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잔의 실수: 2003년 3월 11일 작성 | 정요석 | 2017-03-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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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시대를 진지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이 사회의 여러 부조리와 모순을 보며 개혁과 낙원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386이라고 지칭되는 세대에 속하여, 1980년대라는 척박한 때에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후일담 형식으로 문학을 비롯한 여러 매체가 이 시대에 대하여 많이 논하여 이제는 어느덧 진부해졌지만 저 자신에게는 많은 고민과 아픔과 좌절을 주며 대충 인생을 살지 못하도록 한 시대로 여전히 각인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 이후 자연스럽게 이 시대를 돌아보며 제가 가졌던 여러 상처와 회한을 어루만지고 보듬으며 치유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아마도 그 시대의 고민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적 고찰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도 여전한 시대의 부조리를 인하여 무척 힘들게 살고 말 것입니다.제목: 타잔의 실수 부제: 사자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나? 제가 어렸을 때는 tv에서 방영되던 타잔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약한 짐승들을 돌보며 사자와 같은 맹수와 싸워 물리치는 모습이나, 결정적인 위험에 쳐있을 때 '아아아......'라는 함성을 지르면, 거대한 코끼리들이 몰려와 구해주는 장면이 지금 생각해도 참 멋있습니다. tv에서 타잔이 인기가 있다보니 시중에 만화들이 여러 내용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tv에서 보았는지 아니면 만화에서 보았는지 정확한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타잔이 초식동물을 잡아먹으려는 사자와 싸움을 합니다. 그리고는 사자를 제압하면서 다시 한번 약한 초식동물을 잡아먹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위협을 합니다. 꼬리를 내린 사자는 배가 고픈데다 타잔에게 얻어 터져 더욱 힘이 빠진 상태로 총총히 돌아갑니다. 그 때는 이 장면을 보면서 타잔이 참으로 멋있다고 여겼고, 나도 타잔처럼 약한 사람을 돌보는 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커가면서 사자는 그럼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자는 초식동물이 아닙니다. 육식동물이라 고기를 먹어야만 소화를 시킬 수 있습니다. 그가 짐승을 잡아먹으려는 것은 사자의 뜻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성적으로 정해진 바입니다. 타잔이 사자를 물리쳐 초식동물을 보호하는 것은 멋있어 보이지만, 이것은 사자를 굶어죽이는 또 다른 행패입니다. 초식동물을 보호할지는 모르지만, 육식동물은 모두 씨를 말리는 엄청난 일입니다. tv에서 방영되는 동물의 세계를 보면 사자는 배가 부르면 짐승을 잡아먹지 않습니다. 초식동물은 사자가 배부른 것을 알면 그 앞에서도 유유히 풀을 뜯습니다. 사자가 사냥에 성공하는 확률은 높지 않다고 합니다. 10번을 시도하면 겨우 2,3번 성공한다고 합니다. 또 성공을 하는데는 다칠 위험도 많습니다. 초식동물의 뒷발에 채이기도 하고, 뿔에 받히기도 하고 찔리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사자는 약한 짐승이나 병에 걸린 짐승을 노리게 되고 그러면서 초식동물을 보다 건강하게 만드는 역할도 합니다. 단지 사람의 눈에 사자와 표범과 하이에네와 같은 강한 짐승들이 누우와 얼룩말과 영양 같은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것이 잔인하고 포악하게 보인다고 하여 육식동물을 한마디로 욕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초식동물과 같이 온순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들의 소화기관과 장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들이 풀과 잎사귀를 뜯어 먹어도 맛있게 소화시킬 수 있는 구조를 만든 후에야 육식동물에게 잡아먹지 말라고 경고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없는 경고는 낭만에 휩싸인 자의 철없는 처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살던 집 주위에 봄이 되면서 공사가 몇 달 간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요사이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게 될 때에 주위 집들의 주문 사항과 감시가 매우 엄격합니다. 일조권, 조망권 등이 법적으로 옳아 구청에서 건축 허가를 내주어도, 자기네 보다 신축 건물이 높이 올라가면 반대하고 집단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집 뒤쪽으로 있는 집 하나가 공사를 하며, 인부들이 부주의했는지 주위 집들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집을 부수면서 중장비가 주변 집들을 건드려 물리적 타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러자 우리 집을 비롯해 주변 집들은 공사업자에게 항의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 항의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진행하는 것입니다. 몇 번을 적당한 대처를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매번 무시하며 공사를 강행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이런 일을 전문으로 처리하는 회사에 연락이 닿았고, 그 회사는 즉시 담당자들을 보냈는데, 처음 보자마자 소위 말하는 조폭(조직 폭력배)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머리를 짧게 깍고, 어깨가 떡 벌어지고, 조폭들이 입는 밑이 줄어드는 바지를 입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구청에 신고하여 즉시 공사를 중지시키도록 하고, 공사 업자를 만나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나타자마자 공사업자는 즉시 수그러들고 낮은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리곤 이틀만엔가 주변집들에게 보상을 해주도록 협상을 끝냈습니다. 물론 이들은 보상금의 일부를 수고비로 챙겨갔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조폭을 거느린 그 회사가 공사업자와 주변 집들에게 일종의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공사 배상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도 있었지만 그들이 갖는 위압감으로 공사업자로 하여금 즉시 협상에 임하도록 하여 적절한 보상금을 받아낸 것입니다. 공사업자 편에서는 주민들의 계속된 민원을 차단하고, 일정한 액수로 보상을 끝내고 공사를 계속 진행하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보다 조폭의 존재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앞집에서 공사를 할 때입니다. 주변 집들은 모두 2층이었습니다. 그런데 5층으로 연립을 짓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변집들이 모두 반대를 했습니다. 특히 옆집에 있는 아저씨가 발을 벗고 나서서 반대를 했습니다. 구청에 가서 어떻게 이런 건축 허가가 있을 수 있느냐며 문의하고 항의했지만 구청은 합법적인 건축 신청이라 건축 허가를 내줄 수밖에 없고, 지금도 공사 중지 명령을 내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주변집들을 모두 돌아다니며 이름과 주소와 도장을 받았고, 우리 집도 서명을 했습니다. 그 아저씨는 서명을 받은 것을 구청에 집단 민원으로 신청을 했습니다. 그래도 구청에서는 합법적인 신청에 대해 자기들은 어떤 법적 조치를 내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변 동네분들은 그 아저씨를 중심으로 실력 행사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집은 구청에서 허가한 합법적인 내용에 실력행사를 하는 것은 법에서 금한 사항이고, 집단이기의 성격이 있으므로 동참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특히 목사인 집이 그렇게 하는 것은 덕이 되지 않고, 조금 손해보면서 사는 것이 옳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이런 결정을 내려도 주위 사람들이 혼자 착한 척 하며 빠진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처신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실력행사는 콘크리트 타설을 할 때 이루어졌습니다. 콘크리트를 실은 레미콘 차가 들어올 때 입구에 자동차를 세우고 못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소리가 났습니다. 심한 욕이 들리며 몽둥이를 휘두르는 소리가 나고 도망가고 쫓는 소리가 났습니다. 놀라서 밖에 나가보니 한눈에 조폭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검은 옷을 입은 건장한 40대 아저씨가 몽둥이를 들고 옆집 아저씨를 그만 두지 않겠다며 심한 욕을 큰 소리로 하면서 위협을 하는 것입니다. 공사업자는 그런 조폭을 말리는 척 합니다. 한눈에 보아도 서로 짜고 하는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효과가 있어서 옆집 아저씨는 험한 꼴을 보았다는 느낌인지 수그러들었습니다. 그 가족들은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차가 왔습니다. 경찰은 옆집 아저씨와 그 조폭을 경찰서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 콘크리트 타설은 이루어졌습니다. 공사업자는 옆집 아저씨가 차로 레미콘 차를 가로막고 실력행사를 할 때 조폭을 통한 해결을 택한 것입니다. 콘크리트를 하다 중지하면 경제적으로 큰 손해가 나고, 그 옆집 아저씨와 협상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청은 어떻게 중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경찰서에 간 그 조폭은 공사업자를 친한 동생처럼 여기는데 동네 사람이 공사를 방해한다고 하여 왔다가 흥분하여 자기도 모르게 그런 행위를 했다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경찰서는 다시는 공사 현장에 나오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훈방 조치했습니다. 그후에 공사업자와 그 아저씨간에 어떤 합의가 이루어졌는지 공사는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5층까지 잘 이루어졌습니다. 나중에 보니 옆집 아저씨를 비롯해 주변 집들은 이렇게 저렇게 보상을 받았습니다. 안테나 설치를 해준다든지 주변 담에 칠을 해준다든지 그리고 들리는 말로는 금전적인 보상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아무 반대도 하지 않고 항상 웃는 낯으로 대한 우리 집만 아무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5층 공사가 끝나고 보니 걱정했던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주변이 더 좋아졌습니다. 조망은 다소 나빠졌지만 골목이 더 넓어져 차를 대기가 너무 편리해졌습니다. 굉장히 넓은 느낌입니다. 5층이라고 해도 3층, 4층, 5층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져 위압감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5층이란 생각에 무조건 반대하고 본 것입니다. 이 일에서도 조폭이 문제 해결에 끼친 역할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법으로는 합법적인 건축 허가지만 주변 주민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문제여서 구청도 어떻게 중재를 하지 못하고, 주민들은 실력행사라는 최후의 방법을 택하고, 경찰도 어느 편을 들지 못하고 당사자들간에 해결하라는 문제를, 조폭이 개입하여 단숨에 해결한 것입니다. 물론 이 해결이 바람직한 해결은 아닙니다. 서로가 양보하여 적절한 결정을 보아야 하지만, 이것은 이상론입니다. 공사업자와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도덕에 있어서 이상적인 분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해 사람이면 일반적으로 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조폭이 나쁘다고 해서 조폭이 나타나는 순간 경찰에서 잠복 근무를 했다 즉시 잡아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콘크리트 차를 가로막고 실력행사를 하는 동네 사람들과, 어떻게든 공사를 강행해야 하는 공사업자 간의 대치는 어떻게 해결이 되는 것입니까? 서로의 자존심 싸움과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세 대결 때문에 계속해서 대치하는 형국이 될 것입니다. 구청도 경찰도 어떻게 손을 써보지 못합니다. 법으로는 공사업자가 맞지만 집단 민원도 쉽게 무시할 수 없어 서로간에 중재하라는 말만 할 뿐 그냥 지켜볼 뿐입니다. 누군가 양보하는 미덕이 발생하지 않는 한 뚜렷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렇게 이기심으로 팽배한 사회에서는 조폭과 같은 존재가 필요악이 되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자가 소화기관이 바뀌지 않고는 계속해서 자기보다 약한 짐승을 잡아먹으며 살아야 하고, 그것이 초식동물을 결과적으로는 건강하게 만들고, 너무 번식하지 않도록 만들듯이 말입니다. 사자는 죄가 없습니다. 사자는 짐승을 잡아먹어야만 살게 되어 있습니다. 죄라면 육식동물로 태어난 것이 죄입니다. 타잔은 눈에 보이는 값싼 동정으로 사자로 짐승을 못 잡아먹게 했지만, 그의 행위는 큰 재앙을 불러 올 수도 있습니다. 먹이 평형이 깨지는 것입니다. 타잔이 동물을 잡아먹지 못하게 해서 끝내 사자는 모두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초식동물들은 무수하게 번식을 합니다. 약한 짐승들도 늙은 짐승들도 죽지 않고 제 명대로 끝까지 살며 무수한 후손을 번식시킵니다. 너무나 번식이 되어 땅에 있는 플과 나무의 잎사귀들은 모두 뜯기어 없어졌습니다. 물을 비롯한 환경은 고갈되고 오염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염병이 번지고, 끝내는 풀이 없어 초식동물 대부분이 아사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타잔은 순간의 값싼 동정에 의한 판단으로 대부분의 초식동물을 굶어죽게 하는 큰 실수를 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요? 이사야 11:4-9절입니다.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4-9) 하나님은 사자로 약한 동물을 못 잡아먹게 하여 굶어죽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처럼 풀을 먹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데, 소를 잡아먹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호랑이는 토끼를 사냥하는데도 온 정성을 기울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자가 부상과 실패의 위험을 무릎쓰고도 사냥을 하는 것은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서입니다. 소가 풀을 뜯는 행위와 똑같은 것이 사자가 사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풀이 고기보다 훨씬 맛있습니다. 아니 이제 고기는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냥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 순간부터 사자는 소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육식 동물의 신체 구조가 바뀌어 버리는 그 순간에 모든 짐승은 서로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무 손상을 입지 않습니다. 짐승들은 소화 기구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감과 공격성도 변화하여 그 마음에 평화가 가득합니다. 그 날이 되면 사람 또한 변화를 받습니다. 사람 또한 짐승 같이 인체 구조가 변하고, 그 마음이 변화하여 선인이 됩니다. 상대방을 최대한 배려하고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여 아무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다스리는 법과 조직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합니다. 절차가 복잡하여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세상 법으로 악인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입니다.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세상에는 변화가 가능합니다. 더 훌륭한 대통령이 나온다고 세상에 본질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대통령이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 집 주변에 발생한 민원과 실력행사와 공사강행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조폭이 활동할 공간은 어디나 존재하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필요악으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20세기에 소련과 중국을 비롯하여 공산주의 열풍이 불었습니다. 차별이 없는 인간 사회가 탄생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반대로 확인되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은 교육을 시켜도 그 마음속에 있는 죄성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생산력이 발달하여 풍성한 생산이 이루어지고, 자아비판과 타아비판과 엄청난 사상 학습을 받으면 사람의 내면이 바뀌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고귀한 내면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필요는 끝이 없었고, 사적인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 한 능력은 최소화되었습니다. 공산주의만큰 사상 교육을 강조하는 곳이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어 공산주의에 맞는 인간상으로 개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갈수록 게을러지고, 놀기만 하려하여 공산사회의 생산력은 갈수록 떨어졌고, 그 도덕성도 갈수록 떨어졌습니다. 저는 1993년에 러시아 지방 정부의 토지 개혁에 참여하여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국유화된 러시아의 토지를 사유화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지방 정부의 관청에 출근하여 통역자와 몇 명의 직원을 데리고 일을 했습니다. 그 때 그들의 일하는 자세와 전체적인 생산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볼 때 한 사람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5명이 나누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을 합니다. 티 타임을 갖고 수시로 대화를 나누며 일을 합니다. 화장실에 가보았습니다. 깨끗이 청소는 되어 있었지만 제대로 짝을 갖춘 변기가 없었습니다. 공공시설의 기구를 많이 훔쳐간 것입니다. 관청이라 그나마 청소라도 되어 있지 다른 곳은 청소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차들이 갑자기 서더니 윈도우 브러쉬를 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훔쳐 가기 때문에 차안에 두고, 비가 오면 이렇게 다는 것입니다. 그 때 제가 노트북보다 조금 더 큰 랩탑이란 컴퓨터와 잉크젯 프린터기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관청에 있는 사람들이 개인이 컴퓨터를 소장하여 갖고 다닌다며 구경하러 왔습니다. 이것이 인공위성을 쏘아대는 러시아의 현실이었습니다. 저는 한 때 공동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국내의 공동체도 돌아다녀 보고, 한 공동체에서 오래동안 일도 했습니다. 제가 공동체를 돌아다녀 보고 실제로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공동체에는 공동체성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공동체를 하러 온다는 것입니다. 이미 가정과 사회에서 공동체성이 없어 소외된 사람들이 공동체를 한다는 곳에 오면 위로를 받을까 하여 생활하러 오는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성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실제로 공동체들은 그렇게 원활하게 운영이 잘 되지는 않습니다. 화장실을 비롯한 공공으로 쓰는 장소와 물건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본 더러움과 정돈되지 않음의 현상도 일부의 공동체에서는 강하게 확인됩니다. 그러면 평범한 일반 성도들이 모인 기독 단체들은 어떨까요? 기독 운동이나 선교를 하는 많은 단체들이 있는데 이들도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까 분위기도 좋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사랑할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의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기독 단체이기 때무에 이상이 높습니다.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높습니다. 그래서 일반 단체 같으면 그냥 넘어갈 일도 기독인의 높은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서 구성원간에 쌓이는 감정이 많아지고 그러다보니 겉으로는 잘 표현되지 않지만 안으로 곪은 경우가 많게 됩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실수를 하지 말고 원망들을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인은 술을 먹지 않기 때문에 한번 마음이 상하면 잊어버리지 않고 평생 간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독 단체가 일반 단체보다도 더 못하고, 기독 공동체도 문제 투성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평균적으로는 일반 단체보다 낫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만큼 그렇게 사랑과 이해와 양보가 넘쳐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의 내면은 부패하여 있고 쉽게 해독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이사야에 있는 것처럼 완전한 변화가 없는 한은 사람이 만든 세계는 거기서 거기라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물리적으로 이 천지가 변화해야 하고, 물리적으로 사람의 구조와 마음이 변화해야 합니다. 이 일이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변화가 있는 것이지, 다른 것들은 단지 그것의 일부만을 잠시 보여줄 뿐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17-19)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열심히 일을 해야만 소산물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원래 흙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도록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도 식물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생산력의 증진은 과학에 있지 않습니다. 땅 자체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어찌 땅 뿐이겠습니까? 대기와 햇빛과 물의 변화도 있어야 합니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성장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필요한 요소가 이산화탄소와 햇빛과 물입니다. 우리는 지금 광합성만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천지를 바꾸실 때는 광합성이 아닌 다른 형태로 식물의 성장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물 자체가 변화하고 이산화탄소가 변화하고 햇빛의 성분이 변화하므로 식물의 성장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 모릅니다. 설령 계속 광합성 같은 형태로 이루어질지라도 그 때의 광합성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차원일 것입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생산력이 저조한데 사람이 무한정 양보하며 상대방이 최대한 가져가도록 하겠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 사흘을 굶으면 새벽에 밥을 가장 먼저 하는 집이 어떤 집인지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상대방에게 먼저 먹으라며 또 다시 며칠을 굶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생산력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사람은 덕스러운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생산력이 발달하여 갖고 싶은 것을 무한정 갖게 된다고 해도 사람에게는 행복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아야 할 의미가 없어지므로 게을러지고 무기력해지고 허무에 빠져 자살이 속출할지 모릅니다. 사람 자체도 변화해야 합니다. 선이 무엇인 줄 아는 지식과 지혜가 있어야 하고, 이것을 추구하는 삶을 최대의 덕으로 아는 정신 상태와 마음가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해보는 모든 시도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땅 자체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대부분은 타잔과 같이 죄없는 사자만을 족치는 경우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일하셔서 본질적인 변화를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만드시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만드는 사람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 나라를 넓히자",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자"라는 말을 듣고 씁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표현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볼 수 있는 표현들은 하나님 나라가 "온다"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주신다" 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편에서는 이것을 받고 들어갈 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만드셔서 주시는 것을 우리는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 들어갈 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데 있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본질적으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넓히자",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자"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드시는 그 나라를 사모하며, 그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이 땅에 반영하기 위하여 우리가 노력할 때, 우리는 이 말을 쓸 수 있다고 봅니다. 그 나라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또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것입니다. 또 그 나라는 공의와 정직과 성실로 다스려지고, 이러한 품성으로 사람들이 가득찰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 땅에 반영하기 위하여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넓히자",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자"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런 나라가 완전히 현실화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다만 노력할 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사는 자이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이 땅에서도 노력할 뿐입니다. 타잔의 실수를 범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으며,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그래서 우리에게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있는 줄로 알고 즐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따라 아내가 아이들을 위해 타잔 비디오를 빌려왔습니다. 오래 전 비디오라 5백원에 빌렸습니다. 타잔은 이 비디오에서도 위험에 처하면 "아아아......"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역시 코끼리는 이번에도 예외없이 달려옵니다. 저녁에 아이들과 "아아아......" 하며 놀았습니다. 코끼리만 타잔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음성을 듣는다는 생각이 그 때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습니다. 하나님은 몸소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여야 하는지 가르쳐주셨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오직 이 나라만이 임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큰 기도이지 않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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