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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20040324 작성 정요석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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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004년 3월 23일( 새롭게 하소서 방송이 나가자 전화를 여러통 받았습니다.

그 중 오늘 아침에 멀리 전주로부터 온 전화가 특히 마음에 남습니다.
어떤 일로 인해 마음에 문득문득 분노가 일고 마음의 평안이 깨지는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는 상담 전화였습니다.
어제 저는 규장문화사에서 나온 "용서의 기술"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쓴 글들 중에 "복수와 용서"에 대해 쓴 글이 있네요.
이 글을 올립니다.
이 글은 작년(2003년)  3월 12일에 썼습니다.
민원을 낸 분들과 그리고 제 마음에 편치 않았던 일들을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목회단상"은 말 그대로 짧은 글이어야 하는데 계속 긴 글이네요. 하지만 앞에 있는 글들보다는 짧습니다. 앞에 있는 글들은 A4로 10장이라면 이번 글은 4장 분량입니다.

제목: 가장 잔인한 복수, 방치(放置)
부제: 어디 더 잔인한 복수가 없나요?

남을 용서하지 않고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는 것은 손에 뱀을 들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물게 하려고 뱀을 들고 있지만, 뱀은 상대방을 물기 전에 들고 있는 손을 물고 맙니다. 빨리 뱀을 내려놓는 것이 물리지 않는 길이라며, 용서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고 있으면 당사자가 먼저 힘이 듭니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마음이 들끓어 본인이 편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타격을 가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악수를 두게 됩니다. 많은 경우 상대방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본인도 손해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복수는 양쪽 모두 승자가 되는 게임이 아니라, 양쪽 모두 패자가 되는 더러운 게임이 되고 맙니다.

신명기 32:35절은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2:19절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원수를 갚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원수 갚는 일을 맡겨야 하는데 무언가 이 말씀만으로는 부족하고 성이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복수심을 버리지 못하고 마음 속에 칼날을 갈고 있습니다.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순수한 사람들이 간혹 목사도 스트레스를 받고 분노하고 복수심을 갖느냐고 반색을 하며 묻습니다. 목사를 선하게 보는 그분들의 시각에 고마움과 황송함을 느끼며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회라는 것이 사람을 상대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 상대하는 일처럼 기쁘고 보람있는 일도 없지만 동시에 이것보다 더 힘든 것도 없습니다. 목사는 스트레스에 상당히 노출된 자리입니다. 목사들끼리 모이면 얼마나 떠들썩하게 노는지 모릅니다. 목사는 성도와 같이 있으면 아무리 좋은 자리라도 항상 긴장을 합니다. 목사로서 요구되는 행동거지와 처신에 신경 쓰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목사를 만나야 편하고, 그래서 목사님들끼리 만나면 같은 직업의식에 긴장을 풀고 마치 아이들처럼 논답니다."

목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기 때문에, 복수심을 품어서는 안된다는 당위성이 누구보다 큽니다. 그러기에 같은 복수심을 일반인처럼 느끼면서도, 그 감정을 인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모릅니다. 설교하는 자로서 이런 감정을 품고 느낀다는 자체가 부담스럽고 민망스럽고, 그런 감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본인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자연히 이런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는 비결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동시에 가장 적합한 복수는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되고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뿌린 데로 거둔다는 뜻이겠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이것을 관찰해내고, 원수에 대해 하늘에 맡기기도 합니다. 사필귀정이란 한자어도 그런 사람들의 관찰을 나타내는 마음이고 그런 사람들의 소망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사람이면 인생을 살며 선한 행동에 선한 보답이 있고, 악한 행동에 악한 보답이 있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느낍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도 이런 인식은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연한 생각이었고 그러기에 흔들리는 견고함입니다. 너무 분노되는 자가 있으면 당장 복수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는 것이지요. 그러던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이 일에 확고해졌습니다. 그렇게 되는데 있어서 성경이 당연히 큰 역할을 했습니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이에 다윗의 소년들이 돌이켜 자기 길로 행하여 돌아와서 이 모든 말로 그에게 고하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찰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소년 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삼상 25:10-17)

다윗이 나발에게 선대를 베풀었건만 나발은 이것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그러자 분노한 다윗은 자기 사람들과 함께 칼을 차고 나발과 그 온 집을 해하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스스로 복수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나발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발이 한 행위를 악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다윗이 나발에게 행하고자 하는 복수는 정당한 응징인 듯합니다. 그런데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이 말을 듣고 즉시 떡과 포도주와 양과 곡식과 건포도와 무화과를 풍성하게 준비하여, 도중에서 다윗 일행을 만납니다. 그녀는 그를 만나자 아래와 같이 말하여 다윗의 노를 진정시킵니다.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엑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종이 내 주에게 가져온 이 예물로 내 주를 좇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삼상 25:24-27)

다윗은 그녀의 지혜를 칭찬합니다. 그녀가 자기로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막았다며 칭찬을 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자기에게 보내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비가일이나 다윗이나 모두 믿음이 대단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 악한대로 갚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이말로 다윗을 진정시키고, 분노에 휩싸여 친히 피를 흘려 보수하려던 다윗은 이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립니다. 하나님에게 나발에 대한 보수를 맡기고 오던 길로 돌아서 갑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 그 집에 배설하고 대취하여 마음에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이 밝는 아침까지는 다소간 말하지 아니하다가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다윗이 나발의 죽었다함을 듣고 가로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삼상 25:24-27)

나발은 한 열흘 후에 죽었습니다. 죽은 이유를 성경은 여호와께서 치셨다고 합니다. 정말로 여호와께서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아비가일과 다윗의 믿음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즉시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나발에게 당한 욕을 신설하사, 자기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행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그는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쫓을 때에, 사울을 오히려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서 죽이지 않는 믿음의 행위를 바로 앞에 있는 사무엘상 24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는 이유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고 있는 사울을 죽이지 않고 나온 다윗은 사울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사울을 치는 일을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왕에게 보복하실 것을 믿고 그는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26장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공교롭게도 사무엘상 24장, 25장, 26장이 모두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쫓는데, 오히려 다윗이 그들을 죽이는 기회를 잡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사울을 죽이자고 말하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삼상 26:9-10).

다윗은 여호와께서 사신 것을 믿은 것이고, 그분이 악행한 자에게 그대로 갚으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는 사울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예상까지 했는지도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울은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여 죽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24장과 25장과 26장을 살펴봤습니다. 24장과 26장은 다윗이 사울을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친히 보수하실 것을 믿고 죽이지 않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 25장에 다윗이 나발을 친히 보수하려고 하는데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말함으로 중단시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도, 수시로 흔들리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24장에서 다윗은 사울에게 친히 보수하지 않는 믿음을 보이지만, 25장에서는 친히 보수하려고 합니다. 물론 대상이 24장에서는 하나님이 기름을 부은 왕이고 25장은 일반 백성이지만, 그래도 친히 보수한다는 공통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다윗이 24장에서처럼 냉철하였다면, 그는 나발의 행위에 대한 보고를 받고도 보다 온유하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발의 악한 행위에 대한 보고를 받고 너무 흥분하여 쉽게 맹세까지 해버립니다. 25:22절을 보면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답지 않는 경솔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을 해놓고, 아비가일의 말을 들은 후에는 나발을 치는 행위를 그만둡니다. 결과적으로는 자기가 말한 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물론 입밖에 나온 말을 지키려고 더 악한 행위를 하는 것보다는, 자기 말을 번복하는 것이 때로는 더 지혜로운 행위이고 더 많은 용기와 절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분명 지혜롭고 용기있고 절제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가능케 한 자가 누구입니까? 아비가일입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이 틀린 일을 하려고 할 때 그를 깨닫게 해준 사람이 있은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좋은 믿음의 상태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항상 절제가 잘 되는 것도 아니고 항상 올바른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때에 올바로이 방향을 잡아주고 지혜의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다윗은 나발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사환들을 아비가일에게 보내어 다윗이 아내로 삼고자 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아비가일도 그 말에 화답하여 급히 일어나 나귀를 타고 다윗에게 가 아내가 됩니다.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은 아비가일의 지혜를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할 뻔했는데 아비가일이 지혜롭게 행하고 말하여 멈출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자기 가까이에 있다면 더욱 하나님을 깊이 섬길 수 있고, 더 깊은 믿음의 세계를 누릴 수 있고, 변화가 적은 일관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다윗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나발이 죽자마자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아마도 아비가일은 결혼을 해서도 다윗에게 이런 지혜의 말을 통하여 그를 격려하고 적절히 권면하였을 것입니다.

나발과 다윗, 사울과 다윗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어찌 이 뿐이겠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이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러 번 보여줍니다. 에스더만 해도 얼마나 극적입니까? 하만이 모르드개를 완전히 제압하여 곧 죽일 듯 했지만 하루 사이에 완전한 역전이 이루어집니다. 오히려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만이 준비한 나무에, 하만 자기가 죽임을 당합니다. 역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극적으로 보수하시는, 등에 땀이 흐를 정도로 두려움이 드는, 장면입니다.

성경의 예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장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멀리 우회하시며 일하시지만 반드시 그분의 시간표에 따라 가장 적합하게 일하심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합니다. 다윗도 친히 보수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는 합니다. 다윗도 분노하면 그렇게 즉각 노골적으로 반응하려고 했다는 것이 우리의 죄성과 약함을 많이 위로합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도 그런 실수를 하는데 하물며 우리야 얼마나 자주 스스로 복수하려고 합니까? 얼마나 자주 분노로 해가 진 후에도 잠을 설치며 뒤치닥거립니까? 우리는 더욱 우리에게 아비가일과 같이 지혜의 말씀을 해줄 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우리의 죄성을 억눌러야 합니다. 우리의 흥분과 조급함을 억제하기 위하여 더 깊이 자주 묵상해야 합니다. 복수는 결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잔인한 복수를 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그 일에 있어서 깨끗한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악하다면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에게 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가장 처절한 복수를 하고자 한다면 하나님 앞에 의롭게 행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까지 살피시고 사람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동기까지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일에서 손발을 모두 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방치하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살펴보십시오. 가장 잔인한 복수가 하나님에 의해 집행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손에 피를 하나도 묻히지 않은 채 그 복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손발을 모두 빼고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여유가 있습니다. 복수심으로 불타는 그런 맹렬함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순화되고 정제된 마음 상태로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완벽한 복수가 있습니까? 이것보다 더 마음을 정화시키며 할 수 있는 복수가 있습니까? 가장 잔인한 복수는 우리가 끼어 들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방치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유일하게 더 강력한 복수는 로마서 12:20-21절뿐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하겠지만, 이것이 안되면 최소한 차선책으로 그냥 방치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손에 든 뱀을 내려놓고, 방치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뱀을 손에 잡고 있는 동안에는 신경쓰느라 자유가 없습니다. 방치의 자유를 누려봅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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