없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교도소에 들어가는 범죄자들이 항상 악한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에는 일반인보다 더 착하고 온순하지만, 순간적인 충동에 있어서 일반인보다 잘 억제하지 못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보다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절대적으로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것은 좋은 자세이지만, 결국은 미세한 바람에 잎새는 이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은 모두 죄인인 것입니다.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지 않는 자가 누구입니까? 전 인생에 걸쳐 그렇게 산 자가 있습니까? 사람은 아주 어리거나 아니면 아주 늙거나 해야 겨우 간음을 멈출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서나마 겨우 간음을 멈추는 것이지, 육체적으로 건강한 상태에서 마음에 간음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간음뿐입니까? 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으로 사람에 대하여 분노를 품지 않는 자가 누구이며 욕을 하지 않는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나비효과라는 측면에서 볼 때 실제로 언제든 살인을 한 자이고 간음을 한 자입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람은 죄인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킬 수 없는데, 어떻게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이어지는 갈라디아서 3:11절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사람은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로와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인해 의로와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와질 수 없음을 알고 다른 도움이 필요한 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도움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사람의 죄값을 대신 지는 형태로 이루어졌음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모든 것이 거저 우리를 사랑하여 아무 대가 없이 모두 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아무리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어도 믿음이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결백증으로 고생을 하고 심지어 자살에 이릅니까? 상대방에게 끼친 실례와 손해를 깊이 생각하게 되면 상대방에게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몸둘 바를 모르게 됩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죄책감으로 자살에 이르기도 합니다. 손을 자주 씻는 사람이 있습니다. 음식물을 씻을 때도 흐르는 수돗물에 오래 동안 씻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청결과 순수는 추구하고자 하면 끝이 없는 대상들입니다. 손을 자주 씻으면 씻을수록 더 자주 씻고 싶은 충동을 느낄 뿐입니다. 어느 적당한 선에 머물며 만족해야지, 끝까지 추구하고자 하면 사람은 절대로 제명대로 살지 못합니다. 소수점 여섯 자리까지 추구해도 나비효과에 의하여 엄청난 결과를 몰고 올 뿐인데, 이 모든 것을 의식하며 사는 삶이 정상적인 삶이 되겠습니까? 너무 의로와지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그만 날개를 접고 쉬시기 바랍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기 위하여 언제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는지 두 둔을 부릎뜨고 응시하는 일이랑은 이제 그만 두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동안에는 항상 잎새에 이는 바람은 불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몸과 음식물은 오염되기 마련입니다. 모든 예민한 몸짓은 그만두고, 이제 그만 손을 내밀어 하나님이 내미시는 손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어쩔 수 없는 이런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며 죄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우리가 지은 죄, 현재에 우리가 짖는 죄, 그리고 우리가 미래에 지을 허다한 죄 모두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과 같은 그 미세한 죄까지도 다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모든 바람을 재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를 완벽하게 의롭게 만드시려고 사람이 되어 죽으신 하나님의 희생에 대한 신뢰입니다. 사람은 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폼 잡고 거룩한 척 해도 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만 피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품안에서만 날개를 접고 쉴 수 있습니다. 모든 예민함을 버릴 수 있고 결백증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사랑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받아 의로와진 상태에서 이 시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처럼 의로와졌으니 이제 정말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민감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민감함은 처음의 민감함과 결백증과 달리 순간 순간을 즐기는 민감함입니다. 나의 진보를 맛보며 더 성숙함을 위하여 한발 전진하는 그런 민감함입니다. 여러분도 초대합니다. 실패가 없는 승리가 보장되는 민감함의 세계로 말입니다. 같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편안함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지 않겠습니까? 오늘밤에도 별은 바람에 스치웁니다. 바람에 스치우는 별은 얼마나 슬픕니까? 그 슬픔을 하나님을 인해 의로와짐으로 넉넉히 극복하며 오히려 즐겨야하지 않겠습니까? 같이 그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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