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2003년 3월 10일 작성 | 정요석 | 2017-03-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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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우유로 기억되는데 광고 CF에서 천진한 어린 아이의 웃음 소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시절에는 그 웃음 소리에서도 어떤 슬픔을 느꼈습니다. 이러니 유치환의 깃발이라는 시를 보고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느끼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하도 마음이 미어지게 하고 허무로 가득차게 하는 시였던지라, 이 시에 보복하는 마음에서 글을 써보았습니다. 동시에 저와 달리 극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애달픈 마음에 사로잡혀 인생을 접은 유치환 시인의 처지에 깊은 동정을 보내기도 합니다. 제목: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부제: 누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공중에 다나요? 전철역 같은데 보면 시를 써놓지 않습니까? 유치환 시인의 시도 보게 됩니다.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 쉽다는 것입니다. 꼭 그의 시만이 아니라, 명시로 널리 알려진 시들은 모두 쉬운 듯 합니다. 아무리 깊은 사상과 감정을 담고 있어도 쉽지 않으면 공감을 못 얻는 듯 합니다. "그리움"이란 청마의 시도 읽으면 쭉 이해되고, 마음은 바로 감동을 받아 어느덧 그리움에 젖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청마 유치환의 시에는 그리움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는 느낌도 드네요. 밑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시에도 "그리움"과는 다른 그리움이지만 역시 애닯은 그리움이 있습니다. 깃 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야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시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깃발은 펄럭이며 무엇을 향하여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르고 있을까요? 그것은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입니다. 나로 저 푸른 해원에 도달케 해달라는 강한 몸부림이고 절규입니다. 저 푸른 해원! 이것은 시인 유치환이 꿈꾸고 그리고 있는 이상향일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고, 진리의 바다입니다. 인간이기에 도달할 수 없는, 땅에 발 딛고 있는 직립동물이기에 가 볼 수 없는 진리의 세계입니다. 그것에 대한 목마른 그리움을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지르기에, 깃발의 펄럭임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허공에서 나부끼는 깃발은, 단순히 깃발이 나부끼는 것이 아니고, 순정이 물결같이 나부끼는 것입니다. 순정이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낄 때, 애수는 백로의 날개처럼 하얗고 넓은 슬픔을 펴고 맙니다. 슬픔을 뚝뚝 떨어뜨리며 하얀 날개를 편 백로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 슬픔으로 깃발은 나부끼는 것입니다. 그 깃발은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매달려 있지만, 그 맑고 곧음만으로는 깃발에게 자유와 초월이 없습니다. 오히려 맑고 곧은 이념에 매달려 있기에, 더욱 해원을 향하여 그리움은 뻗어나가는지 모릅니다.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산정 위의 얼어붙은 그 표범처럼, 더 높은 곳을 향한 그리움입니다. 언제나 높은 하늘이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푯대 끝에 매달린 깃발입니다. 끝없이 비상하며 백로처럼 날개를 펴지만, 멀리 날지 못하고 깃대를 인해 다시 돌아와야 하는 시지프스의 비극입니다. 아아 누구입니까?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말입니다. 청마 유치환입니까? 아마도 그러겠지요. 허한 넓은 공중에 한폭의 깃발의 나부낌에서 이런 슬프고도 애닯음을 맨 처음 본 이는 그일테니까요. 하지만 그만 깃발에서 영원한 동경을 느낀 것은 아닙니다. 땅에 발 딛고 사는 사람이면 모두가, 영원하고 무한한 하늘을 그리워하였고,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중력이란 것! 인간을 끝없이 땅의 중심으로 붙들어 매는 그 중력이란 것. 이런 세속의 중력에서 벗어나 한치라도, 조금이라도 하늘로 도달하고 싶은 인간은 모두 백로처럼 날개를 펴는 애수를 보았습니다. 깃발은 바람에 나부끼되, 반드시 푯대에 매달려 있어야 합니다. 하늘로 오르고 싶고, 저 푸른 해원에 닿고 싶지만, 푯대를 벗어나는 순간 깃발은 더 이상 깃발이 아닙니다. 중력을 벗어나 하늘에 이르고 싶지만, 사람은 땅을 벗어나는 순간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고 언제 땅으로 다시 큰 충격과 함께 떨어질지 모릅니다. 하늘에 닿고 싶지만, 그래도 땅에 발을 딛어야만 하는 인간의 비극입니다. 바람은 깃발을 흔들리게 하여 힘을 주고 충동을 주어, 해원을 향한 그리움을 뻗치게 하지만, 동시에 이로 인해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폅니다. 바람은 깃발에게 자극이자 한계이고, 탄생이자 죽음이 됩니다. 저는 이 시를 보면서 니고데모가 떠올랐습니다. 진지한 노스탈쟈를 가졌지만, 폿대에 묶이어 한 치도 공중과 해원으로 치닫지 못하는 깃발과 같이, 니고데모는 진리에 대한 진지함을 가졌지만 그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이로서 바로 연상되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1-8)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보면 진리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고 이스라엘의 선생입니다. 신분상으로도 이스라엘 사회에서 검증이 된 자이고, 학문과 지식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의 선생이란 칭호를 들을 만큼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 자가 불학무식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보면, 외형적인 배움보다도 진리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자기의 신분 때문에 낮에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방문하지 못하고, 밤에 방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는 예수님을 통해 진리를 얻고자 방문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는 자입니다. 바리새인인지라 구약의 율법을 모두 지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자기의 의지와 힘으로 태어나는 자가 있습니까? 태어나는 것은 태어남을 받는 것입니다. 본인의 의지와 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능동이 아니라 수동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도 능동이 아니라 수동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보도록 거듭 나는 자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이해하는 니고데모의 관점이 재미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철저히 물리적 관점에 충실한 자의 대답입니다. 영적인 관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거듭 난다는 것을,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풀어서 설명하신 것입니다. 거듭 나는 것을 사람이 다시 모태에 들어가는 육적인 관점이 아니라 영적인 관점에서 보라고 거듭 말씀하시며,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설령 니고데모의 말처럼, 사람이 두 번째로 모태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이 아니라 육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덧붙입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는 지금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 기이하게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바람을 예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우리는 바람이 부는 것을 소리를 통해 알 수 있고, 펄럭이는 깃발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바람이 우리 몸에 닿으면 감촉이 있지만 그래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난 사람이 바로 이와 같이, 어떻게 무엇을 통하여 났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태에 있는 아이가 10개월이 되면 밖으로 나오는데 우리가 그 과정을 정확히 압니까? 과학의 발달로 아는 것 같지만 일부분 조금 더 아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부인과가 의사들의 오진이 가장 많은 과중의 하나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만큼 태아의 자라남과 출산은 신비 속에 아직도 많이 감추어져 있고, 정확히 그 과정과 현상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병원에 가서 아이를 낳지 말고 집에서 낳자고 합니다. 조물주께서 집에서 낳아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며, 의술이 실제로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전도서 11:5절을 보면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합니다. 바람의 길이 어떠한지를 모르고, 태아의 뼈가 어떻게 자라는 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뱃 속에서 태아의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영으로 거듭나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시대를 넘어 각광받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아는 바와 모르는 바를 구분만 해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아무리 숙고해도 자기 수준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 소크라테스는 그 누구보다 자기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숙고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하여 그가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난다는 측면에서 생각을 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므로 니고데모는 "도대체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일까? 육으로 난다는 것은 무엇이고, 영으로 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거듭남"의 측면에서 생각을 하지만, 과연 소크라테스가 이런 사고를 할까요?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거듭난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이런 사고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통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알도록 가르쳤다는데, 지금 예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범주에서 그런 것을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범주에서 그렇게 하십니다. 진리의 관점에서 그렇게 하십니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사고가 깊어도 그는 땅의 일만을 말할 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적은 일부만을 깨닫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람을 통하여 성령으로 나는 차원만 말하여도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만물과 사람 자체를 빗대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도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이 땅에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어찌 우리가 이해하겠습니까? 진리에 대한 일부를 자연이 비유로서 나타내는데, 자연이 비유하고 있지 않은 하늘나라의 일을 말한다면 우리가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4-17) 성령으로 나는 것에 대해 계속 설명하시며,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다는 것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였을 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잘못을 깨닫고 모세에게 이 뱀들이 떠나게 기도해달라고 당부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합니다. 물린 자마다 이것을 보면 살아나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상기시키며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뱀에게 물린 자들에게 구원을 제시하였습니다. 놋뱀을 만들고 장대에 달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신 후에 놋뱀을 높이 들도록 하셨습니다. 모세는 구원의 내용이 여기에 있음을 널리 보인 것입니다. 이것처럼 예수님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장대에 달린 뱀처럼 높이 들리어 사람들이 보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뱀에게 물린 자들이 살아날 수 있는 내용과 방법을 모세가 높이 들어 보여준 것처럼, 예수님 또한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신 후에 그들에게 그 구원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자가 사는 것처럼, 분명하게 제시된 예수님을 인정하는 자가 살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장대에 놋뱀을 달고서 이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때 일부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뱀에게 물린 이유가 하나님에게 원망하고 불평한 죄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뱀에게 물린 자기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통해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들게 하신 것도 알았습니다. 이들은, 그것만 쳐다보면 사는 것을 알기에, 이에 대한 믿음으로 놋뱀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부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왜 뱀에게 물렸는지도 모르고, 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서 쳐다보라고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재수없게 뱀에게 물렸고, 이런 자기들을 치료할 생각은 않고 놋뱀이나 만들어 장대에 다는 모세가 미신을 조장하는 어리석은 자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재수없음을 한탄하고 미신이나 조장하는 모세를 욕하며 죽어갔습니다. 그 중 일부는 고통 중에 울부짖으며 몸을 비비꼬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장대에 달린 뱀을 보았습니다. 이런 자는 어떻게 될까요? 장대에 달린 뱀을 보았으니 살아날까요? 살아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이 장대를 쳐다보는 자는 살아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제시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건성으로 안다고 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아는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들리어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이루어놓으신 구원을, 믿고 받아 영생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3:16절입니다. 가장 유명한 성경구절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노래로도 만들어졌고, 신약 성경의 주제 말씀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를 하나님이 선하게 보실 이유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하신 이유 하나로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을 모두 예비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독생자를 주시며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믿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어, 예수님을 높이 들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예수님을 알고 인정하면 됩니다. 모세가 뱀을 들었을 때 그것을 쳐다보는 자마다 산 것처럼, 들린 예수님을 우리 또한 쳐다보아야 합니다. 저 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는 멸망이 없고 영생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그 자체로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 되지만, 예수님 당신은 이것을 위해 오신 것은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선이고, 사람은 절대 악인 것을 알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물이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듯, 성령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이렇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의 차원에서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나는 일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을 불게 하시듯, 성령을 주시어 거듭나게 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놀라운 일을 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밤중에 찾아온 유대인의 관원에게 왜 예수님은 이런 말을 하실까요? 그는 관원이므로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을 잘 다스릴까에 관심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오직 본질적인 것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본질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 근본에 잘 서면, 모든 것이 틀려집니다. 니고데모는 그 근본에 잘 섰기 때문에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에만 잘 서면 우리가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도 알게 됩니다. 구체적 방법에 먼저 관심을 가지면 순간은 잘 처리한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손해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면, 그런 부분이 성경에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서 실제의 생활에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것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깃발을 쓴 청마 유치환은 이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과 이 구원을 믿음을 통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푯대에 달린 깃발에게서 그렇게까지 진한 그리움과 애잔함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애수가 백로처럼 날개를 펴는 것도 못 볼 것입니다. 깃발은 깃발일 뿐입니다. 거기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관입니다. 성경의 전도서를 읽고 난 후에는, 그렇게 마음을 울리던 시들이 마치 김이 빠진 탄산음료 같이 느껴졌습니다. 죠나단 에드워즈가 "신앙과 정서"라는 책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신앙은 우리의 정서까지도 올곧게 형성하게 하십니다. 아내에게 제가 청년 시절에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는 낭만성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그런 흔적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 청년 시절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우울증의 증세도 있었다고 하니 더욱 놀라워합니다. 아내가 연애와 결혼 생활을 통하여 아는 제 모습은 안정됨과 일관됨입니다. 문학적인 면이 있되 감상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 자신도 언제부터인지 저에게서 변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쉽게 어떤 충동에 빠지지 않고, 마음 속에 이는 여러 감정을 올곧게 추스리며 통제하는 제 자신을 관찰한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며 발생한 부산물입니다. 여러 감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관심사와 시간을 보내는 내용도 상당히 변해 갑니다. 이제 유치환의 깃발과 같은 시를 읽어도 하나님을 알기 전에 느꼈던 그 마음의 시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그 때의 감정을 유추하여 깊이 생각하여야 떠오르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시와 같은 장르는 사상과 감정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상만 앞서면 논설문의 느낌이고, 감정만 앞서면 3류의 값싼 감정이 되고 맙니다. 시만 아니라 수필이나 소설에도 어느 정도 들어맞는 말이겠지요. 기독교인이 되어 신앙으로 감정이 정화되면 어떤 글이 될까요? 성경이 말하는 내용들로 사상을 이룰 터인데, 그것을 흐르는 감정은 어떻게 될까요? 신학 수업을 했으니 어쩌면 말할 수 있는 사상은 풍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감정입니다. 신앙을 통하여 정화된 감정을 어떻게 내용과 조화시켜야 할까요? 글을 읽고 나면 진리가 주는 떨림이 있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 그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백로가 애수처럼 날개를 펴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독수리처럼 하늘로 나는 그런 마음을 느끼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 것을 글에 다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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