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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센 팔을 가진 리브가와 라헬: 1993년 3월에 쓴 글 정요석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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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um.onmam.com/bbs/bbsView/15/5243297

이 글은 밑에 있는 "에서와 야곱은 요리사"에 이어서 쓴 글입니다. 그리고 2003년 조금 수정을 했고요. 2004년에 글을 올리면서 분량을 다소 줄이느라 또 손을 조금 보았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요리사"처럼 재미있게 읽어주십시오. 


제목: 억센 팔을 가진 리브가와 라헬

바람직한 남성상은 시대와 지역을 따라 변한다.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특히 우리 나라처럼 급격히 근대화가 이루어진 나라에서는 이상적인 남성상이 동시에 몇 개가 혼재하게 된다. 가부장적인 남성상도 있고, 하면 된다는 시대의 영향을 받은 불굴의 남성상도 있고, 풍요와 tv의 영향을 받은 시대에서는 곱상한 외모의 깔끔한 매너를 갖춘 남성상이 있게 된다. 거기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희생하며 섬기는 남성상과 그러면서도 불의와 타협치 않는 강직함의 남성상이 깃들어 있기도 한다. 이런 복잡한 남성관이 각 개인에게 혼재되어 있어 어떤 경우에는 이런 남성상으로, 저런 경우에는 저런 남성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어쩌면 이런 몇 가지 얼굴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다.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겨울에 내복을 입지 않았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바지 하나만을 입고 견디었다. 그렇게 내복을 입지 않고 견디게 된 큰 이유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그 때 50대이신 선생님은 우리 반만이 아니라 전 학생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분이셨다. 술도 잘 드시고 동료 선생님들로부터도 정말 남자다운 분이라는 평을 들으셨다. 그런 분이 추운 겨울날 아침 조회 시간에 무슨 말을 하시다가, 당신의 바지를 걷어 올리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무리 추워도 아직까지는 내복을 입지 않으신다면 추위로 벌개진 다리를 보여주셨다. 그 장면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나도 모르게 남자라면 아무리 추워도 내복을 입어서는 안된다는 신념 아닌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아무리 추워도 진정한 남자라면 내복을 안입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나는 체질적으로 추위를 잘 타는 편이다. 아마도 고기를 잘 먹지 않아서 아닌가 나름대로 추측을 해 본다. 나는 군대를 다녀오기 전까지는 고기를 잘 먹지 않았다. 비위가 약해서 그런지 아니면 동물을 죽여 먹는다는 선입관 때문인지 고기를 잘 먹지 못했다. 고기를 잘 먹지 않아 몸에 지방기가 없어서 그런지 여하간에 추위를 잘 탔다. 늦가을 정도만 되어도 사무실 같은 데서 가만히 있다 보면 추워서 무언가를 덧입어야 할 정도이다. 결혼을 한 후에는 다소 괜찮지만 총각 시절에 여자들도 춥다고 하지 않는데, 건장한 청년이 춥다며 열린 창문을 닫거나 잠바를 덧 입는다고 생각하여 보라. 본래 부끄러움이 많은 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치욕적인 순간들이다. 그런데도 나는 내복을 입지 않았다. 한겨울에도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생고생을 한 것인가? 1학년 담임 선생님처럼 남자답고 멋있는 사람은 한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는다는 개념 때문에 치른 고생이다.

그런데 결혼을 한 후에 아내가 내복을 사왔다. 겨울에 내가 춥다며 옷을 하나 더 껴입는 것을 보고 사온 듯 하다. 예전 부모님들이 입던 두꺼운 빨간 색의 내복이 아니라, 얇으면서도 디자인이 세련된 내복이었다. 아내는 내 자존심을 살피며 은근하게 몇 번 권했다. 아내의 성의와 권유도 있고, 내가 알던 두꺼운 빨간 내복이 아니라 산뜻한 얇은 내복인지라, 매우 추운 겨울 날 한번 입어봤다. 내복은 생각보다 매우 따뜻했다. 추위를 한결 덜 타게 할 뿐만 아니라, 내복을 입어도 활동하는데 전혀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내복을 입은 이후로는 어쩌다 깜박 하고 내복을 입지 않은 날은, 추운 바람이 그대로 피부를 파고드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내복을 입지 않는 것이 얼마나 몸에 해롭고, 난방비도 훨씬 더 드는 행위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이후에는 겨울만 되면 내복을 입는다. 누구의 말마 따나 군인의 날에 옷장에서 내복을 꺼내서 식목일에 내복을 집어넣는 정도는 아니지만, 여하간에 겨울 일찍 꺼내서 봄이 충분히 오도록 입고 있다. 

나는 탁구를 좋아하여 자주 치는 편이다. 겨울에도 자주 친다. 탁구장에 가보면 봄 여름 가을에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의외로 겨울에 가장 많이 있다. 추우면 오히려 운동을 더 하고, 조금이라도 날이 더워지면 몸이 나른해서 그런지 운동들을 잘 하지 않는다. 양복을 입은 채 탁구장에 가면 운동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나는 내복을 입고 있으므로 옷을 갈아입게 되면 당연히 내복을 입은 것이 들통이 난다. 결혼하기 전 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서 내복을 입은 채 운동복으로 갈아입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남성상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조금 바꾸니, 내복을 입는 것에 관해 전혀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럽고 치욕적인 느낌이 들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저는 추위를 잘 타서 내복을 입습니다."라고 떳떳하게 말을 하게 되는 솔직함이 생겼다. 

나는 이런 일을 통하여 추위를 타는 것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남성상으로 보건대 조금은 부끄럽고 치욕적일 수 있는 것들도 기꺼이 인정하게 되었다. 드러내놓고 알리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바람직한 남성상을 인해 감추어 두었던 내 약점들이 진정 약점인지 살펴보며, 이것은 남성의 약점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갖는 사람의 약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부끄러움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어찌 남성뿐이겠는가?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님 세대로부터는 수줍음 타는 전통적인 여인상을 체득하고,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는 학교 교육으로부터는 근대적인 여성상을 배우고,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점점 덜해지는 산업사회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중요하지 않고 능력이 중요하다는 기능주의 여성상으로 변해 간다. 이러한 여성관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내재해 있다가 처한 상황에 따라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표출되며, 간혹 타인과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곤란한 불일치를 선사하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것은 급격하게 변하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일 것이고, 어쩌면 어느 시대에나 장소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다양한 여성상으로 인한 편차가 적다면 오히려 이것이 정상이고 건전한 것이라고 본다. 다만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성경이 말하는 바람직한 남성상과 여성상으로 나아가면 된다. 지금부터는 우리 나라에서 바람직한 여인상으로 잘못 여겨지고 있는 여인의 육체적인 힘과 체력에 관한 오해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신뢰하는 종에게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해오라는 큰 일을 맡겼다. 그가 아브라함의 고향에 도착하여 리브가를 보았을 때 그녀의 모습은, 급히 물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약대를 위하여 긷는 모습이었다.(창24:20) 또 야곱이 라헬을 우물가에서 처음 보고 반했을 때의 장면도, 라헬이 그 아비의 양과 함께 우물가에 와서 양들을 치는 장면이었다(창29:9). 이런 단편적인 모습이 아니라, 성경은 잠언 31장에서 현숙한 여인이 어떠한지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현숙한 여인은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상고의 배와 같아서 먼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밭은 간품하여 사며 그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심으며, 힘으로 허리를 묶으며 그 팔을 강하게 하며(She sets about her work vigorously. her arms are strong for her tasks.) (잠 31:13-17)

단편적인 성경 장면보다 이와 같은 현숙한 여인에 대한 서술이 바람직한 여인상에 대해 이 시대의 우리에게 분명하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 현숙한 여인은 이와 같이 강한 팔을 갖고 열심히 육체적인 일을 하는 여자이다. 이것은 여자가 부끄러워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여인상이다. 오히려 권장되었고, 이삭과 야곱은 그런 여인에게서 강한 매력을 느꼈다.

내가 잠시 영국에서 공부할 때 이런 여인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성들이 힘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또 힘을 쓸 수 없을 만치 연약한 여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과(科)에서 등산을 간 일이 있었다. 옆에서 같이 산을 오르는 여자의 짐이 무거운 듯하여 도와주겠다고 제의하였다. 사양을 하는 그녀에게 동양 남자라 연약해 보여서 그런가 생각하며 어깨에 힘을 주며 다시 한번 제의를 했다. 한국의 남자가 야만인이 아닌 여자의 약함을 보고는 도와주고 말아야 직성이 풀리는 신사임을 보이고 싶어 거듭 제의를 한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귀찮은 표정의 짜증 섞인 목소리로 강한 "No, thank you!"였다. 무안한 나는 주위를 돌아봤고, 주위의 그 어떤 영국 신사들도 여자들의 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여자들도 그런 기대를 하는 눈치가 아니었고 또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기들의 짐을 들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다리와 억센 팔을 갖고 있었다. 산을 오르는데 남자들보다 딱히 뒤지지도 않았다. 영국인들은 건물에 들어갈 때 문을 열고서는 뒤에 사람이 오는가를 꼭 살피고, 뒤에 오는 사람이 열린 문을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준다. 특히 뒤에 오는 사람이 여자라면 조금 먼 거리에 있어도 기다린다. 어린 남자라도 뒤에 자기보다 훨씬 나이든 큰 여자가 와도 문을 잡고서 기다린다. 왜 신사라고 하는지 느낄 수 있는 한 장면이다. 그런데 등산을 가며 무거운 짐을 진 것에 대해서는 도와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다. 20대 때 합기도를 몇 년간 했다. 물론 좋아한다고 하여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몇 년 합기도를 했다고 해서 몇 단의 유단자가 되는 것도 아님을 나의 모습에서 슬프게 확인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다니던 영국 대학 유도부의 연습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 일인가? 한국과 달리 남녀가 떨어져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한데 섞여 연습을 하는 것이다. 나는 당장 유도부에 가서 누구든 연습에 참여할 수 있는지 확인한 후에 바로 도복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연습에 참여했다. 합기도에는 유도와 비슷한 기술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던지고 꺾고 낙법을 할 수 있었다. 기초적인 유도의 기술을 이미 습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씨름과 같은 경기를 통해 이미 대부분 균형 감각이 어느 정도 있는데, 거기에다 합기도의 유단자이니 자신이 있지 않겠는가?

나는 부푼 마음을 안고 연습에 참여했다. 하지만 나는 곧 처참한 낙담감을 맛보아야 했다. 억센 팔을 가진 여자들의 우악스런 손에 나의 알량한 기술은 통하질 않았고, 몇 번이나 체중이 실린 그들의 매치기에 내동댕이 당하였던 것이다. 얼마나 당하였던지 후들거리는 다리로 연습장을 빠져 나오며 가슴 속 깊이 다짐한 것은 "절대로 서양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아야지!"였다.

이 글을 읽으며 나를 비웃는 남성들이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내가 나약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국의 레스터셔 보건 당국이 내가 영국 유학을 할 무렵인 1992년에 가정폭력 표본을 조사한 341건의 부부간 폭력 사례를 보니, 남편이 피해자인 경우가 45%로 아내가 피해자인 경우 17%보다 월등히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남성피해자의 19%는 부부싸움 끝에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그 억센 팔에 심하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 "매맞는 남편"의 가출이 크게 늘자 "가정은 아빠를 필요로 한다"는 이름의 남편권리 보호단체는, 런던에 피학대 남성보호소를 개설하기까지 했다. 한국 남성들이여! 웬만한 무술의 달인이 아니라면 서양 여자와 결혼할 생각을 품지 마시기 바란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영국의 날씨처럼, 참으로 속마음을 알기 힘든 영국 남성들은 영국 신사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아내구타"(wife battering)로 정평이 나 있어 교과서에 실릴 정도이다. 그런 남자들에 맞서 여자들이 동시에 얼마나 남편을 구타했으면 피학대 남성보호소가 생기겠는가? 그런 정도로 남자를 구타하는 여자라면 물론 그 성질이 소위 하는 말로 더러운 독종이겠지만, 성질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기본적으로 억센 팔이 따라주기 때문에 남성을 기절까지 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이유 없는 다이어트 열풍에 휩싸여 있다. 서구 사회를 갔다 오신 분들은 한결같이 살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국 여성은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 나라 여성 중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다이어트가 전혀 필요 없는 사람들이고 오히려 살이 더 쪄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허리가 잘룩하고 다리가 날씬하고 바람에도 휘청거릴 그런 몸매를 이상하게 매력적으로 본다. 무거운 가방은 들기에 부담스러워 남성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인이 매력적인 여인으로 오해되고 있다. 힘을 잘 쓰지 못하는 나약한 여인이 멋있는 것으로 착각되는 어이없는 일이다.

아마 나도 서구 사회의 경험이 없었다면, 이런 여인을 매력적으로 알고서, 이런 여자와 결혼하여 힘든 일은 내가 다하는 비극을 맛보아야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구 여인은 강하다. 튼튼하다. 그 체력에서 나오는 힘으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놀기도 열심히 한다. 아마 그런 분위기인지라 사회 곳곳에서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왕도 여자이고, 대처라는 걸출한 여자 수상도 배출한 듯 하다. 나는 영국의 이런 여인들을 보며 한국에서 보지 못한 튼튼함과 열정에서 배어나오는 듬직함을 여자에게서 느꼈다. 그런 듬직함이 여자의 매력과 멋이 되는 줄 그 때 강하게 느낀 것이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나는 허리가 굵은 여자와 결혼했다. 내 아내를 처음 보았을 때 얼굴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튼튼해 보이는 체격과 굵은 허리와 듬직한 엉덩이가 믿음직스러웠다. 영국에서 보았던 그 듬직한 매력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데이트를 세 번째 하는 날 등산을 하자고 제안했다. 외모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도 튼튼하고 진취적인 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내 아내는 추운 늦가을의 날씨임에도 거침없이 산을 올랐고 즐겼고 나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같이 탁구도 쳐 보았는데 공에 무게가 실려 묵직하게 되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억센 팔을 갖는 여인이 되기에 기본적인 자질이 풍부한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더 살펴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배우자로 결정하고 며칠 후 정식으로 프로포즈했다.

여자의 미는 결코 약함에 있지 않다. 한 순간 매력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낭만적인 연애 생활이 끝나면 남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요소는 아니다. 자식들에게도 좋은 요소는 아니다. 한국의 많은 여성들이 가사와 직장 일을 너무 해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분들에게 억센 팔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이분들은 이미 억센 팔을 가진 멋있는 분들이시다. 여자의 미를 약함과 화장과 같은 외모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강조하고자 한다. 아무래도 미혼 중에 그런 분들이 많다고 본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은 한국 여자처럼 화장을 많이 하는 나라가 드물다는 것이다. 화장을 하려면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가? 다른 나라 여자들은 한국 여자처럼 일찍 일어나 화장할 만큼 부지런하지 않다. 학생들은 공부를 하기에 너무 바쁘다. 그들은 한국 여학생들처럼 멋을 부리지 않는다. 청바지와 티로 간단히 멋을 내지, 평일에도 화사한 옷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 날은 대부분 주말로 파티에 가는 날이다.

화장은 "여러 가지 화장품을 기교적, 예술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피부를 '미화'(美化)시키고 용모를 다듬어서 매력을 돋구어주기 위하여 행하는 미용술을 말한다"로 정의되어 있다. 대학 다닐 때 화장품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때 교육을 받으며 들은 내용이다. 화장품은 "인체를 청결 또는 '미화'(美化)하기 위하여 도찰, 살포, 기타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사용되는 물품으로써 인체에 대한 작용이 경미한 것을 말한다."로 약사법 2조 8항에 정의되어 있다. 정의에 나타난 바같이 화장으로 인한 아름다움은 원형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아닌 미화된 아름다움이다. 미화된 아름다움은 오래 갈 수 없고 약간의 시간만 지나도 들통이 나고 만다. 그러기에 잠시 동안만 손님에게 아름다워 보이면 되는 술집 작부들이 그렇게 진한 화장을 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는 화장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바로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그렇게 했다. 이세벨이 아합 왕과 이스라엘에 미친 악영향이 얼마나 큰가? 그녀의 딸 또한 다른 왕의 아내가 되어 망하게 했다. 그런 자가 화장을 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지, 현숙한 여인이, 온전한 아내들이 화장을 미로 여겼다고 나와있지 않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화장이 멸망 앞에서 소용없음을 알리신 말씀은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너의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렘4:30)이다.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너희 단장은(your beauty)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great worth in God's sight)이니라."(벧전3:3,4)이다. 잠언 31:30은 화장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맨 얼굴 그대로 얻는 고움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거짓되고 헛되다고 말한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만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본연 그대로의 고움과 아름다움이 이럴진대 화장과 옷으로 미화된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그런 화장에 우리 나라의 여성이 과도하게 시간과 돈과 정열을 쏟아붓다니......

필자는 그렇다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매들이 육체적인 미에 대하여 전혀 신경을 쓰지 말아야 되고, 자매들이 화장을 하는 이유는 미화된 아름다움만을 얻기 위해서이고, 또 화장의 기능과 역할은 이것뿐이라고 주장하는 바가 아니다. 이것은 더 깊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 개인적으로는 여자들이 장소와 때에 따라 화장과 옷으로 멋을 부리는 것을 선호한다. 멋을 잘 부린 여자는 미라는 측면에서 분명히 즐거움을 준다. 화장과 옷 또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이것도 일종의 예술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미에 대한 관심을 더 주셔서, 이 세상은 그런 여자들을 인해 아기자기해지고 따스함이 있고 썰렁한 가정이 아름다움이 있는 편안함으로 바뀐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화장을 하기에 앞서 기본적으로 리브가와 라헬처럼 억센 팔을 길러, 그 억센 팔로 육체적인 일도 거뜬히 하고, 그래서 힘든 상황도 뚫고 나가는 듬직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이 인격이 뒷받침되지 않고 이기적이고 교만스럽고 무례할 때 얼마나 그 얼굴이 표독스러운지 모르고, 미운 얼굴보다 더욱 정이 떨어지는지 모른다. 참된 미와 동행하는 외모가 의미가 있지, 결코 외모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억센 팔은 참된 미를 강화하는 요소이지, 결코 감소시키는 요소가 아니다. 억센 팔을 길러 미와 매력을 더욱 빛나게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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