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2003년 3월 27일 작성 | 정요석 | 2017-03-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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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만이 아니라 교회도, 그리고 제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너무 1등에만 관심을 두는 것 같아서 써 보았습니다. 최근에 인터넷을 하다 기독교 베스트 셀러들을 잘 파악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았습니다.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는 인간형으로 자신을 개조해야 하고,- 요셉과 같은 꿈꾸는 자가 되어- 다니엘이 썼던 학습법을 터득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야 하고,- 위대한 CEO였던 예수님을 본받아 사업에서도 번창해야 하며,- 그렇게 야베스처럼, 예레미야처럼 기도하며 자신의 지경을 넓혀가야 한다.- 그것이 신자의 특권이자 의무이자 본분이다....." 신앙의 참된 목표에 대한 감을 잃지 말아야 하는데, 사회속에서 살다보니 항상 영향을 받아 우리 마저도 1등을 되고 싶어합니다. 이 글이 그러한 우리의 죄성을 알고 다스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제목: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부제: 영원한 2등은 없다 1995년 3월로 기억됩니다. 저는 그 때 어느 장학단체에서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2년 간격으로 장학생을 선발했는데, 그 해에는 42명의 장학생을 선발하고, 3월에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첫 모임인지라 모두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장학생으로 뽑힌 이들답게 얼마나 재치와 유머와 그러면서도 자기에 대해 적절하게 표현을 하던지 참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삼성 그룹의 광고 카피를 싫어하고요..." 정말로 그 표현은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지향하는지 짧으면서도 핵심있게 잘 말해주었습니다. 그 후로 그 사람을 지켜보니 가치있는 삶을 위하여 과감한 결단과 선택을 하고, 사회의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사는 과정과 내용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 광고 문구를 볼 때마다 왠지 거부감이 있었는데 그 장학생의 말을 듣고 보니 더 명확해졌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KBS가 인간극장에서 탤런트 전주연씨 편을 방연한다는 광고를 보고서입니다. "영원한 2등은 없다"라는 소제목으로 전주연씨 편을 방송한다는 광고를 보면서, 순간 10년이 다 되어가는 그 일이 떠오른 것입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한동안 삼성 그룹은 그 광고를 tv와 신문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내용은 전화기를 처음 발명한 벨은 기억하지만, 그 보다 며칠 차이로 발명한 사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달에 처음 발을 디딘 암스트롱은 다 기억하지만, 2등으로 발을 밟은 사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선전 내용이 맞기는 맞는 것 같습니다. 벨과 암스트롱은 저도 그 이름을 이렇게 언급할 정도로 기억하지만, 두 번째로 전화를 발명하고 달에 발을 디딘 사람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 보니 말입니다. 삼성은 제일주의로 유명한 기업입니다. 진출한 사업마다 거의 일등을 놓치지 않고 있고, 다른 업체보다 몇 십 년 늦게 진출한 영역에서도 마침내 1등을 하고 맙니다. 저희 집만 살펴보아도 삼성 제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만 해도 여러 회사가 같은 제품을 만들 경우에, 일단 삼성 제품에 대해서는 신뢰를 느끼는 편입니다. 복잡하게 가격과 품질 등을 꼼꼼히 비교하고 싶지 않다면 삼성 제품 구입을 우선 고려하는 편입니다. 더군다나 삼성이 국내에서만 그런 대접을 받고, 외국 제품과 비교해서는 질이 떨어진다면 빛이 바라겠지만, 삼성은 반도체와 핸드폰을 비롯하여 여러 제품에서 이미 세계 1,2등을 다투고 있고, 세계 각지에서 우수한 품질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삼성은 이미 국내를 넘어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기업이고, 우리나라의 경제 향상에 큰 역할을 하는 업체입니다. 삼성을 인해 여러 분야에서 경쟁력이 강화되고, 세계화의 개념이 도입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삼성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이들은 얼마 없는 듯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광고도 삼성의 1등을 향한 순수한 노력과 집념과 열정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지,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어느 기업이 광고를 하면서 부정적인 내용을 일부러 심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광고는 본의 아니게 삼성의 그런 좋은 의도 이외에도, 삼성에게 있는 누군가에게 지지 않으려는 속성과, 1등을 위해서라면 적절치 않은 수단과 방법일지라도 택할 수 있다는 경향을 엿보게 합니다. 광고는 해당기업의 정신과 속성과 문화를 무의식적으로나마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 장학생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그 광고를 싫어했던 것은, 누구나 기억하는 1등이 되기 위하여 과정과 수단을 무시하고, 결과에 도움이 되는 내용만 채택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농구와 배구 중에서 어느 종목을 더 좋아하십니까? 둘 다 겨울 스포츠의 꽃으로 불려지며, 축구와 야구보다는 인기가 떨어지는 종목이지만, 그 다음 서열을 다투기에 짝을 지어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저는 배구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시원한 스파이크가 좋고, 그것을 막으려고 두 팔을 위로 쭉 뻗어 블로킹를 하는 것이 멋있고, 블로킹 된 공이 바닥에 스파이크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직선으로 떨어지는 반발력이 좋고, 스키 선수가 활주로를 가로질러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몸짓과 같이 백어택을 위해 비상하는 몸짓이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힘있고 강렬하며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배구를 좋아합니다. 또 다양한 타법으로 블로킹을 피하여 스파이크를 하려는 공격수와, 이것을 막으려는 수비수들의 머리 싸움에 상당한 변화와 진지함이 있어 배구를 좋아합니다. 수비수들이 관중석까지 좇아가 볼을 걷어올리는 집중력 또한 감동을 느끼게 하고, 수비수들을 교묘하게 따돌리는 세터의 볼 배급도 시원함을 느끼게 합니다. 손을 써야만 하는 경기인 줄 알았는데 가끔 발을 쭉 뻗어 흘러나가는 발을 걷어올릴 때 웃으며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좋아하는 이유는 배구 선수들은 농구 선수나 축구 선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립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기 코트에 넘어온 공을 시간에 상관없이 3번에 다시 넘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인 듯 합니다. 물론 공을 좇아다니고 스파이크 하려면 날쌘 순발력과 같은 스피드는 있어야하겠지만, 축구와 농구 같이 상대팀 선수들과 몸싸움을 하며 빠르게 공격하고 피해야하는 스피드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코트에서 자기 선수들과 호흡을 맞춰 경기를 하기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느긋해 보이고 신사라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경기가 끝난 후에 인터뷰하는 것을 보아도 농구선수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매우 빠르게 말을 합니다. 이에 비해 배구 선수들은 걷는 속도도 노리고 조금은 구부정한 자세로 어눌하게 천천히 말을 합니다. 심판의 판정에 대해 항의하는 선수들과 감독들도 농구처럼 그렇게 치열하지 않고 느립니다. 그러다 보니 배구를 중계하는 아나운서와 해설자도 느립니다. 배구의 이런 느림과 어눌함과 신사다움도 제가 배구를 좋아하는 큰 이유에 속합니다. 그래서 저는 농구와 배구를 동시에 tv에서 중계해주면 거의 배구를 봅니다. 느릿느릿 tv의 채널을 틀며, 느릿느릿 군것질을 하며 음료수를 마시며, 느림의 미학을 즐기면서 말입니다. 배구를 좋아하는 팬으로서 저는 삼성에게 할 말이 있는 편입니다. 삼성그룹에 배구팀이 있는데 이 팀이 너무 배구를 잘합니다. 올해도 겨울에 있었던 배구 시합에서 현대와 대한항공 같은 팀을 너무나 가볍게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한 번도 지지 않고 전승으로 우승을 했습니다. 이러기를 7년을 연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한 팀이 7년을 연속해서 우승하고, 그것도 전승으로 우승을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삼성이 우승하는 것은 큰 뉴스거리가 되지 않아도, 어느 한 팀에 지기만 하면 큰 뉴스거리가 되어 tv와 신문에 크게 보도됩니다. 삼성이 이렇게 된 배경은 우수한 선수를 많이 보유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싹쓸이를 했다는 표현을 쓰면서까지 비난을 합니다. 돈이 많은 기업인지라, 막강한 자본으로 우수 선수들을 다 데려간다는 것이지요. 김세진과 신진식 선수에 대해서 들어봤을 것입니다. 신진식 선수도 맨 처음엔 현대팀인가로 가기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삼성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삼성의 독주가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선수를 데리고 있어서인지 창단 첫 해부터 우승을 하였고, 그 이후에는 다른 우수 선수까지 스카웃하여 전력이 더 탄탄해지며 우승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삼성은 국가대표팀이라고도 불립니다. 국가대표팀을 구성하면 삼성 선수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6명의 선수가 배구 코트에 서는데 그중 5명이 삼성팀이라면 정말로 국가대표팀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렇게 우수 선수들이 삼성에 일방적으로 몰려있기 때문에, 다른 팀들과 시합을 하면 게임이 되지 않아 박진감이 떨어집니다. 경기 결과가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농구와 더불어 겨울스포츠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던 배구는 팬들의 관심을 잃어버리고, 배구 경기장은 너무 썰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해가 갈수록 삼성의 독주가 심화되며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삼성은 나름대로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우수 선수를 발굴하고 스카웃하는 것도 하나의 실력이지 않습니까? 우수한 선수들을 데려다가 조직화하여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도 감독의 능력이지 않습니까? 삼성을 인해 배구 선수들은 전반적으로 높은 연봉을 받는 것 아닙니까? 우수 선수를 스카웃하지 않으면 다른 팀에 빼앗겨 1등을 위협받는데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승을 하면 칭찬을 해주어야지 오히려 비난을 하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이 말들 또한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배구계 전반을 본다면 삼성은 다른 행보를 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수 선수를 스카웃하되 적당히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경기 결과가 뻔하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을 정도로 선수를 스카웃해야 했습니다. 상대 팀들도 전력이 강해져야 삼성 팀도 사는 것입니다. 팬들은 배구를 외면하고, tv는 시청률이 떨어진다고 배구 중계는 아예 포기해버리고, 스포츠뉴스는 배구 경기에 대한 뉴스를 후반부에 그것도 단신으로 경기 결과만을 잠시 보도하고, 삼성은 우승을 해도 칭찬은커녕 비난을 듣는다면, 삼성은 우승을 하면 할수록 잃는 것도 많은 것입니다. 7연속 우승과 무패 우승과 30연승 같은 1등만이 할 수 있는 대기록도 중요하지만, 넓은 아량의 2등도 멋있는 것입니다. 다른 팀들을 배려하여 과감히 우수 선수 스카웃을 포기하고, 그 결과로 한 해나 두 해 우승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이 때 삼성은 아마도 1등 할 때보다 더 많은 칭찬을 들을 것이고, 더 많은 팬들이 코트를 찾는 기쁨을 맛 볼 것이고, 스포츠 뉴스 시간에 앞 부분에서 자세히 경기 내용까지 설명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다음 해에 다시 우수 선수를 스카웃하여 1등을 되찾았다면 삼성은 칭찬을 많이 들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수 선수를 스카웃하지 않고 기존의 선수만으로 똘똘 뭉쳐 강훈련으로 1등을 쟁취해낸다면 거의 영웅시되는 분위기일 것입니다. 상대팀에 대한 배려와 배구계 전반을 보는 시야를 갖춘 팀이 우승까지 했다며, 삼성은 배구 실력만이 아니라 인격과 품위까지 가진 팀이라고 매스컴의 대대적인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각 기업체가 운동팀을 갖는 것은 해당 종목을 지원하려는 동기도 있지만, 우선은 회사를 홍보하는데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삼성 배구팀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1등이라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는 있겠지만, 1등을 위해서라면 상대팀도 배려하지 않고 전 배구계를 고려하는 넓은 시야도 없고, 자기들만 1등을 하면 된다는 이기적이라는 느낌을 더 강하게 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삼성 배구팀의 이런 독주는 삼성의 제일주의 경영이 갖는 부정적 측면이라는 강한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지 모릅니다. 실제로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국내 경제에서 삼성의 독주가 가져올 수 있는 병폐로 삼성의 배구 팀을 예로 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연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을까요? 벨보다 며칠인지, 몇 시간인지 모르지만 늦게 전화를 발명한 그 사람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까요? 아마 전화에 관계된 일을 하는 분들은 기억할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전화 발명에 관계된 일을 하는 분들은 더욱 그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의 식구들은 그의 전화 발명만이 아니라 그의 삶 모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결정적으로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과연 1등과 2등 중 누구를 기억하실까요? 하나님에게는 1등과 2등이 전혀 다른 내용으로 채점될지 모릅니다. 하늘 나라에서 성적표를 받아들 때 우리는 너무나 놀랄지 모릅니다. 이 땅에서 1등으로 기억되는 자가 하늘 나라에서는 아예 이름이 없거나 있더라도 초라한 등수에 매겨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벨과 암스트롱과 삼성 배구팀이 과연 1등으로 기록될지 의문입니다. 여러분은 사울에 대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처음에는 1등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백성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뽑았을 때, 그는 행구 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기보다 숨던 자였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뽑히자 일부 사람들이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하며 멸시하고 예물을 드리지 않았으나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잠잠했습니다. 이러할 때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을 그를 높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된 후에 처음의 낮아짐을 버리고 1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변하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사울은 군대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은 성에서 나와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이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울은 이 말을 듣더니 불쾌하여 심히 노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며 그 때부터 다윗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왕직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울을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왕으로서 끝까지 인정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집요하게 쫓아오는 사울 일행을 다윗은 끝까지 반항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습니다. 사울왕이 잠자는 결정적인 상황을 두 번이나 맞이했지만 다윗은 그 때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여서는 안된다며 그냥 갔습니다. 다윗은 결코 자기 힘이나 쿠데타로 왕위를 얻을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지레 자기 짐작으로 다윗을 적으로 만들고 죽이려고 쫓아다니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된 동기는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는 노래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다윗을 더 높게 말하는 여인들의 노래 소리에 그만 마음이 상해버린 것입니다. 맨처음 왕이 되었을 때의 겸손함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자기가 꼭 1등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곡된 이 마음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도 왜곡시켜 버립니다. 여인들은 단지 사울과 다윗이 모두 많은 자를 죽였다는 그런 의미에서 노래한 것입니다. 정확히 이들이 천천과 만만을 죽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다윗이 만만으로 더 죽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윗이 더 뛰어나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사이 전쟁에 다윗이 많이 참여하여 전공을 올렸기 때문에 그에게 더 많은 숫자를 돌린 것이고, 점강법이라고 처음에 언급한 사울에게는 천천, 다음에 언급된 다윗에게는 만만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상대적으로 최근의 사건인 골리앗을 극적으로 죽인 다윗의 싸움 장면도 이런 표현을 하는데 한 요인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여인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사울보다 다윗을 더 뛰어난 자로 여겼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능력 하나 만으로 사울을 쫓아내고 다윗을 왕으로 모실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왕은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은 바로 전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사울과 그의 가족을 왕으로 인정하는 백성들이 사울의 아들을 왕으로 모셔 섬겼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죽었어도 이 정도인데 살아서는 더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사울은 1등이 최고라는 제일주의에 빠져 주변 상황을 왜곡한 것입니다. 평범하게 여길 말을 시기와 질투로 해석하여 다윗이란 훌륭한 부하를 오히려 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충직한 백성들을 언제든 다윗을 왕으로 삼을 수 있는 변덕스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이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을 써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은 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대적한 민족 아말렉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은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길갈로 돌이켜 떠났습니다. 사무엘은 그런 사울을 찾아가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며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 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 말을 듣고 깊이 반성하며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죄에 대한 회개보다 백성 앞에서 높임을 받는 것에 먼저 신경을 쓴 것입니다. 사무엘이 나타나 자기를 꾸짖었던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를 인정하고 높인다는 것을 백성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얼마나 높임 받는 것에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이런 사울을 보며 어이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큰 죄를 지적하며 꾸짖고 있는데 엉뚱하게도 자기를 높여달라고 하니, 마치 아이가 때 쓰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런 사울을 따라가 주지만, 그 이후로 다시는 사울을 보러 가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 순간에만 깊이 회개하였어도 그는 구제를 받았을 것입니다. 지금 그 순간에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높임을 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순간에 1등임을 인정받는다고 해서 무슨 본질적 변화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는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신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높임을 받는 1등이란 결과는 아무 소용이 없고, 1등이든 2등이든 어떤 행동들을 취했는가가 중요한 것을 그는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의 모습에 실망을 하시고, 그에게서 왕위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1등주의자들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성격이 있습니다. 현실의 1등을 차지하기 위해 과정을 무시하다가,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인정을 놓쳐버리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과정을 보신다는 것을 1등에 대한 집착으로 간과해버리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끝내는 죽음의 위험에 이르게된 내용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하고, 아버지 야곱은 말년에 얻은 자식이므로 다른 아들보다 그를 더 깊이 사랑하여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그러니 형들이 그를 좋아하겠습니까? 사람은 본질상 타인이 자기보다 잘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거기다 요셉은 미운 짓을 해댔습니다. 그는 꿈을 꾼 후에 형들에게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다시 꿈을 꾼 후에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을 연속으로 들으니 형들은 시기할 수밖에 없고, 그가 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할 때의 요셉의 나이는 최소한 열 일곱입니다. 열 일곱이면 분별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자기의 말이 형들을 얼마나 기분 나쁘게 할 줄을 말입니다. 그는 연속되는 꿈을 하나님의 계시로 알고 발설하지 않으며 마음 속에 품고,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사모하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형들 또한 아버지 야곱과 같이 그 말을 마음에 두어야 했습니다. 시기만 할 것이 아니라, 왜 요셉이 그런 꿈을 연속해서 꾸는지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요셉이나 형들이나 모두 이 면에서 자기 감정에 솔직들하였기 때문에, 끝내는 형들이 아우를 죽이려는 시도가 일어납니다. 얼마나 1등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무서운지를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또 다른 요셉이 나옵니다. 아마 요셉하면, 여러분은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을 떠올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요셉 말고 또 다른 요셉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 대신에 한 명의 사도를 뽑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자격으로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같이 다니던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같이 있던 일백 이십 명이 바로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인 요셉과 맛디아 두 명을 천거합니다. 이 두 명중에 한 명을 뽑아야 되는데 뽑는 방법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제비 뽑기입니다. 이 제비뽑기에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맛디아가 뽑혔습니다. 요셉은 뽑히지 않은 자가 되었습니다. 제비 뽑기는 어떻게 보면 매우 치명적인 방법입니다. 뽑힌 당사자는 괜찮지만, 뽑히지 않은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의 투표로 떨어졌다면 그들이 나를 못 알아 본 것이라며 위안을 삼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사람들의 투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뽑으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한 명을 뽑기 전에 이런 기도를 하기까지 했습니다.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에게 누가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 알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비뽑기를 통해 "맛디아가 요셉보다 낫다"라는 평을 공개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께서 요셉을 버리신 것을 보니 요셉은 좋지 않는 사람임에 틀림없구나"라고 생각하며 요셉을 경계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괜히 두 명으로 추천되어 이런 험한 꼴을 당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맛디아를 볼 때마다 제비뽑는 장면이 생각나 교회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일반적인 공동체라면 이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며 진리를 인하여 우월감과 열등감으로부터 그 마음이 자유로와진 자들입니다. 요셉이 선택된 것은 그가 뛰어나서라기보다 그에게 사도에게 적합한 하나님의 은사가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행할 은사를 받았기에 하나님이 뽑으신 것이지, 그가 요셉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하고 귀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요셉을 나쁘게 보지 않고, 요셉 또한 열등감과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사도란 직책의 영광스러움을 생각하기에 앞서, 누가 사도직을 맡음으로 모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를 것인지 더 넓은 관점에서 생각하였기에 모두가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목회자 한 분은 호주에서 교회를 다닐 때 "맛디아 커뮤니티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새로이 뽑힌 맛디아 사도의 이름을 딴 교회인 것이지요. 이것을 보아도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성도들에게 맛디아와 제비뽑기에서 떨어진 자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으면, 지금까지 대답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꼭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이 아무리 1등을 기억하고, 맛디아를 기억해도 별 중요한 것은 아님을 말입니다. 전도서를 한번 볼까요?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찌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전 2:16-21)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니 허무하고, 1등한 자의 부와 명예를 다른 사람이 이어받게 되니 허무하고, 그것을 제대로 사용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허무합니다. 우리가 벨과 암스트롱을 기억하기는 하지만 몇 백년 후에도 이들을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만 해도 "벨은 전화를 만들었다, 암스트롱은 달을 처음 밟았다"라는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지, 이들의 구체적인 삶과 인격과 고난과 기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이들에 대해 너무나 단편적인 정보만을 알 뿐입니다. 이 정도를 가지고 이들을 기억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이 죽은 지 몇 십년 후에 동방의 작은 나라의 불혹이 지난 한 사내가 이들을 기억한다고 하여 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은 동방의 한 사내가 이렇게 나마라도 기억하지만 과연 몇 백년이 지난 후에도 기억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벨과 암스트롱이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는지 모르지만, 죽을 때 이것을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물려받은 자는 누구이고, 그 자는 이것을 잘 사용하고 있습니까? 자신있게 말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1등의 화려한 업적을 미련한 아들이 물려받을 수 있고, 그 결과 자기가 적으로 여겼던 자에게 모두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는 "아무도 죽은 이를 기억하지 않는다"로 바뀌어야 하고, "아무도 1등의 업적은 누구에게 전달되지 모른다"로 바뀌어야 합니다. 1등도 결코 기억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작업을 김영삼 정권부터 이런 저런 형태로 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정치 권력을 남용한 경우들에 대하여 무엇이 옳은지를 밝히려 하고 있습니다. 짧은 인간의 생애에서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한 때는 막강한 권력으로 천하를 주무르는 듯 하던 이들에 대하여 그 과정들이 과연 어떠했는지를 따지고 있습니다. 결코 1등이란 결과만으로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 것이 아님을 이 땅에서도 이렇게나마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에게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모든 곳에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게 우리가 심판을 받을 때 역사 바로 세우기는 가장 정확하고 엄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선과 악에 대하여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결코 결과주의나 허무주의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기억하는 1등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2등도 똑같이 판단하십니다. 누구를 더 선호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실 뿐입니다. 전주연씨는 탤런트로 데뷔한 이래 계속해서 2등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동통신 광고에 출연하면서 갑자기 떴습니다. 1등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동기들은 잘 나갈 때 자기는 언제나 단역으로 미천한 역할만 했는데 인생의 말년에 이렇게 떴다는 것입니다. 자기 외모가 볼품없어 보여서 그런지, 그 당시에는 드물게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인데 모두들 식모 역이 제일 어울린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생각지도 않게 우연히 출연한 CF를 통해 떠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영원한 2등은 없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구를 보면서 정말 영원한 2등은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땅에서 비록 2등으로 살다가 생을 마치고, 심지어 아무도 기억하는 이 없이 생을 마쳐도, 하늘 나라에서는 새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전주연씨가 평생 단역으로만 그쳤어도, 하늘 나라에서는 새롭게 평가됩니다. 거기서는 생각지도 않은 사람들이 1등의 삶을 삽니다. 너무나 많은 이 땅의 1등들은 그들이 취한 비정한 수단과 방법 때문에 천국에는 아예 와보지도 못하고, 지옥에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문학 작품에서 교훈적으로 서술되는 그런 추상 내용이 아니라, 보통 명사입니다. 실제로 존재합니다.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늘 나라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영원히 기억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은 이의 이름을 오래 동안 기억하지 않습니다. 제 앞길 살아가기에도 바쁠 뿐입니다. 과정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외모를 보기 때문에 결과로 과정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과정으로 목적을 평가하십니다. 1등을 함으로 세상이 주는 찬사와 주목을 받기보다, 2등을 함으로 골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격려와 평안을 더 낫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이 땅에서 죽어도 하늘나라에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재산입니다. 저는 삼성을 좋아합니다. 모든 일에 1등을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세계에서도 1,2등을 다투는 모습도 한국인의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듯하여 가슴 뿌듯합니다. 십년 전엔가 러시아의 지방 도시를 방문했을 때 생각지도 않던 삼성 반도체 공장이 있어, 얼마나 그 사람들에게 한국인이라는 폼을 잡았는지 모릅니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 그들이 삼성이 만든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았고, 데스크 탑 컴퓨터를 분해했을 때 삼성이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반도체들을 보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대기업들과 격차를 더 벌이는 모습에서 삼성의 저력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경외심까지 들 정도이고, 그들의 리더쉽에 대해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국을 대표하는 그런 기업이 진정한 1등이 되기를 바랍니다. 삼성 배구팀이 전 배구계를 생각하여 상대팀에 대한 배려로 우수 선수를 몇 해 정도는 뽑지 않는 여유와 희생하는 마음을 가져 진정한 1등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그래서 명예와 희생과 용기를 아는 배구팀이란 찬사를 듣기 바랍니다. 그리고 회장의 아들이 상속에 관하여 잡음이 일어나지 않기도 바랍니다. 우리나라도 국민들로부터 진정한 존경을 받는 기업주가 존재하여야 합니다. 자본주의를 사는 이 시대에 기업의 존재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고, 현대의 영웅은 스포츠만이 아니라 기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기업가하면 과감한 추진력과 고독한 결단과 정직한 생활의 이미지로 높이 보아야 합니다. 상속세인지 부유세인지를 폐지하고 감세하려는 미국 부시 대통령의 정책에 대하여 미국 부자들은 무슨 큰 일이나 난 것처럼 집단으로 모여 성명을 내고 비판했습니다. 자기들의 부는 사회에서 취하였기에 사회로 돌려주어야 하고, 이런 정책은 미국의 아름다운 기부 문화를 망가뜨린다는 것입니다. 미국 부자들의 이런 아름다운 몸짓을 우리 나라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속세를 기꺼이 내며 정당한 후계자가 되어 삼성의 1등을 더 멋지게 이끌어가는 고독하면서도 용기있는 그런 정직의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욱 그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1등만을 기억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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