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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와 야곱은 요리사: 1993년 3월에 쓴 글 정요석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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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93년 3월에 썼습니다.  청년 때입니다. 이 글을 읽은 기성 작가 한 분은 1993년에 나온 글 중 가장 재미있는 글에 속한다는 호평을 해주었습니다. 

 

제목: "에서와 야곱은 요리사"

에서가 야곱에게 그의 장자권을 파는 장면은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라는 문구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 문구에 관한 NIV 영어성경의 표현은 "when Jacob was cooking some stew..."로써 야곱이 분명히 요리를 하고 있었음을 개역성경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또 이삭은 임종을 앞두고 자기의 아들 에서에게 축복을 하기 전에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별미"(tasty food)라는 단어 속에서 에서는 어쩌다 한번 해보는 그런 요리사가 아니라 자주 요리를 해서 특별한 솜씨를 갖추고 있던 요리사였음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을 보면 그 당시에 남자들이 "요리"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일부 남자들은 특별한 요리 솜씨까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자들도 요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던 관습은 아마도 그리이스, 로마 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듯하다. 이 당시에 귀족이 될 수 있는 자격 요건의 하나가 바로 요리솜씨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흉내낼 수 없는 최소한 한 가지 요리솜씨를 갖추어야만 귀족이라고 불리었던 것이다.

남자가 요리를 하는 것이 결코 비성경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천만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남자들이 요리를 맘껏 해 볼 수 있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음은 실로 유감스런 일이다. 이런 비성경적인 전통이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린 것은 유교의 정신을 잘못 해석한 데 기인한 바 크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서는 안되고 더군다나 남자가 요리를 한다는 일은 어불성설이라는 개념은 와전된 유교사상이다. 본디 부엌이란 무수한 살생이 행해지는 곳이다. 그러한 곳을 어떻게 자연의 법칙과 인생과 도를 논하는 거룩한 선비가 들어갈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선비들은 부엌 출입을 금했던 것이지 요리를 하면 그것이 떨어지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엄한 유교식의 가정교육 하에서 자란 나의 어머니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오면 그것이 떨어진다며 부엌출입을 금하신 분이다. 그것 없이는 오줌도 못 눌 것이라는 생각과 그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듯한 어른들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항상 부엌을 피해 돌아다녔었다. 그러다 국민학교 1학년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님은 외출을 하셨는지 식사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셨다. 배고파하는 아들을 본 아버님은 부엌으로 용감하게 (최소한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들어가셔서 라면을 끓이기 시작하셨다. 몹시 배가 고팠던 나는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아버지가 어떻게 되나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부엌에 잠시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니고 한참 동안 요리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 그렇듯 나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게 정을 더 느끼고 있었고 더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행위는 매우 위험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효성으로 나는 오줌을 1시간이 넘게 참았다. 화장실을 갈 때 같이 가서 확인해 보아야겠다는 나름대로의 기막힌 생각이 감수해야 했던 고통이었다. 화장실로 가는 아버지를 뒤뚱뒤뚱 따라가며,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아버지에게 "아빠, 나도" 하며 좇아 들어갔다. 진지함과 다급함으로 얼룩진 나의 표정을 보신 아버지는 동석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나는 시원한 오줌 줄기와 함께 안도의 숨을 쉬며,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무사하셔서 다행이었지만 나에게는 풀기 어려운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였다. 그것은 왜 어머니께서 거짓말을 하셨느냐 하는 문제였다. 내 인생의 첫 고민은 이렇게 어머니의 신뢰성 여부에 대한 문제로 시작되었다. 같은 또래의 남자보다 성숙하기 마련인 여자아이들의 얌체 같은 행동과 욕심에 자주 당했던 나는 이렇게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비겁한 여자들이 자기들만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을 때 언제나 먹기 위해서 만든 거짓말이야."

나는 그때부터 음식건에 관해서는 어머니를 불신하였다. 아버지와 나는 제쳐 두고 누나와 함께 몰래 맛있는 음식을 먹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반대급부로 그런 역경 속에서도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살아온 아버지는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 없었다.

어머니의 요리법을 멀리서 주의 깊게 관찰한 나는 부모님이 모두 외출한 어느 날 드디어 요리행위를 감행하였다. 김을 많이 해주는 여자에게 장가를 가겠다고 할 정도로 몹시도 김을 좋아했던 나는 어머니가 넣어 둔 김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불 위에 얹어 놓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혹시 그것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일어났다. 그래서 만져보기도 하고, 그리고도 불안해 옷을 내려 눈으로 확인까지 하였다. 확인하는 사이에 이미 김은 다 타 버렸다. 그렇게 첫 번째의 요리작품은 실패로 끝났다. 곁에서 지켜보던 것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김을 굽는 횟수가 증가할수록 나의 손에도 잘 구워진 김이 검정과 녹색의 빛으로 조화를 띤 채 먹음직한 모습으로 들려져 있었다.

그 날 나는 질리도록 김을 먹었다. 그렇게 포만감을 느끼며 승리감에 도취해 있을 때 부모님이 들어오셨다. 늘어진 식기들과 김으로 입 주위가 얼룩진 나의 모습에 놀란 어머니에게 나는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가차없이 바지를 내리고 보여주며, 서슴없이 외쳤다.

"내 거 그대로 있다."

하지만 그후로도 나의 부엌 출입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불에 쉽게 오그라들어가며 다양하게 변하는 김의 모습, 그 김의 따스한 온기, 나는 그것을 또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여전히 집에 아무도 없을 때뿐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스코틀란드의 Aberdeen으로 유학을 갔다. 요리에 한이 맺힌 나는 손수 요리를 해서 식사를 해결하는 기숙사를 선택하였다. 남자 6명이 같이 생활하는 아파트 같은 곳이었다. 그 중 당연히 나의 요리솜씨가 가장 뒤떨어졌다. 맨처음 요리를 전혀 할 줄 몰라 금쪽 같은 시간을 허비하며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우리의 와전된 관습과 남자에게는 요리 교육을 시키지 않는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에 대하여 할 말이 대단히 많다.

남루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까지 절약을 하는 매우 실용적인 중국 친구들이 먹는 것에는 전혀 돈을 아까워하지 아니하였다. 요리 솜씨 또한 대단하여 현란한 칼놀림과 자유자재의 후라이 팬속에서의 주걱 놀림으로 무럭무럭 김을 내뿜는 음식을 잘도 만들어냈다. 독일인 친구는 쇠고기 스튜를 비롯하여 이름도 잘 모르는 여러 요리를 잘도 해냈고, 간간이 간식용으로 만드는 스파게티와 피자 등의 솜씨로 나의 기를 죽였다. 영국인 요리사가 있는 곳은 지옥이라는 농담을 비웃듯 영국 친구들도 닭과 돼지고기로 다양한 음식을 만들었다. 나는 그 옆에서 간장과 김으로 밥을 먹을 뿐이었다. 한국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느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그릴에 구운 베이컨과 라면을 내보이며 이따금 쇠고기와 누들(noodle)도 먹는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였다. 정말이지 처음에는 배가 고파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친절한 독일친구가 몇 가지 요리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그의 설명법으로는 내가 원하는 맛이 나오지 않았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양념과 약간의 조리법의 차이로 내가 원하는 맛을 찾아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 요리는 바로 창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파게티 쏘쓰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그 맛이 모두 다른 것이었다. 여하간 나는 맘껏 창작욕구를 즐길 수 있었다. 많은 실패 끝에 참으로 맛있는 참치찌게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먹고 난 뒤의 지저분한 부엌과 식기를 청소하는 일도 생각했던 것처럼 지겨운 일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설거지처럼 그렇게 지저분한 것이 그렇게 삽시간에 깨끗이 청소되는 일도 드물 것이다.

그렇게 실력을 연마한 뒤에 나는 내 생일날 한인교회 남녀청년회원 10명을 기숙사로 초대하여 내가 손수 만든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칭찬을 이구동성으로 자매들로부터 들었다.

"오빠, 장가가도 되겠어요!"

하지만 나는 아직도 우리 집에서는 부엌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장가를 간 친구집에 가도 이러한 관념은 거의 깨뜨려지지 않고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여자들은 요리와 설거지로 부엌에서,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노느라고 방에서, 공간적으로 정확히 구분되어 있다. 나도 피곤을 느낄 땐 그런 구분이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잔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마도 옛적에 여자가 주로 요리를 담당하였던 것은 사냥, 농사, 양치기, 전쟁과 같은 힘든 일에서 육체적으로 남성보다 강하지 못한 여성들을 보호해 주려는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분업이었을 것이다. 결코 흑백논리식으로 남자와 여자의 일로 명확히 구분된 것은 아니다. 힘든 직장일을 끝마치고 오는 남편에게 내내 집에 있던 부인이 요리까지 시키는 것도 옳지 않지만, 같은 맞벌이의 경우 일방적으로 부인에게 요리나 가사일을 요구하는 것도 옳지 않다. 또 가정주부라고 할지라도 남편이 쉬는 주말에는 남편이 피곤을 느끼지 않는다면 요리를 요구할 수 있고 또 남편은 요리권을 누릴 권리가 충분히 있다.

요리권을 박탈당한 우리 집에서 빨리 벗어나 요리권을 누리고 싶은 나의 바램은 내가 결혼하고 싶은 이유 중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제발 나한테는 남자가 부엌에 가면 안된다는 것은 와전된 사상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매가 걸려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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