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각 스님의 만행"이란 책을 읽고: 2004년 9월 16일 작성 | 정요석 | 2017-03-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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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홈페이지에도 나와 있는 CBS의 새롭게하소서 대담 내용 중에 빠진 것이 있습니다. 제가 그 때 출연하여 현각 스님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거든요.그런데 그 부분은 빠져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현각 스님을 칭찬하는 내용은 아니었기 때문에 혹 종교간 비방으로 비쳐질까보아 방송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제가 가슴 쪽에 설치된 작은 마이크를 손으로 쳐서 듣기 싫은 큰 소리가 났는데,현각 스님을 언급한 부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생략했는지 모르고요. 현각 스님은 저와 몇 가지 일치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단 법명이 같습니다. 제가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던 시절에 불교에서 청년회 회장까지 한 것 아시지요. 그 때 법명이 현각이었습니다. 법명이라는 것은 세례명 비슷한 것입니다. 또 나이가 비슷합니다. 현각 스님이 1964년인데, 저는 1963년입니다. 그런데 제가 호적에는 1964년으로 되어 있어 학교도 그에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사촌 중에 저와 동갑이 세 명이나 있는데 이들은 저보다 일년 일찍 들어가 저는 자연스럽게 1963년 또래들이 친구로도 많고, 1963년이 자연스러운 면이 많습니다. 여하간 현각 스님과 제가 초등학교 들어간 나이나 대학교 들어간 나이가 같습니다. 일찍부터 탐구심이 있었고 분석하고 따지기를 좋아한 점도 비슷합니다. 중학교 즈음부터 인생에 대하여 허무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비슷하고요. 다른 점이 있다라면, 저는 1989년 말에 하나님을 알아 허무를 극복했는데, 그분은 1989년 즈음에 본격적으로 불교에 입문을 하여 한국에 오고 그랬네요. 최근에 만행이라는 현각 스님이 쓴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간증집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성장 과정과 어떻게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는지 과정이 나옵니다. 현각 스님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 그 분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실례고, 제 발언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꽤 유명한 분입니다. 미국의 예일대와 하버드 대학원을 다닌 백인이 한국에 와서 중이 되었고 그것도 절의 주지까지 한다는 면이 벌써 큰 뉴스가 됩니다. 그래서 책을 접하기 전에 이이 그 분의 설법과 인터뷰 내용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이미 여러번 접했습니다. 그 때 제가 받은 느낌은 가벼움이었습니다. 서양인으로서 동양의 불교를 신비스러움으로 접하고 있다는 느낌이었고, 기독교에 대하여 큰 오해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면서 불교와 너무 쉽게 비교한다는 느낌이었고, 그래서 그가 어떤 점에서 헤매고 있는지 보였습니다. 제가 불교에 10년 동안 있으며 불교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아는 것도 영향을 미쳤고요. 책을 읽고 나서도 이러한 결론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각 스님에 대한 느낌은 변하게 되네요. 고등학교 이후부터 몹시 허무감에 시달렸던 저로서는 그의 생애에 대하여 동병상련을 느끼게 됩니다. 이 허무감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글도 매우 잘 썼습니다. 소설적 측면도 있어 읽기에 재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저도 간증집 비슷한 것을 쓰게 된다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책을 읽으며 다시금 확인하는 것은 불교와 기독교의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믿음"입니다. 이번 주 설교에서도 언급했는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이 주어지는 통로로, 우리의 결단이나 선택이 아닙니다. 요사이 기독교에서도 믿음에 대한 오해로 자꾸 결단과 선택으로 몰아가는데 매우 위험한 면이 있습니다. 그의 글 곳곳에 불교에 입문하여 이제 참선과 같은 수도를 통하여 불법을 깨칠 수 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한 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 고통의 본질에 대한 이 심오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 수많은 철학책,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던 종교는 나에게 해답을 주지 못했으므로 나 혼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 저도 불교에 있을 때 이러한 자세였습니다. 출가에 대하여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출가를 못하고 대학과 직장 생활을 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비겁자라는 의식 속에 살았습니다. 현각 스님은 철학도 전공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라는 유신론 실존주의자가 있습니다. 그를 좋아하면서도 마지막으로 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 부분도 역시 믿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믿음으로 사람이 스스로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현각 스님은 이 부분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가 자기에게 큰 영향을 끼쳤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자리는 믿음으로서, 자기는 거기에서 그의 한계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믿음이 없이도 진리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노력하면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는 불성을 볼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인식론 때문에 화두 같은 것을 붙잡고 씨름하고 공안이라는 것을 통하여 얼마나 인식하였는지 시험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계시"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매우 진지하게 생과 자연을 들여다보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중심에 이르러서는 미혹에 빠집니다. 마치 현대의 물리학이 물질이나 세포를 쪼개고 쪼갰더니 오히려 근원은 밝히지 못하고 미혹에 빠지듯이 말입니다. 다음에 이러한 내용을 더 정리하여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앞으로 책을 내게 될 "안다는 것"(가제)에 실릴지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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