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진 인형: 1993년에 쓴 글 | 정요석 | 2017-03-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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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93년에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보봐리즘"과 함께 기존의 문학책을 인용하여 쓴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글인데, 분량이 짧아 깊이 다루지는 못했습니다. 제목: 바람과 함께 사라진 인형(the doll gone with the wind) 노예문제에 대한 남부인들의 견해와 관행, 그리고 남북전쟁을 남부인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재현했다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출판되던 해에만 150만 부가 팔렸고, 비평가들에 의해 사건이 극적으로 잘 전개되고 풍부한 어휘력과 다양한 표현력을 갖췄다고 호평받은 작품이다. 하지만 비판적인 비평가들은 깊은 사상과 철학적인 의의가 없고 내용에 비해 작품의 길이가 너무 길다고 지적한다. 여주인공 스칼렛이 두번의 결혼생활을 하면서까지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애슐리의 본질을 알고난 후, 내내 혐오해왔던 현재의 남편 레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白眉)이다. 아마 이 부분마저 없었다면 이 소설은 인간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접근했다고 볼 수 없는 통속적인 역사소설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애슐리라는 사람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의 환상 속에서 살고 있었을 뿐이야. 나는 뭔가 내가 만들어낸 걸 사랑했던 거야. 나는 내손으로 고운 의상을 만들어 그것과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던 거야. 애슐리가 태라에 찾아왔을 때, 너무도 특이하고 아름다웠기에 그 의상이 그에게 어울릴지 어떨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나는 그 사람에게 입혀 버렸던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이 사실은 어떤 인간인지 살펴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거야. 내가 지금까지 줄곧 사랑해온 건 그 예쁜 의상이었던 거야……. 그 사람 자체는 아니었던 거야." 스칼렛은 자기가 애슐리를 몸부림칠 정도로 왜 그리워했는지 애슐리의 부인이 막 죽은 후에서야 이유를 깨달았다. "난생 처음으로 애슐리라는 인간을 진심으로 알게 된 것 같아"라는 스칼렛의 독백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애슐리의 부인이 죽어 막상 애슐리와 결혼을 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 닥쳤을 때다. 그와 동시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토록 혐오해왔던 바로 자기의 남편 레트였던 것도 깨닫는다. "모든 것을 그에게 말해야겠다. 그이는 알아줄거야. 언제나 나를 이해해주었으니까."라는 자신감으로 레트에게 달려가 "전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오래전부터 사랑했어요. 전 바보였기에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거예요. 레트, 제 말을 믿어줘요!"라고 말을 했을 때 뜻밖에도 레트의 응답은, "그전 같으면 당신한테서 그런 말을 들으면 단식이라도 하며 하나님에게 감사했을 거요. 그렇지만 이젠 전혀 무의미하지……나의 사랑은 식었소……내 사랑은 식은 거요." 스칼렛 하나 때문에 인생을 살아온 듯했던 레트가 갑자기 사랑이 식었다며 스칼렛을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스칼렛이 애슐리 자체를 사랑하지 않고 스스로 만든 환상과 사랑을 속삭인 것을 깨달았듯이 레트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레트도 자기가 사랑했던 것은 스칼렛 자체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든 스칼렛에 대한 환상였던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입센이 쓴 <인형의 집>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남녀간의 "떠남"이란 극적인 사건으로 글이 마무리 된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요한 입센은 처음엔 낭만주의적 희곡을 썼다. 그러다가 가정과 사회의 인습과 허위를 적발하여 학대받는 민중과 여성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회극을 써 명성을 얻었다. "인형의 집"은 그의 대표적인 사회극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는 유형은 약간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떠남"의 한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부인 노라는 깊이 사랑하는 남편 헬머가 병이 들자 치료비를 마련하려고 친정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하여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렸다. 자존심 강한 남편이라 돈 빌린 사실조차 비밀로 했다. 남편한테 헤프게 살림을 한다는 질책까지 받으며 돈을 절약하여 갚아나갔다. 병이 나은 남편은 승승장구하여 곧 은행장에 취임하게 된다. 고리대금업자는 남편 헬머에게 부인 노라가 서명을 위조해 돈 빌린 사실을 알리며 자기를 은행에 채용해달라고 협박한다. 남편은 이 협박을 받자 자기의 사회적 체면이 손상될 것에만 관심을 두고 노라의 곤경과 심적 어려움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부인을 비난하고 화를 냈다. 다행히 노라의 친구가 관여하여 일은 잘 해결된다. 그러자 남편은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노라에게 관심과 호의를 보인다. 하지만 노라는 바로 그날밤 평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당장 집을 떠나겠다고 남편에게 선포한다. 노라: 저는 이 집에서 가엾게도 그날 벌어 그날 먹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 왔어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당신의 노리개감이 되어서 그걸로 밥을 먹고 살아 왔어요. 당신은 언제나 저에게 무척 친절했지만 우리의 가정은 다만 놀이하는 방에 불과했어요. 친정 아버지한테서 제가 어린 인형으로 취급되었다면 여기선 큰 인형 취급을 당했던거예요. 그리고 저 아이들이 또한 저의 인형들이었어요. 저는 당신이 저를 가지고 놀아 주셨을 때는 정말 즐거웠어요. 이것은 마치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같이 놀아 주면 아이들이 좋아하던 거와 다름없어요. 그것이 우리의 결혼이었어요. 헬머: 노라! 노라: 저는 저 스스로를 교육해야 되겠어요. 거기에는 당신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저는 저 혼자서 제 자신을 꾸려 나가야 해요. 저는 제 자신의 발로 서야겠어요. 제 자신을 발견하고 또 제 환경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기 위해서요. 그래서 저는 당신 곁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요. 헬머: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꼭 한 가지 해석을 내릴 수 있겠군. 노라: 네, 그래요.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에요. 저는 이미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 …… 헬머: 당신도 나도 달라져야 한다니? 어떻게? 노라: 말하자면 우리들의 동거 생활이 하나의 결혼 생활이 되도록......그럼, 안녕! (현관을 거쳐 밖으로 나간다.) 노라는 남편이 귀여워 해주니까 그것을 사랑으로 알고 지내왔으리라. 그런데 남편이 극한 상황에 이르러 사랑의 모습을 전혀 안 보여주자, 남편의 자기에게 대한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자기 자신이 독자적인 관찰과 판단을 가진 한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감정과 이성이 없이 외모만 아름답고 깜찍한 인형으로서 남편에게 대접받고 있었던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된다. 노라는 남편 헬머의 본질을 알게되며, 스칼렛과 같이, 본질이 아닌 환상의 것과 사랑을 속삭였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남편을 떠나게 된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스칼렛과 노라와 같이 사랑하는 대상을 잘 못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의 선입관과 편견이 무의식중에 깊이 작용하여 사랑하는 대상이 실제로 어떠한지 냉철히 살펴보지 않는다. 뚜렷한 근거 없이 이 사람은 이러할 것이라고 그림을 그려나간다. 그러다가 이 사람은 이러할 것이다라는 자기암시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고 만다. 한꺼풀 눈에 씌인 그리움과 절실함이라는 막은 실제로 그 대상이 그렇게 보이게끔 한다. 근거 없는 감정에 의한 황당한 그림이 현실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반대로 자기가 싫어한다고 규정해버린 외모나 행동거지를 하는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은 이러한 사람일 것이다라는 또 다른 황당한 그림으로 치닫는다. 특히 전 인생의 관점이나 온갖 인간 관계의 관점이 아니라, 결혼 적령기의 관점과 달콤한 연인관계란 관점만으로 이성(異性)을 보는 사람일수록 더욱 심하다. 역시 근거없는 감정에 의한 편견과 오만으로 자기가 싫어하고 기피하는 이성상을 그려놓는다. 그런 사람과 접촉을 거부하고 어쩔 수 없이 말을 할 때에도 마치 인심을 쓰듯이 한다. 스칼렛은 사랑하는 두 남자를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두를 잃어버렸다. 애슐리를 이해했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고, 레트를 이해했다면 그를 잃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이 이성을 자기최면과 편견과 구름같은 낭만으로 좋은 사람을 놓치고, 옳지 않은 사람을 선택하여 혼자 사랑에 빠지고 진면목을 안 뒤 허망함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지는 않은가……. 노라는 세 아이를 낳고서도 그간 인형의 역할을 한 사실에 기겁을 하고 남편을 떠나야만 했다. 이렇듯 인형이란 대상으로 사랑받고 대접받는 즐거움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결혼한 분들에게 인형의 역할만을 했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 가정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인형의 집>은 코펜하겐에서 처음 공연되었을 때 여성해방의 바이블이라고 갈채를 받은 반면에, 결혼의 신성함과 가정을 파괴하는 좋지 않은 작품이라고 비난도 받았다. 필자 스스로도 노라의 행위는 현실의 상황과 미래의 가능성을 무시한 경솔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또 여성들에게 여성해방이란 미명하에 자기주장을 강하고 확실하게 해서 물러서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부부 피차간에 사랑으로 온전히 섬길 것을 말씀하셨지, 논리나 억지 섞인 주장으로 이기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필자가 말하려는 바는 인형의 역할을 거부하고 집을 뛰쳐나오기까지 한 노라와는 달리, 주위의 많은 사람이 실아(實我)를 접어두고 오히려 가아(假我)인 인형 역할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사랑받고 싶은 이성에게 좋든 나쁘든 어떤 한계를 가진 당당한 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인형처럼 주인이 하는 데로 맡겨지고 대신 귀여움과 보호만을 받기를 원한다. 자기의 전 생(生)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자기를 알아가는 하나님의 일에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異性)이 좋아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일에 바쳐진다. 그러한 삶은 때때로 남편에 대한 순종과 부인께 향한 사랑이란 미명하에 자기 인생의 귀중한 면을 의식하지 못한채 지내게 된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자기들에게 어떤 달란트가 있고 그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하는 지도 몰라 온전한 충성에 이르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사랑하는 이성을 위해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까지도 하게 된다. 인형의 역할을 하는 부인과 남편에 대해 각각의 남편과 부인은 곧 싫증을 느끼고 인형을 실제로 버리듯 버릴 수 있다. 버리진 않더라도 존경하지 않으며 깊게 대화 나누지 않고 삶을 나누지 않는다. 노라의 말처럼 결혼 생활이 아닌 동거 생활만이 있을 뿐이다. 이혼이란 형태를 취하지 않을지라도 실제로는 이혼과 다름없는 단순히 장소와 시간의 공유에 지나지 않는 결혼 생활의 존재라니……. 우리는 스카렛처럼 이성(異性)을 환상으로 보다가 실망하여, 또 노라처럼 이성에게 인형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한 우리의 초라한 모습에 낙담하여 총총히 "바람과 같이 버려지는 인형"이 되는 슬픈 경우를 당하지 말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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