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1996년 봄에 쓴 글 | 정요석 | 2017-03-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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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신학교 다닐 때인데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께서 Francis A Schaeffer의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the Reason)를 읽고 독후감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 때 동문서답식으로 이 글을 썼지요. 1993년에 글을 쓰고 3년만에 쓴 글인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글입니다. 그 이전의 글이 신학적인 면에서 투박하다면, 이 글부터 신학적 냄새가 안정되게 스며들기 시작한 듯 합니다. 제목: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춘수(金春洙, 74) 시인의 대표시, "꽃"의 전문입니다. 어느 때 이 시를 애송했나요? 아름다운 장미 한송이의 빛깔과 향기에 접할 때인가요, 아니면 마음에 둔 이성을 그리워하며 그의 사랑을 얻고 싶을 때였나요? 이도 아니면 또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꽃"과 같은 김춘수의 초기시가 쉽게 읽힐 수 있는 이유로 세 가지가 말해지곤 합니다. 첫째는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아(自我)와 그의 주변 세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 질서내에서 시를 통해 대화를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삶에 대한 치열한 탐구입니다. 인생과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모든 만물의 실존과 그것들의 상호관계는 무엇이며, 또 사람과의 관계는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도 사춘기를 맞으며 비록 정도의 차는 있지만 다 가졌을 법한 근본물음입니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을 것에 이름을 불러줌으로 꽃이란 의미를 부여한 그는, 자기의 실재에 맞는 이름 얻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 의미가 되고 싶고, 타자(他者)와 올바른 관계설정을 맺고자 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이 그의 초기시 "부재"에 인생의 무상함과 덧없음과 아울러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부재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복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없이 져 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靑石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 일 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사람이란 본디 무의미한 것을 참을 수 없나 봅니다. 끊임없이 유의미를 찾아 여러 시도를 하는 것이 사람이겠지요. 자아와 주변세계에서 본인의 의사와 상관도 없이 무의미를 느껴 버린 사람에게 천형으로 내려진 것은 "유의미의 탐구"일 것입니다. 유의미를 찾아 나선 김춘수의 그 이후는 어떠한 것일까요. ㅜ ㅉ ㅣ ㅅ ㅏ ㄹ ㄲ ㅗ 바보야 ㅣ ㅂ ㅏ ㅂ ㅗ ㅑ, 역사가 ㅕ ㄱ ㅅ ㅏ ㄱ ㅏ 하면서 ㅣ ㅂ ㅏ ㅂ ㅗ ㅑ, 처용단장 제3부 39의 일부입니다. 의미를 찾아 나선 그에게 다가선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무의미"였습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탐구와 여러 시도의 편력은 그를 단지 고독한 "허무"의 세계로 인도했을 뿐입니다. 위의 시에서, 언어는 해체되고 의미는 단순한 소리로 분해되었습니다.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언술의 세계가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무의식적인 언술의 세계가 되버렸습니다. 1922년생인 그가 1952년에 "꽃"이란 시를 발표하고, 30년 동안 의미를 찾아 나선 그의 긴 여정은 이렇게 귀결되었습니다. 그는 <의미에서 무의미까지>란 시론(詩論)에서 그의 힘든 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나는 어느 새 허무를 앓고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이 허무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이 허무의 빛깔을 나는 어떻게든 똑똑히 보아야 한다. 보고 그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라고 하는 안경을 끼고는 그것이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말을 부수고 의미의 분말을 어디론가 날려 버려야 했다." 삼라만상 모든 것들을 확인할 수도, 신뢰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어 자기세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 김춘수. 실재를 놓쳐 감각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불가지론에 빠지고 끝내는 허무를 안고 뒹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슬픈 詩人, 김춘수. 그의 다음 길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허무의식은 당연히 역사적, 시대적 차원에서의 허무의식을 내포하겠지요. 그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91년까지의 나의 시작(詩作) 주변>이란 그의 시론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현실무감증 현상이 노출되고 역사에 대한 회의가생기면서 이기적인, 도피적인, 또는 방관자적인, 무관심주의적인 상태로 나는 현저히 기울어져 갔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81년 4월부터 4년 간 국회 문공위원으로 국회의원 활동을 하는 한편 예술원 회원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이제는 밝혀 말하기를 꺼려하는 정계 입문의 이유를 추측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역사적 허무의식을 갖는 그에게 역사는 탈역사적으로 와 닿을 수 밖에 없고 당연히 역사 감각의 결여가 생길 것입니다. 가벼운 정계 입문! 그의 의미를 찾는 여정이 낳은 당연한 결과 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결과들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많지만 그의 성경관을 알아보는 것이 가장 흥미있는 듯 합니다. 그는 <통영 바다, 내 마음의 바다>라는 자전수필에서 뜻하지 않게도 "성경의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맨발로 갈릴리호수를 걸어가서 제자들이 탄 배가 하마터면 돌풍에 휩쓸릴 뻔했던 것을 제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물론 글자 그대로는 시인되지 않는다. 우리의 이성은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성서의 그 기록을 시인해야 한다. 발 두 개를 가진 직립동물이 물 위를 걸어갈 수는 없다. 제 무게로 가라앉는다는 그것은 물(物)의 이치다. 그러나 세상에는 심리의 세계의 진실이란 것이 있다. ………… 예수의 그 가능성은 물리적인 그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그것이다. 예수는 이승에서 물리적인 차원에서는 기적을 한 번도 이룩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한계라고 하는 물리적인 장벽을 예수는 심리적으로 극복했다고 할 수 있다면 그는 역시 기적의 사람이다." 마치 성경의 비신화화 작업을 한 불트만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의미를 찾아 나선 김춘수는 의미 획득을 위해 어떤 방법을 택했나요. 그의 3형제는 모두 경기중학교를 다녀 수재 집안으로 신문에 실리기까지 했답니다. 많은 수재가 그러하듯, 그는 그의 "합리적인 이성"을 방법으로 택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세 편의 시만 봐도 그의 자연에 대한 관찰력과 언어분석력을 알 수 있습니다. 삼라만상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아 삼라만상 모두를, 아니 언어와 관념까지도 그는 낱낱이 분석했습니다. 분해했습니다. 그리고 분해한 결과로 그가 거둔 노획물은 "무의미"입니다. 허무는 무의미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겠지요. 하지만, 사람이란 유의미를 추구하는 강한 속성을 지닌 존재이지요. 당위적이고 필연적인 의미를 사냥하거나 부여하는 것이 사람의 생인 듯 합니다. 김춘수인들 무의미가 좋았겠습니까? 출구 없는 방에 갇힌 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무의미를 벗해 사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그도 도약을 꿈꾸었습니다. 의미의 세계로 비약의 날개를 펼쳤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그의 성경관은 어떤 내용 다음에 나오는지 아십니까? 그 내용들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그럴 때는 두 발을 가진 직립동물이 왠지 자꾸 슬퍼지기만 한다. 사람은 구제될 수 없는 것일까? 사람의 능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왜 사람은 죽어야 하고 늙어 가야 하고,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바다를 맨발로 갈 수도 없는가?…………이럴 때 우리 앞에 예수가 나타나고 그의 기적이 나타난다. 바로 성서의 그 기록 말이다." 허무에는 면역이 없습니다. 김춘수는 허무가 밀려올 때마다 몸서리 쳤을 것입니다. 보통의 일반인이라면 의미찾기 작업을 진작에 포기하고 대충 망각해가며 일상의 소일거리에 파묻혀 그럭저럭 생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합리적 이성에 의한 진리탐구에 충실한 그였기에, 예수와 그의 기적이 나타나면 무의미와 한계성의 문제가 해결됨을 알면서도 그는 그의 진리 인식 방법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이성 활동은 시간과 공간이란 틀에서만 작용을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그 어떠한 것도 그는 인정하지 않고 그가 인식하는 시간과 공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해석을 해야만 됩니다. 그러기에 그가 성경 속의 예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가 그렇게도 힘든 무의미와의 처절한 싸움에서도 버리지 않은 그의 이성의 절대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의 작용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도약이 있어야 됩니다. 비이성으로 도약하여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정말 이러하나요. 믿음이 생겨 참자유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와 허무를 탈출하려는 욕망에서 이성을 포기하고 비이성적으로 자기도취와 확신을 하는 것인가요. 즉, 타협과 도취 속에서 자유를 맛보기 위해 믿음을 선택하는 것인가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실제로 역사상의 시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5:3-6절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구절 앞의 두 구절은 이 구절들이 어떤 목적을 수행하나를 보여줍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란 고전 15:1,2절의 말씀을 통해 복음은 바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믿는 것이 결코 이성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성에게 올바른 위치와 가치를 부여합니다. 이성에게 참된 자유와 역할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토대 하에서만 기능을 하는 이성에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내용을 알려주어 그 전제하에서 추론하도록 해 줍니다. 이성만으로 닫힌 인식체계에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그 체계 밖의 것을 알려줌으로 그 체계 내에서 올바른 자리매김을 하게 합니다. 무한을 제한 없이 자유롭게 다루는 대표적인 학문이 수학입니다. 수학은 정의(definition)와 정리(theorem)로 진행됩니다. 정의 자체에 의해서 모순되지 않는다면(well-defined) 수학은 아무 규제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롭게 보이는 수학도 공리(axiom)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직관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공리에 대한 전제 없이는 수학이란 학문도 아무 추론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언 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딤후 3:15-17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여,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식의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가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 계시의 전제 없이는 우리에게 남는 것은 김춘수 시인처럼 무의미와 허무뿐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피조물의 뜻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뜻입니다(롬 8:20). 하나님은 지식의 열쇠를 우리에게 주신 분입니다(눅 11:52). 우리 각자를 가장 잘 아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우리의 이름을 불러 우리로 진정한 꽃이 되게 하는 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시편 139편은 이에 대해 정확한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have search me), 나를 아셨다고(know me) 시 139:1이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겸손하게 이러한 내용이 자기가 알기에는 너무 높은 차원의 것임을 6절에서 고백합니다. 우리 각자를 완벽하게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 과정을 전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유한한 존재입니다. 아! 바로 그 주님이 오늘도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며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우리의 이름을 불러 우리로 진정한 꽃이 되도록 지금 이 순간에도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한한 이성에서 탈출하여 무한한 하나님께 전적으로 접목되어 이성의 자유함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문을 엽시다. 그리고 그의 꽃이 됩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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