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은혜의 말씀과글 >
욕정은 슬픈 것이기에: 2003년 4월 11일 작성 정요석 2017-03-10
  • 추천 0
  • 댓글 0
  • 조회 288

http://seum.onmam.com/bbs/bbsView/15/5243303

이 글은 작년 4월 11일에 썼습니다. 오래전부터 섬머셋 모옴의 "비"를 매개로 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작년에 한 참 글을 쓸 때 마침내 썼습니다. "비"란 작품에 반영된 섬머셋 모옴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자세히 서술하다보니, 글이 좀 길어진 면이 있는데 이해하여 주십시오. 제가 6월말에 10 여일간 사이판에 다녀왔습니다. 남태평양에 있는 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곳에서 비를 많이 만났습니다. 그곳에 있을 때 섬머셋 모옴의 이 작품이 많이 생각나서, 비가 내리는 것을 볼 때 마다 슬픈 욕정을 가진 사람에 대해 많이 숙고해 보았습니다. 이 글에도 어떤 음악이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최정현 성도님께서 이 글에 어울리는 음악을 하나 첨부파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목: 욕정은 슬픈 것이기에
부제: 섬머셋 모옴의 "비" - 너희는 다 똑같아

며칠 전 차 속의 라디오에서 교수와 목사와 사장을 포함한 이삼백 명에 이르는 제3차 성 범죄자 명단을 공개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이미 3차에 이르렀으니 명단 공개 자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지만, 목사가 포함되었다는 말에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며 놀라겠지, 아니면 목사라는 것들이 겉으로는 거룩한 척 하지만 실은 우리와 똑같은 것들이라고 고소해하며 비난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2,3년 전에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시민 운동가로 꽤 알려진 한 분이 여대생을 호텔에서 추행하려던 사실이 뉴스로 나왔을 때입니다. 정치와 경제의 여러 일들에 대하여 당위와 명분을 중시하며 방향을 제시하던 그분이 여대생 강제추행이란 일로 경찰에 잡혀들어갈 때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의외성에 많은 사람들은 놀라워들 했습니다. 이 일로 시민 단체들은 자기들이나 똑바로 하지 왜 남의 일에 사사건건 간섭을 하냐는 지적과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굴레란 작품으로 알려진 섬머셋 모옴을 아십니까? 그는 8세 때 어머니를 잃고, 10세 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목사인 숙부의 손에 길러졌는데, 그는 숙부에게서 좋지 않은 경험이 많았던지 숙부의 바램과는 달리 교역자가 되기는커녕 기독교인이라는 것조차 부인했습니다. 그는 "비"라는 중편에 가까운 분량의 단편소설에서 기독교 선교사의 세계관과 심리와 그것의 모순성을 적절하게 그러면서도 조롱하듯 우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남태평양의 사모아 섬으로 가는 배에서 알게 된 의사 맥훼일 부부와 선교사 데이비슨 부부가 중간 기착지에 도착하여 경험한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데이비슨 부인은 배안에서 맥훼일 부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여행했을지 모르겠다고 맥훼일 부인에게 말을 하자, 그 남편은 "난 선교사란게 그렇게 거만을 피울 만한 명사 축에 든다고 생각할 수 없는걸. 그들의 종교를 창건한 분은 그렇게 배타적이 아니었는데"라고 자기 아내에게 말을 합니다. 이렇듯 선교사 데이비슨 부부는 일반인과 거리를 두며 거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이고, 의사 맥훼일은 신앙이 아닌 상식으로 일을 판단하는 자이므로 자연히 데이비슨 부부에 대해서는 냉소적입니다.

사모아 북방의 일군을 섬을 맡아 선교하는 데이비슨 부부는 섬에 도착하여 단 한 명의 성한 처녀를 볼 수 없는 것에 놀라 댄스를 금지합니다. 댄스에 미친 주민들이 문란한 성생활로 이어진다고 본 것이지요. 허리에 붉은 무명 한 가닥밖에는 아무 것도 안 입는 <라바라바>라는 옷의 착용도 금지했습니다. 맥훼일 의사는 섬의 기후에는 꼭 맞는 옷이라고 반박하자, 데이비슨 선교사는 "이 섬 주민은 열 살 이상의 소년은 전부 바지를 입도록 하지 않는 한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만들 수 없다"는 보고서를 쓴 적이 있었다고 심각하게 말합니다.

이들은 주민들에게서 죄의식을 찾아볼 수 없어, 죄의식을 주입하여야 했는데 이것이 자기들 사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들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우리는 죄악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간통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훔치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를 노출하고 춤을 추고, 교회에 안 나오는 것도 죄로 만들어야 했어요. 여자가 유방을 들어내는 거나, 남자가 바지를 안 입는 것도 죄로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행위를 하면 벌금을 물림으로 죄로 만들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세금부과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주민들은 이들의 비위를 거슬리면 잡은 물고기도 팔 수 없었기 때문에 보는 앞에서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듯 행동했습니다.

이러한 대화를 나누며 두 부부는 긴 여행 끝에 중간 기착지의 섬에 도착했지만, 갑자기 발생한 홍역 때문에 이동이 중지되어 이 섬에 적어도 열흘은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호텔이 없는 그 섬에서 간신히 이층으로 된 목조건물의 2층에 숙소를 구했습니다. 몇 시간 후에 톰슨이라는 스물 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도 1층에 숙소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여인의 방에서 축음기가 거칠고 커다랗게 재즈 곡을 짜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선원 친구를 송별회하는지 춤 추는 소리와 술병 마개 빼는 소리와 생기 있게 지껄이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선교사 부부는 어디서든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경 한 장을 읽고, 주석을 겸해 연구를 하고, 철저하게 토론을 하는 생활을 유지한다며 자기들 방으로 일찍 올라갔습니다.

그 다음날에도 톰슨이란 여인의 방에서는 똑같은 일이 더욱 시끄럽게 벌어졌고, 잘 알려진 노래를 합창까지 했습니다. 2층에 있는 그들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 때 데이비슨은 갑자기 그 여인이 호놀룰루의 홍등가인 율레이에서 왔음을 기억해냈습니다. 그곳은 정박중인 선박의 선원, 포함에서 내린 만취한 하사관, 흑인과 백인의 미군 병사들, 지금도 항상 그렇지만 그 때도 둘세씩 몰려다니는 일본인, 기다란 옷을 입은 중국인 등과 같이 세계 각국의 남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홍등가에 몰려든 그 남자들을 섬머셋 모옴은 그 유명한 말로 묘사를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용했고 마치 무엇에 눌리운 것 같았다. 욕정은 슬픈 것이기에."

데이비슨 선교사는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자 정의의 사자처럼 바로 아래층에 내려가 당장 이 짓을 그만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부를 하고, 그런 그들과 선교사 사이에는 격투가 벌어지고, 방밖으로 데이비슨은 내던져졌습니다. 또다시 축음기는 방약무인하게 울리기 시작했고, 추잡한 가사의 노래는 다시 불려졌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데이비슨 선교사는 그 섬의 총독을 찾아가 끈질기게 그 여인을 섬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습니다. 물론 이 일과 동시에 선교사는 톰슨 여인을 찾아가 회개의 필요성을 말하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의 죄가 지옥의 깊이보다 깊다고 해도 주 예수의 사랑은 그에게 미치는 법이라고 말하며 회개하고 돌아올 모든 기회를 나름대로 제공했습니다. 그녀의 영혼을 위해 자기 방에서 단조롭지만 열렬하고 끈기있게 기도했습니다. 이 모든 기회를 거부할 때, 주 예수께서 고림대금업자와 환금업자를 성전에서 몰아내던 회초리를 자기도 들겠다며, 총독의 결정을 받아낸 것입니다. 총독은 그녀로 이 섬에서 화요일에 떠나는 첫 선편의 샌프란시스코 행 배를 타도록 했습니다.

이 결정을 통보받은 톰슨은 처음에는 선교사에게 악담을 하며 대들고, 나름대로 그 결정을 철회시키려고 총독을 만나고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그 결정은 변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시 선교사를 찾아온 그녀는 며칠 전에 그들을 조롱하던 버릇없는 말괄량이의 모습은 없어지고, 기가 죽고 겁에 질린 모습으로 자기의 그간의 행동과 모욕적인 발언을 모두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놀란 그들은 왜 그렇게 샌프란시스코 행을 거부하냐고 묻자, 처음엔 그 곳에 가족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거듭되는 추궁에, 몇 년 전에 샌프란시스코 감화원에서 몰래 탈출하여, 그곳으로 가면 적어도 삼 년은 감옥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용서하고 그녀가 원하는 그 다음 편의 시드니 행 배를 타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데이비슨 선교사는 그녀로 참회하여 벌을 받게 해야 한다며 거부합니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겁에 질린 앓는 소리를 내더니 나직하고 처참한 비명을 터뜨리고 제 머리를 땅바닥에 마구 부딪쳤습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맥훼일 의사가 그런 그녀를 부축하여 방에 누이고 피하 주사 한 대를 놓아 진정시킨 후 2층으로 돌아왔을 때, 선교사는 같이 기도하기 위해 기다렸다며, 성경을 펴서 간음하다 잡혀 예수님에게 끌려온 본문을 읽고서는 긴 기도를 했습니다. 죄 많은 여자에게 자비를 주십사고 잔인스러울 만큼 열렬히 기도했고, 유난히 감동하여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기도를 마친 그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주기도문으로 모임을 마쳤습니다. 

모임을 마친 의사는 1층의 그녀에게 가보았더니 흔들 의자에 앉아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누워서 휴식을 취하라는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은 그녀에게 화를 냈지만, 그녀는 선교사를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부름을 받고 내려온 선교사는 자기를 부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며, 하나님이 자기들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난 나쁜 여자였어요, 참회하고 싶어요."라고 말하자,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신 겁니다."라고 감탄하며 자기 둘만 있게 해달라고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그는 밤 두 시가 넘도록 그녀와 같이 있었고, 그 후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도 기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의사가 아침에 그를 보았을 때, 창백하고 지쳐 보였으나 눈만은 불타듯 번쩍거렸고, 넘쳐흐르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 보였습니다. 그녀의 몸이 나아진 것은 바랄 수 없지만 넋은 달라졌다며, 어제 밤에 자기는 길 잃은 넋을 예수의 자애로운 품에 안기는 특전을 얻었다고 황홀한 눈빛을 한 채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톰슨 양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시 선교사를 찾았습니다. 그가 옆에 있어야만 겁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후 사흘 동안 선교사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톰슨과 같이 보냈습니다. 그녀 방에서 나와 위층으로 올라온 후에는 지쳐버릴 때까지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잠도 오래 자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그 여자의 가슴속에 감춰진 구석에 숨어 있는 죄의 마지막 흔적까지도 송두리째 뽑아내는 듯 했습니다. 그녀와 같이 성경을 읽고 그녀와 같이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제 그렇게 회개를 했으니 샌프란시스코에 보내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의사가 말했을 때 데이비슨은 자기는 그녀를 아내와 누이처럼 사랑하고 그녀가 감옥에서 받는 고통을 자기도 똑같이 받을 것이지만, 죄를 지었으면 고통을 받아야 하므로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굶주리고 고문을 받고 모욕을 당하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속죄로 달게 받기를 바라고, 그런 기회는 하나님이 일반인에게 좀처럼 주지 않는다며 하나님은 무던히도 선량하시고 자비로우시다는 말로 끝맺었습니다. 그 때의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렸고, 자기 입술에서 열렬하게 굴러나오는 말을 똑똑히 발음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녀는 공포 때문에 무감각한 상태가 되었고, 선교사가 보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노예처럼 모든 것을 맡기고 그에게 매어 달렸습니다. 그녀는 무척 울었고, 성경을 읽었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옷차림도 너절한 잠옷 바람으로 되는대로 지냈습니다. 모두가 이런 상황을 숨막혀 하며 빨리 화요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월요일 저녁이 되었습니다. 총독부 서기는 그녀에게 내일 아침 열 한 시에 배로 호위해가겠다고 했습니다. 선교사는 그녀와 같이 있으며 모든 준비가 잘 되도록 돌봐주고, 자기도 같이 배에까지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말을 듣고 의사는 2층 자기 방에 돌아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톰슨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는 아내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무척 피곤했으므로 어느 때보다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누군가 깨워 자리에서 일어나자, 집 주인이 기구를 챙겨 어딘가에 가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의사는 톰슨 양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지만, 주인은 섬의 토착민 오륙 명과 함께 그를 길 건너 바닷가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반은 물에 잠기고 반은 물밖으로 나온 채 누워 있는 무시무시한 데이비슨의 시체를 보았습니다. 귀에서 귀까지 목을 끊었는데 그의 바른손에는 그짓을 한 면도칼이 그대로 쥐어져 있었습니다.

집 주인은 의사에게 왜 이런 짓을 했느냐고 묻지만, 그는 어깨만 으쓱할 뿐입니다. 숙소로 돌아오니 아내가 데이비슨 부인이 남편이 밤새도록 자리에 안 들었다며 걱정을 한다고 전해주었습니다. 두 시에 톰슨 양 방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는데 밖으로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그런 자기 아내에게 선교사의 죽음을 알리며, 선교사의 아내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고 말했습니다. 선교사의 아내는 이들에게 시체에 가보겠다고 하여, 같이 동행하여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숙소에 가까이 왔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시 축음기가 재즈 곡을 커다랗고 거칠게 짜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톰슨 양은 다시 화려해진 옷차림으로 문앞에서 어떤 선원과 예전의 건방진 말괄량이 모습도 그대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더니 조롱하듯 커다랗게 깔깔 웃고는, 입에 침을 모아, 놀라 멈춰 선 선교사 부인에게 뱉었습니다. 의사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망칙한 짓이냐고 소리를 지르며 저 빌어먹을 기계 좀 그치라며 소리판을 빼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표정과 경멸에 찬 증오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희 사내들! 너희 치사하고 더러운 돼지 새끼들! 너희는 다 똑같아. 어떤 놈이든 말야. 돼지 새끼들! 돼지 새끼들!"

이 말을 듣고 의사 맥훼일은 놀라움에 숨이 막히는 듯 했습니다. 그는 선교사가 죽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모옴이 말한 것처럼 욕정은 슬픈 것입니다. 성 범죄자 명단에 공개된 그 목사님도 슬프고, 여대생을 추행하려했던 그 시민 운동가도 슬픕니다. 어찌 이들뿐이겠습니까? 모옴이 말한 것처럼 세계 각지에서 온 모든 사람들이 슬픕니다. 여기에는 저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들어가겠지요.

놀라운 것은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일컫는 다윗도 포함됩니다. 그는 간음을 하였는데, 그것도 아주 악질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는 어느 봄에 온 군대를 전쟁에 보내고, 저녁에 왕궁 지붕 위를 한가로이 거닐다가 밧세바라는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밧세바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데려오게 한 후 간음을 했습니다.

다윗은 이 간음을 무마하려고 즉시 전장에 나가있는 사령관 요압에게 연락하여,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왕궁으로 보내라고 명령합니다. 우리아가 도착하자, 다윗은 매우 인정이 많고 자상한 왕처럼 사령관 요압이 잘 있냐고, 군사들은 어떻게 지내느냐고, 싸움은 어떻게 진행되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리곤 짐짓 우리야 그를 무척이나 위하고 아끼는 냥,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고,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까지 뒤따라가게 했습니다. 그로 어떻게 해서든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여, 밧세바의 임신이 자기로 인한 것이 아님을 보이고자 술수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야는 다윗의 짐작과는 너무나도 틀리게 집에 들어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잤습니다. 곤혹스러워진 다윗은 우리야를 다시 불러 왜 집에 들어가 쉬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우리야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명세하나이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이 얼마나 극적인 대비입니까? 한쪽은 부하들을 모두 전쟁에 보낸 후에 그 부하의 아내와 눈이 맞아 간음을 하였는데, 다른 한쪽은 이런 왕에게 자기의 상관과 동료들이 바깥 들에서 전쟁을 하며 자는데 어찌 자기 아내와 같이 잘 수 있느냐고 말하니, 참 극적인 대조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이번에는 바로 자기 앞에서 우리야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했습니다. 취하면 욕정을 느끼고, 그러면 밧세바에게 내려가 동침할 것을 다윗은 기대한 것입니다. 어떻게든 밧세바와 동침케 하여 임신케 한 것을 면해보려는 급한 마음밖에 다윗에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야는 이번에도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왕의 신하들과 더불어 그냥 잠을 잤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더 악독하고 잔인한 술수를 생각해 냅니다. 이번에는 우리야의 손을 통해 사령관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이 편지를 갖고 가는 우리야를 죽이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맹렬한 싸움이 일어나는 곳에 우리야를 앞세워 두고, 다른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 그로 맞아서 죽게 하라고 죽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그런 편지를 죽이고자 하는 우리야 편으로 보내다니 다윗이 얼마나 잔인한 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우리야는 이 편지 내용대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야는 다른 병사와 함께 가장 치열하게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 보내어져, 다른 병사 몇과 함께 죽음을 당했습니다. 우리야만 보내어 죽게 하면 이상하므로 다른 병사까지 동원하여 죽게 한 것입니다. 이 보고를 받은 다윗은 즉시 남편이 죽어 슬피 우는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 아내로 삼았습니다. 밧세바가 임신한 것은, 지금 아내로 삼아 동침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속이기 위해서겠지요.

아무리 욕정이 슬픈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 중에 이렇게까지 악질로 간음과 살인을 범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다윗과 같이 부하를 전쟁에 보내고 그 아내와 간음을 하는 자도 많지 않을 것이고, 그 간음을 숨기기 위해 그녀의 남편을 그의 동료들과 함께 살인을 교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신문과 방송은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고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말세라며 시대를 한탄할 것입니다. 법정도 그에게 죄질이 악하다며 사형에 해당하는 중형을 선고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범죄를 지은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이스라엘 왕 중 하나님을 올바로이 섬긴 자로 여겨지는 다윗이 이런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 다윗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정착한 곳의 이방인들이 자기 아내 사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를 죽일까 하여 누이라고 부르는 짓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도 아브라함과 똑같이 자기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불러 죽음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야곱은 간음은 아니지만 성경에서 그의 생애를 읽다보면 그의 거짓말과 약삭빠름에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비록 미련해보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에서가 듬직해보이고 우직스러워 보입니다. 마치 만화영화 톰과 제리에서 항상 제리에게 당하기만 하는 톰에게서 안스러움을 느끼고 새앙쥐 제리에게서 얄미움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자기 며느리와 간음을 한 자입니다. 물론 며느리인줄 모르고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창녀로 알고 했지만, 그랬다고 해서 그의 죄가 경감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 중 유다만이 그런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장자 르우벤은 아비의 여자와 간음을 하여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자입니다. 그 일로 장자권을 빼앗기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는 야곱의 12 아들은 이런 결정적인 흠이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중 며느리나 아비의 여자와 관계를 갖는 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애굽과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들과 결혼을 했는데, 후궁이 칠백인이고, 첩이 삼백인이었습니다. 혼인 정책을 통한 유대 강화라는 쪽으로 아무리 좋게 해석하여도 칠백인의 후궁과 삼백인의 첩은 너무했습니다. 그가 여자를 밝혔다는 이유 외에는 이렇게 많은 여자를 맞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이 죄가 너무 커서 그의 아들 때에 나라를 두 갈래로 나누어 그의 신복에게 열 지파를 주는 벌을 내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예들이 참 풍부하게 나옵니다. 위대하고 거룩해 보이는 성경의 인물들에게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개국을 정당화하며 왕들을 찬양한 용비어천가에는 왕들의 부족한 점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신격화하여 인간이 할 수 없는 이적을 행했다는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5대손 조상까지 들먹이며 신격화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이런 간음의 화려한 행적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적나라하게 기록합니까? 

그 이유는 용비어천가는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그 기록 목적은 사람을 신처럼 높이려는 것이고, 성경은 하나님이 기록한 것으로 그 기록 목적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보다 더 높이려는 목적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용비어천가처럼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내고, 좋은 점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사람은 별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려는 것뿐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선배도,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믿은 다윗도 별 수 없는 존재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사람은 그런 존재입니다. 평범해보이고 선해보이지만, 사람은 모두가 별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잘난 체 하여도 그 속을 까 발리면 지저분한 범죄 투성 입니다. 저 또한 지금 목사로 행세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정말로 깨끗해서가 아니라, 제가 지은 결정적인 죄들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은 그간의 죄들이 만약에 공개된다면 저는 즉시 감옥에 가야 되고, 설령 가지 않더라도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제 설교를 들으며 제 목회를 받고자 하는 분이 한 분도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제가 지은 약간의 죄들만을 드러나게 하여, 이렇게 폼을 잡으며 글도 쓰고, 목에 힘을 주고 설교도 하고, 짐짓 거룩하고 많은 것을 아는 냥 성경공부도 인도하고 상담도 합니다. 성도들의 큰 사랑과 권위와 존경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또한 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은 범죄들이 모두 드러난다면 현재의 상황과 같이 당당하게 서 있으실 수 없습니다. 제가 글을 읽는 한 분 한 분에 대하여 자세히 몰라도, 사람이면 어쩔 수 없이 갖는 한계 때문에, 모두 죄를 짓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기에 저는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도 저와 똑같은 범죄자이고,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더러운 죄를 지은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도 죄를 지었는데 여러분이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깨끗한 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사람의 별 수 없음과 모든 사람의 범죄 가능성에 대하여 더욱 눈을 뜨게 만든 이야기를 설교 시간의 예화를 통해 청년 시절에 들었습니다. 한국말로는 "60분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미국 tv에 식스티 미니츠(60 minutes)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60분 동안에 이슈가 되는 몇 가지 일을 분석하여 보여주는 프로그램으로, 분석력이 깊은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인 여히엘 디누르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여히엘 디누르가 참관한 1961년에 있었던 전쟁범죄자에 대한 재판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화면에 나타난 장면은, 디누르가 법정으로 들어가 아유슈비츠 수용소의 군대 지휘관이었던 아이흐만과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디누르는 아이흐만을 보자 갑자기 굳어졌고 곧 이어 주체할 수 없는 듯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재판장이 판결을 내리며 재판봉을 내리치자 그만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프로그램 진행자는 이 장면을 디누르와 같이 보면서 "당신은 왜 그 때 전범 아이흐만을 보자 그렇게 표정이 굳어져 흐느껴 울다가 기절까지 하고 말았습니까? 그 때의 일이 회상되어 증오심과 두려움과 분노에 짓눌린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흐만은 "아닙니다. 나는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군대 지휘관이라면 악마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너무나 평범했습니다. 그러면서 나 역시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그와 똑같은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두려움에 빠졌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디누르는 자기 안에 아이흐만과 같은 죄성이 있다는 무서운 발견을 하고는 울었던 것이고 끝내는 기절까지 했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 보편적으로 있는 죄성을 잘 말해주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일제 36년 동안 우리 선조를 괴롭게 했던 일본의 전범들을 보면, 학교에서 배운 이미지와는 달리 평범한 얼굴들이고, 보다 정확하게는 위인의 기품이 보이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얼굴 자체에서 우리 민족을 그렇게 괴롭히고, 수많은 사람이 죽는 전쟁을 일으켰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미국의 9.11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라덴에게서는 테러와 폭력이라는 느낌보다도 오히려 순함과 평화스러움이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반공 포스터를 그릴 때 목 뒤에 커다란 혹을 그려 넣으며 가장 악마스럽게 그렸던 김일성의 실제 모습도 커서 tv를 통하여 보게 되니 인자와 여유가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아유슈비츠의 대학살을 자행한 군대 지휘관이나 일본의 전범들이나 빈라덴이나 김일성이나 모두 우리가 길거리에서 보편적으로 만나는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얼굴에 악마와 같은 잔인성이 보이는 자가 아니라, 선하게 보이는 평범한 자가 그런 대학살을 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의 잔인성을 탓하기 앞서, 인간 전체의 악마성에 먼저 분노와 한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만이 신약도 많은 예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전 5:1-2절은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에게도 없는 음행을 범하는 교인들이 고린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자들을 벌하여 그들의 영혼을 구하라는 바울의 편지이지만, 교인들이 간음한 것은 확실합니다.

바울은 선교 여행을 하는 중에 바나바와 헤어졌습니다. 그 헤어진 이유가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합니다. 이들은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선교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마음이 바뀌어 도중에 중단하고 다른 곳으로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요한이 다시 안디옥에서 선교 여행을 떠나려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동행하기를 원했습니다. 바나바는 데리고 가자고 하고, 바울은 도중에 포기하고 한 마음으로 일하지 않은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 문제에 있어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심하게 다투어 끝내 서로 갈라져 따로이 떠났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에 대하여 더 자세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 중 누가 옳은지 명백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마가라 하는 요한은 후에 신앙의 성장이 있어 마가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만약에 바울의 말처럼 아무도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그는 반성하고 정진하여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면에서 바나바는 바울보다 더 큰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그를 배척하기 보다 아직 선교여행을 떠나기에는 믿음이 부족하므로 대신더 공부하며 준비하는 시간을 갖자고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여하간에 바울과 바나바는 사소하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심하게 싸워 갈라서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행위를 한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자기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어,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고,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을 말하는 바울이 이렇게 사도행전 15장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격렬하게 싸워 피차 갈라서기까지 했습니다. 바울 또한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완벽함을 위하여 나아가는 자로 때때로 실수하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 그대로 지킨 자가 아니라 그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갔던 자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아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자들에게서는 죄악의 보편성을 더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모세 율법에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냐고 예수님에게서 흠과 책을 잡고자 묻습니다. 대답을 거듭 강요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들은 그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갔습니다. 자기에게 죄가 없는 지를 살피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자가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더 오래 산 자일수록 더욱 양심의 가책을 받아 먼저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살수록 결국은 죄를 더하며, 인간의 별 수 없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다윗과 유다와 같은 신앙의 인물들과 나이든 순으로 떠난 그들과 그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책임자의 평범한 얼굴을 보며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 나라 위인 전기를 읽으며 도저히 바늘 틈도 들어갈 것 같지 않는 철저한 그들의 도덕과 행위에 기가 질려 나는 도저히 위인이 될 수 없다고 포기했던 제가, 그들에게서는 위로를 받고, 나도 위인이 되고 의인이 될 수 있음을 느낍니다. 제가 그동안 지은 죄가 얼마나 많았던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그분이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알면 알수록 저의 죄는 더욱 쌓아가기만 했고, 그냥 넘어갔던 죄도 도처에서 발견되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거룩해보이고 열정적이었던 데이비슨 선교사의 내부 어디에 그런 욕정이 숨어 있었던가요? 저에게도 숨어 있을 뿐입니다. 어떤 범죄를 저지른 자이든 그의 범죄를 지을 씨앗이 저에게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자살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윗을 본을 따를 뿐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성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상담을 하던 여자분과 넘지 못할 선을 넘었습니다. 그 관계를 청산하고자 했지만 그 여자분이 거부하고 이 관계를 공개화했을 때 그 분은 자기의 모든 죄를 시인하고 그에 대한 벌을 달게 받았습니다. 다윗의 위대함과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본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을 지적하는 선지자의 책망을 들었을 때 자기의 모든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그의 앞선 왕 사울은 자기의 잘못을 사무엘 선지자가 지적했을 때 그 죄를 깊이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가 다윗은 사울보다 어찌 보면 더 큰 죄를 범했지만 위대한 왕으로 성경에 기록되고, 사울은 어찌 보면 작은 죄인데도 전쟁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 목사님은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서 죄를 자인하고 그에 합당한 벌을 청구했습니다. 다니시던 교회에 알리고, 그분이 속한 노회에 알렸습니다. 그분은 사람의 범죄 가능성과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믿고, 교회와 노회에 자기의 죄를 알리고 벌을 받았습니다. 몇 년 동안 설교와 목회가 금지되고, 어떤 공식적인 활동도 금지되는 가혹한 벌을 받았지만, 그분은 그 벌을 달게 받으며 자기를 반성하고 또 반성했던 것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정중히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렇게 벌을 받은 분의 나중의 설교가 어떠할까요? 죄의 긴 후회와 반성과 회개속에서 자기를 연단한 자의 내면의 세계는 얼마나 깊어질까요? 그런 긴 터널을 지나온 자의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와 동정은 얼마나 깊겠습니까? 그런 분의 목회는 분명 예전과는 틀려지고 영혼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섬머셋 모옴의 "비"에 나오는 데이비슨 선교사는 철저히 자기를 증오하며, 자기에게 있는 조금의 악이라도 그렇게 하면 없어질 듯 하여, 귀에서 귀까지 이르도록 자기 목에 칼을 대었지만, 다윗과 유다와 르우벤과 솔로몬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간음을 한 자들이고, 다윗은 자기 간음을 숨기기 위하여 우리야를 비롯한 몇 명을 죽이는 악질의 죄를 범하였지만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와 르우벤도 자살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단지 깊이 뉘우쳤을 뿐입니다. 다윗의 깊은 뉘우침과 하나님을 향함이 시편 51편에 자세히 나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선지자 나단이 자기에게 와 죄를 드러내며 꾸짖을 때에 지은 시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꺽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며 용서해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면 다윗은 자기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고 말합니다. 자기는 죄인이라 죄를 짓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라 죄를 지으니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자기의 죄를 도말하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간절히 매달리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자기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섬머셋 모옴은 데이비슨 선교사를 자살로 만들어 철저히 기독교를 희화화하고 있지만, 그럼으로써 그가 기독교의 겉모습과 교리의 외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얼마나 기독교의 핵심과 정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지를 만 천하에 드러내었지만, 다윗은 자살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를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주의 성신을 거두지 말아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를 회복시켜 달라고 무릎 꿇고 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자기가 범죄자에게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 주께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그 목사님도 분명 이 시를 보았을 것입니다. 13절 이 구절을 보았기에 그분은 가족과 교회와 노회에 죄를 알리고 벌을 달게 받으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며, 그 참회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 다윗처럼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쳐 죄인들을 주께 돌아오도록 할 것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자살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인간은 모두 별 수 없는 존재이고, 그렇고 그런 존재인데, 왜 자살을 합니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데, 왜 자살을 합니까? 자살은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갖는 불신자들이 하는 짓이고, 믿음이 약한 자들이 하는, 해서는 안될 짓입니다.

16절과 17절이 더욱 감동적으로 와 닿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다윗이 말합니다. 얼마나 정확한 말입니까? 다윗은 이것을 알기에 자기의 죄가 만 천하에 드러나도, 사람을 향하여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뿐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죄를 지었지, 별 수 없고, 그렇고 그런, 털면 먼지 나지 않는 경우가 없는 인간을 향하여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죄를 지은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기꺼이 용서하심을 믿기에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고 보면 요셉이 보발디 부인이 같이 동침하고자 한 것을 거부하여서 요셉이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간음하지 않아서 그를 애굽의 총리로 하나님이 쓰신 것은 아닙니다. 다윗과 같이 간음과 살인을 하여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이 쓰시는 것을 보면 간음과 같은 죄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신앙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구원은 오직 주께로만 옴을 알고 무릎을 꿇고 용서와 구원을 간절히 구하는 자가 위대합니다. 이상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간음은 신앙의 좋고 나쁨과 직접적인 상관 관계가 없습니다. 간음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높게 쓰는 여부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신앙의 좋고 나쁨은 철저히 인간의 별 수 없음과 구원은 오직 주께로만 오는 것을 아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높게 쓰는 여부는 다른 여러 요소가 같이 고려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과서적으로 너무 쉽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제3차 성범죄공개에 해당되신 그 목사님과 그 시민운동가는 받아야 할 벌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만인 앞에 공개되는 벌보다 더 큰 벌이 있을까요? 얼굴을 들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겠으며 어느 자리에서 자기 이름을 떳떳이 공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분을 향하여 혹 우리 중에 또 다시 돌을 던지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돌은 이미 상처가 날 대로 나 있는 상처에 다시 상처를 나게 하는 잔인한 짓입니다. 데이비슨 선교사처럼 이쪽 귀에서 저쪽 귀까지 목을 끊고 그러고도 부족하여 손으로 칼을 꼭 쥐도록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회개도 아니고 반성도 아니고 철저히 자기 감정에 솔직한, 아주 웃기는 결백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돌을 던지는 자는, 톰슨 양처럼 창녀만이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녀는 데이비슨의 시체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일행에게 욕을 퍼붓고 재쯔를 짜내는 축음기를 다시 틀어대지 않았습니까? 

모옴은 톰슨 양으로 "너희 사내들! 너희 치사하고 더러운 돼지 새끼들! 너희는 다 똑같아. 어떤 놈이든 말야. 돼지 새끼들! 돼지 새끼들"이라고 말을 하게 했습니다. 모옴은 우리와 똑같이 별 수 없는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옴의 이 말은 데이비슨 선교사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과 목사와 선교사라고 하는 나부랭이들의 거룩한 척 하는 모습이 싫은 것입니다. 조금만 뒤집어보면 죄 투성이이고 내면에 복잡한 감정들로 가득 차 있는 것들이 잘난 체 하는 것이 싫은 것이고, 그래서 너희나 우리나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별 수 없는 인간이란, 사람은 그 누구든 죄인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수많은 죄를 짓는다는 것이고, 자기 힘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옴의 이해와 전혀 틀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크게 놀라지 않습니다. 연약한 인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그에게 주의 은총이 임하기를 빌 뿐입니다. 자기 자신도 이 죄에 열려있음을 확인하며 더욱 자기를 살피고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결코 손을 들어 돌을 던지는 행위가 없고, 그를 비난하고 고소해하는 일이 없고, 자기는 짐짓 이 죄로부터 자유로운 냥 거룩해하는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자기가 지은 어떤 큰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래서 날마다 무언가에 눌린 듯 중압감을 느끼고, 꿈을 통해서도 짓눌림을 받고, 알게 모르게 자기를 학대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만 그 죄를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대신에 하나님 앞에 아뢰고 진정으로 용서함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깨끗이 잊어버리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계속 괴로워하는 것은 죄에 대한 민감함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불신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다윗 같은 자도 죄용서함을 받고, 그 후에 뻔뻔하게(?) 왕의 위엄과 권위를 잃지 않고 만방에 알리며 훌륭히 왕 행세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모옴이 말하는 데이비슨 선교사는 그가 그의 상처로 만든 가상의 인물이지 결코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인물이고, 결코 성경은 그런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별 수 없는 인간"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나이 들수록 더욱 확인되는 것은 사람은 정말로 그렇고 그런 자일 뿐입니다. 제 내면에 있는 죄를 사랑합니다. 예전에는 죄가 있는 저를 학대했지만, 이제는 죄가 있는 저를 하나님 앞에서 사랑합니다. 그러며 죄를 다룰 줄 알게 되었고, 예전보다 죄의 영향력에서 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물론 죄가 있는 상대방도 더욱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같이 한 번 외쳐보지 않겠습니까? 인간은 별 수 없다고,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별 수 없이 사랑하신다고!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2003년 3월 27일 작성 정요석 2017.03.10 0 298
다음글 교회당과 성전: 2004년 6월에 작성 정요석 2017.03.10 0 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