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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과 성전: 2004년 6월에 작성 정요석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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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사용하는 언어가 사람의 사고를 규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교회당과 성전이라는 단어가 그런 듯 합니다. 갈수록 교회당 대신 성전이라는 단어가 더 사용되고 보편 의미를 획득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살아남는 단어가 더 넓은 의미까지 획득하는 경향이 있지만, 성전이라는 단어와 교회당이라는 단어 사이에는 넘기 힘든 차이가 있습니다. 


제목: 교회당 건축인지? 성전 건축인지?
부제: 교회는 무엇이고, 성전은 무엇이고, 교회당은 무엇인지?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는 지금(2003년 4월경) 건축중입니다. 장승배기 쪽에 좋은 땅이 나와서 그곳에 교회를 위한 건물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이 일을 성전 건축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교회당 건축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용어가 알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답을 하는데 먼저 교회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크게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밑에 고린도전서 1:1-3절을 적어놓았으니 이것을 보시고 성경이 교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전 1:1-3)

2절을 보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을 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고린도에 있는 어떤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안에서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지, 이들이 모임을 갖기 위해 사용하는 건물이 아닌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금요기도회가 9시에 서초교회에서 있습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엄밀하게 말하면 틀린 것으로 "서초교회당(堂)에서 있습니다"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당(堂)이란 단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하면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모이는 물리적인 건물로 바로 연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연상에 계속하여 빠지면, 교회당 건물에 과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여 왜곡된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 모이는 건물에 과도하게 정성을 부여하여 내장과 외장에 있어서 사치에 이르기 쉽고, 정작 그 안에서 모이는 사람들의 모임은 홀대를 하게 됩니다.

교회당에 대해서 살펴보았으니 이제 성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전은 솔로몬 때 건축이 되었고, 그 전에는 성막이라고 하여 광야에서 만들어졌는데 언제든 이동할 수 있는 형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곳에서 제사장의 주관 하에 죄를 사하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흠이 없는 짐승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면 제사장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게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 사람의 죄가 그 짐승에게 옮겨져 그 사람 대신 죽도록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제사를 드리면 자기의 죽을 죄가 용서를 받는다는 믿음으로 제사에 임합니다. 제사에 바쳐진 그 짐승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때마다 그 짐승이 상징하고 예표하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사모했습니다. 그 짐승이 자기의 죄를 실제로 짊어지고 죽는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그 짐승은 단지 상징과 예표일 뿐이고, 실제로 자기의 죄를 대신 짊어질 메시야,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입니다.

성막과 성전에서 중요한 것은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성전에서도 특히 구별된 곳입니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고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제사장들도 아무나 못 들어가고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도 아무 때나 못 들어가고 일년에 한번 제사를 지낼 때 들어갑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구분이 되는데, 이 휘장은 다섯 가지 색깔의 실로 짠 것으로, 양쪽에서 황소가 잡아당겨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 이곳에 들어가 자기와 다른 제사장과 다른 모든 백성의 죄를 사하는 제사를 지냅니다.

이처럼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고, 하나님이 백성을 만나주는 곳입니다. 이런 성전이 이스라엘 땅에 몇 개가 있는 줄 아십니까? 이스라엘은 하나의 국가로서 넓은 영토를 지닌 국가입니다. 주변 민족들과의 관계와 전쟁에 따라 그 영토가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넓은 땅입니다. 조선시대에 평양이나 부산에서 서울을 오려면 며칠 걸리듯, 이스라엘도 국토의 구석진 곳에서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오려면 며칠 씩 걸렸습니다. 이렇게 넓은 영토를 지닌 이스라엘에 성전이 몇 개가 있었냐면 오직 한 개뿐입니다. 성전은 백성들 마음대로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내용대로 건축하여야 했고, 세워지는 장소도 정해졌습니다. 그 숫자도 당연히 정해져 있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의 지정된 장소에 딱 하나만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안식일이 되면 어떻게 종교 생활을 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곳에 살든 무조건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와서 모인 것은 아닙니다. 오는 데만 며칠, 몇 달이 걸리는데 어떻게 매주 올라올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설령 이들이 전부 성전에 모인다해도, 성전은 그 많은 숫자를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매 안식일마다 이들은 어디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교육을 받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을까요? 

그것은 회당입니다. 바울은 선교를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닐 때, 먼저 회당을 방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디를 가든 일정 수의 숫자가 모이면, 회당을 세웠습니다. 이곳에 모여 회당장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생활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곳을 방문해 모여있는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읽고 풀어 설교했습니다. 이러한 회당은 유대인이 모이는 곳이면 이스라엘 국내이든 국외이든 곳곳에 있었습니다. 요사이 각지에 교회당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회당을 지을 때 건축비용이 필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이들은 필요한 비용을 헌금으로 충당했을 것입니다. 이 때 이들은 어떤 용어를 썼을까요? 성전 건축이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회당 건축이라고 했을까요? 당연히 회당 건축입니다. 만약에 성전 건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가는 돌에 맞아 죽습니다. 성전은 오직 예루살렘에 단 하나만 있어야 합니다. 백성들이 마음대로 건축물을 세워놓고 성전이라고 했다가는 성전 모독죄로 돌에 맞아 죽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 성전 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하는 자들이 여러모로 예수님의 죄에 대해 언급했지만, 서로 간에 말이 맞지 않으며 어느 하나 죄로 성립되지 않았지만, 단 하나 성전에 관계된 예수님의 발언은 문제시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며 성전을 헐면 사흘에 짓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바로 이 말씀이 죄로 인정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성전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백성들이 흠 없는 짐승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서 죄를 사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 아닙니까? 백성들은 흠 없는 짐승으로 제사를 드리면 자기들의 죄가 사해진다는 믿음으로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타락이 되어 믿음이 아니라 형식으로 제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장 하에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무조건 자기들의 죄가 사해진다고 여긴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절차와 형식과 의식으로 죄가 사해져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여긴 것이지요. 백성과 제사장 모두가 이렇게 타락하면서, 제사장은 일부 장사치들과 한편이 되어 백성들이 제사용으로 가져오는 짐승을 자기들이 지정한 가게에서 사오지 않으면 짐승의 흠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제사용으로 부적합하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제사장이 지정한 가게에서 흠 없는 짐승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전 주위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사고 파는 상인과 백성들로 붐비고 시끄러웠습니다. 또 멀리 해외에서 살다 온 백성들은 예루살렘에서 통용되는 돈으로 먼저 환전한 후 짐승을 구입해야 했으므로, 돈 바꾸는 일로도 시끌벅적했습니다. 성전에 오셨다가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과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셨습니다. 성전은 이러한 것을 하는 곳이 아니기에 어떻게 보면 과격한 행위를 예수님이 하신 것이고, 이것을 통해 백성들에게 성전의 본 의미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자 백성들은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당신이 이런 짓을 하느냐고 따지고 대들었습니다. 무슨 표적을 자기들에게 보이겠느냐고 다그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이 성전은 짓는 데 무려 46년이나 걸렸는데 어떻게 네가 삼일만에 일으키겠느냐고 물었고, 그들의 생각에 이 말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말이었기에 괘씸하다고 여기며 기억하였다가 끝내 십자가에 못 박는 죄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이 말씀이 너무 지나치다고 여기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예수님이라고 하시지만 어떻게 46년에 걸쳐 지은 건물을 단 사흘만에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까? 물론 못할 것도 없으시겠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먼저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과 못 박힌 십자가 상에서 하시는 말씀이 자세히 나오는데,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직후에는 어떤 말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오. 성경은 예수님의 숨이 끊어지셨다고 말한 후에 과연 무엇을 기록할까요?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슬프다고 말할까요? 아니면 로마 군인들이나 일반 백성들의 행동거지를 비판하는 내용을 말할까요? 같이 직접 성경을 보면서 확인하여 봅시다.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막 15:34-38)

놀랍게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내용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한 후에, 언급될 수 있는 내용이 많고 많을 터인데 왜 성소 휘장이 찢어진 것을 말하고 있을까요? 이 휘장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고 있는 휘장입니다. 다섯 가지 색깔의 실로 짜 두께가 5mm에 이르러 양쪽에서 황소가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는 것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 휘장이 아래에서 위로 찢어졌다면 사람이 가위와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밑에서 찢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으셨습니까?

그것은 성전이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음을 나타냅니다. 성전의 용도가 폐기된 것입니다. 성전은 제사장의 주관하에 죄를 사하는 제사를 드리는 백성을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는 곳인데, 이제 예수님께서 모든 백성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성전에 제사용으로 사용되었던 흠 없는 짐승이 상징하고 예표하였던 실체가 십자가상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대제사장이 되어 자기를 제물로 하여 단 한 번에 제사를 완수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백성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렸지만, 이제 그런 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지성소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고, 그런 지성소를 갖고 있는 성전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물리적인 성전은 영원히 존재하는 성전이 될 수 없고, 이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상에 죽으실 때까지 잠정적인 역할만을 합니다. 영원한 성전은 물리적인 건축물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대제사장이 되시고,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진정한 성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은 물리적인 건축물로서의 성전을 말한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몸을 의미한 것입니다. 너희 눈에 보이는 성전이 예표하고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인데, 듣는 이들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건축물로서의 성전에만 사로잡혀 참된 의미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이 말씀을 기억하고 깨달았습니다.

성전에 관하여 우리가 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제 바로 우리가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없이 하셔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의로워졌으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있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거하셔서 우리를 항상 만나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기도하여 주십니다. 고전 3:16-17절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말합니다. 명백하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합니다. 물리적인 건축물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고, 바로 우리를 성전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우리를 거룩하게 해야하지 더럽히면 안 된다고 이어서 말합니다.

이제 맨 처음에 했던 질문, 교회를 위한 건물을 지을 때 교회당 건축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성전 건축이라고 해야 하는지에 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답은 당연히 교회당 건축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에 성전은 건축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성전 건축이란 말은 오직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만 사용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나머지 공사는 모두 회당 건축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회당과 신약시대의 교회당이란 말에는 "교"자라는 단어 하나의 차이밖에 없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성전 건축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지금 시대에 교회당을 건축하며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를 성전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사역을 부인하는 신성 모독죄에 해당하는 큰 죄입니다. 구약시대라면 돌에 맞아 죽을 소리입니다.

지금의 교회당 건물을 성전이 아니라 이렇게 회당의 개념에서 본다면, 너무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여 신성시하는 행위가 사라질 것입니다. 교회당은 성도들이 예배행위를 하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에 불과합니다. 결코 구약의 성전과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교회당이 다른 일반 건물과 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 가정은 저희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을 함부로 타인에게 개방하지 않습니다. 특히 안방은 더욱 개방하지 않습니다. 저희 부부만의 공간으로서 구별됨을 유지하고 싶어하여, 집을 개방할 때도 안방은 잘 개방하지 않습니다. 일개 집과 안방도 이러한데 교회당은 더욱 그런 면이 있습니다. 교회당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정돈되고 집중되도록 그 장소는 다른 장소보다는 신경을 써서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마음을 집중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평상시에도 언제든 방문하여 조용히 기도를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고 평안을 누리며 쉴 수 있도록, 다른 곳보다 더욱 정성스럽게 꾸미고 관리하며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장소를 민방위 교육 장소로 빌려주거나 정당의 연설 장소로 빌려주거나 어떤 업체의 제품 설명회 장소로 빌려준다고 생각하여 봅시다. 참석한 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아무데나 꽁초를 버리고 담배불에 의자나 커텐이 그슬리고, 정당 연설을 하다가 서로간에 싸우고, 물건값으로 흥정을 하며 시끌벅적하게 떠든다고 합시다. 그렇게 한 이후에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때 그 마음이 하나님께 쉽게 집중이 되겠습니까? 이 장소에만 오면 바로 하나님께 집중이 되며 마음을 완전히 터놓고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는 그런 분위기가 형성이 되겠습니까? 사람은 주위의 영향을 크게 받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교회당이 유지되면 교회당에 와서도 사회생활의 연속이라는 느낌이지 옷을 여미는 진지함과 구별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당은 반드시 다른 건물과는 구별되게 운영되고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당은 거룩한 장소가 되기 때문에, 한자 뜻 그래도 성전(聖殿)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회당 건축을 할 때 성전 건축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그런 교회들 중에서 구약시대의 성전 개념으로 성전 건축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특별한 이단이 아닌 한, 예수님의 죽음을 인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모두 인정하고 있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성전 건축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일반 건축물과는 다른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장소"라는 의미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지금도 성전 건축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럴 때는 구약시대의 성전 개념이 아니라는 설명이 꼭 필요하겠지요. 또 드러나게 말하지는 않지만 교묘하게 구약의 성전 개념과 연결시키는 행위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당 건축을 하게 된 이유는 갑작스럽게 좋은 땅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전철역에서 5분도 안 걸리고, 그러면서도 주위에 작지 않은 공원과 어린이 놀이터가 있어 나무와 꽃이 많고 한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곳을 본 분들은 서울에서 이런 곳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고들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거기다가 교회당이 없이 일반 건물을 임대하여 교회당으로 사용하면 임대료가 너무 비쌉니다. 또 건물주가 언제 비워달라고 할지 모릅니다. 교회가 교회 소유로 예배당과 교육실과 식당과 교제실을 갖고 있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는 적당한 가격에 나온 좋은 위치의 땅을 발견하고, 교회 소유의 교회당을 갖는 여러 이점을 생각하여 교회당을 건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결코 구약시대의 솔로몬처럼 성전을 건축해야 하는 당위성 때문에 한 것도 아니고, 교회당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아서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교회당 건축을 시도해보니 확실히 교회당 건축에는 많은 비용이 듭니다. 생각지 않던 많은 문제들도 발생하여, 우리 교회는 많은 시간과 관심과 정열을 이곳에 쏟아 부어야 했습니다. 원래 건물을 짓는 건축 자체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부지 선정과 설계와 시공과 감리와 준공에 있어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수시로 의사결정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물론 건축위원회라는 의사결정기구가 있지만, 개인이나 회사가 건축물을 짓는 것보다 의사결정과정이 복잡하고 성도들의 다양한 선호에 따라 여러 의견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도 중에 컴퓨터에 관계된 일에 종사하는 분들은 많은데 건축에 관계된 일을 하시는 분은 안 계셔서 더욱 생소하고 힘든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건축 비용을 제외한 문제는 조금 삐걱거리더라도 시간을 갖고 대화를 통해 해결이 되는데, 건축 비용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돈이 있어야 삐걱거리더라도 다른 일들이 진행되지 돈이 없으면 모든 일이 중단되게 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건축 비용을 충당하는데 있어서 각 교회의 경험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구약의 성전 개념으로 성전 건축을 하자고 하면 성도들이 무리를 해서라도 헌금을 많이 하는데, 신약에서는 우리가 바로 성전이고 지금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당 건축을 하는 것이라고 하면 헌금에 임하는 자세가 다소 가벼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들이 자꾸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쓰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우리 교회라고 이런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며 혹 독자들이 출석하시는 교회에서 앞으로 교회당 건축을 할 때, 성전 건축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벼워진 자세로 관심을 덜 갖고 헌금을 덜 할까 걱정이 됩니다. 교회당 건축이 사치스럽고 호화스럽게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교회당 건축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성도가 많아지면 수용할 공간이 있어야 하고, 학생들을 교육시킬 장소가 필요합니다. 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주변 학교에 강당을 지어주고 그 강당을 주일과 수요일에 사용하든, 아니면 가건물 형태로 교회당을 짓든 여하간에 장소가 필요합니다. 이 때 반드시 비용이 필요합니다. 가건물로 짓는 것이 결코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이 아닙니다. 가건물은 수리와 보수라는 측면에서 보면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비용이 들 수 있고, 미관이라는 중요한 측면에서도 희생을 해야 합니다. 

각 교회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교회당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건물로 짓기도 하고, 미관을 특히 더 고려하는 교회도 있고, 무엇보다 공간을 많이 확보하려는 교회도 있고, 주변 학교의 강당을 쓰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모두 비용이 적지 않게 발생합니다. 이 때 성도들은 풍성하게 헌금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각 성도들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 교회당이 마련되는 것이지,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성전을 건축하고 보수 유지하는데 구약 백성들이 풍성하게 헌금을 하듯이, 지금도 각 성도들은 교회당 공사에 풍성하게 헌금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각 성도들의 헌신과 희생을 보시고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체가 성전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구약 백성은 물리적인 건축물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지만, 우리는 이것이 상징하고 예표하던 실체를 보고 있습니다. 구약 백성보다 더 판명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헌금과 헌신에 있어서도 구약 백성보다 더욱 풍성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의식이 더욱 풍성하게 있으므로, 헌신과 희생에 있어서도 더욱 풍성하게 있어야 합니다. 각 교회가 성전 건축이 아니라 교회당 건축이라는 말을 쓸 때 더 풍성하게 헌금이 이루어진다는 사례를 더욱 듣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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