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옆에서: 20040314 작성 | 정요석 | 2017-03-10 | |||
|
|||||
제목: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부제: 뒤안길이 없는 인생의 풍화작용이 있나요? 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사람들이 짓궂어서인지 아니면 사람 본연의 호기심 때문인지, 분야를 막론하지 않고 누가 최고인지 자리매김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 현대시의 최고봉으로는 누가 손꼽힐까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서정주 시인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가 왜 최고인지 명확히는 모르지만, 이 시만 보아도 그의 범상치 않음이 배어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는 있습니다. 우리 한번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의 대표시를 감상해보도록 합시다. 여러분은 이 시를 읽으며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특히 3연에 나오는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여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서정주 시인이 이 여인에 대해 언급한 글이 있습니다. 그는 국화 옆에서란 시를 쓰게 된 동기와 과정을 설명하는 글에서 "내가 이십대에 '소복(素服)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는 四十代의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면, '흥! 저 아주머니는 헬쓱한 게 밉상이야. 얼이 빠졌어!'하고 비웃었음에 틀림없을 것이지만, 인제 이 <菊花옆에서>를 쓸 무렵에는 어느 새인지 거기에도 한 서릿발 속의 국화꽃에 견줄 만한 여인의 미를 새로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언급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서정주 시인이 20대에 보았다면 비웃어주었을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여인이, 어떤 여인으로 바로 연상됩니까?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 자식을 낳고 별 일 없이 살아가는 평안한 여인으로는 비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웬지 이혼녀로 보이기만 합니다. 아니면 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전전하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이제는 늙은 노모가 되어버린 친정 어머니에게 돌아와 쉬면서 젊은 시절의 삶을 하나씩 정리해가는 40대의 여인 같습니다. 또 시장 길목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웃집 아줌마 같기도 합니다. 특별한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면 겪게 되는 통과의례의 어려움을 모두 맛본, 그래서 특별히 많이 공부하지 않아도 인생이란 학교에서 불혹(不惑)과 체념과 직관을 배워가는 그런 여인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말해볼까요? 에스더라고 하기에는, 그가 부모를 잃어 인생의 쓴 맛을 보았지만 아직은 인생의 통과의례를 맛보았다고 하기에는 나이가 어려 보입니다.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잃고 경제적으로도 고생을 하였지만, 그래도 아직 나이가 어립니다. 실제로 겪은 인생의 체험들은 몹시 자극적이고 힘든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인생의 연륜이란 무게에 있어서는 웬지 가벼워 보입니다. 이들에게서는 자기의 부족함과 인격의 미성숙과 못난 성격으로 인한 큰 실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역경을 이겨내는 의지의 사람으로는 보이지만, 자기의 약점과 실수를 인해 자기를 학대하고 미워하는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실패와 실수와 못난 행위를 통하여 성숙으로 이르는 모습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현모양처에 오히려 가깝습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느낌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예수님에게 우물물을 전해준 사마리아 여인이 보다 가까울 듯 합니다. 그 여인은 남편 다섯이 있었지만 자기에게는 남편이 없다고 예수님에게 말한 자입니다. 남편 다섯을 만나려면 얼마나 모진 세월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 번째는 분명히 설레임입니다. 첫 시집을 가는 여인의 마음은 모든 것으로 가득 찬 듯 할 것입니다. 세상이 자기 것 같고, 세상의 행복은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는 듯 여길 것입니다. 거칠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결혼이 실패로 끝나다니요. 어찌 생각인들 한 일입니까? 몸도 마음도 지치고, 더러워졌다는 생각에 한 동안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자를 잘 못 선택해서라고 생각하며 조금은 더 냉철하게 두 번째 남자를 골랐을 것입니다. 이때만 해도 첫 번째 결혼식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화려하게 챙길 것은 챙기며 결혼식을 올렸을지 모릅니다. 비록 재혼이지만 행복하게 산다면 초혼 못지 않다는 생각에 열심을 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결혼 생활은 또 다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 네 번째 남편을 만나 결혼 생활을 하지만, 이미 몇 번째인지는 순서도, 횟수도 잊었습니다. 단지 남자 한 명과 같이 있다는 현실만이 들어올 뿐입니다. 그렇게 다섯 남자를 만났습니다. 이런 여인에게 결혼과 남자는 어떤 의미가 될까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예수님에게 끌려온 여인도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을 걷는 여인에 가깝습니다. 그를 끌고 온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이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 명하였다며, 예수님은 어떻게 하겠냐고 질문을 해댑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칠 기세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놓아두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이에 일어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곤,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땅에 쓰셨을까요? 우리가 한번 땅에 손가락으로 써봅시다. 무엇을 쓸 수 있습니까? 무언가를 땅에 정말 쓰기를 원한다면, 손가락으로 써서는 안됩니다. 최소한 돌이나 나무로 써야 합니다. 손가락으로는 그냥 끄적거리는 것입니다. 완성된 글자나 모양새가 아니라, 그냥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그렇게나마 풀고 표현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간음하는 여인을 현장에서 잡았으니 그들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여인에 견주어 자기들은 더욱 의롭게 보였을 것입니다. 정의를 집행하는 선의의 세력으로 자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습니다. 정말 그들이 의로운지, 정말 그들이 악을 진저리 나게 싫어하여 간음을 정죄하는 것인지, 그들이 여인의 죄를 보는 대신에 자기의 죄를 보도록, 그 시간을 벌기 위하여 예수님은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 척 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의미 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을 요한복음 8:9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정말 정죄하려고 했던 것은 그 여자의 죄가 아니라 그 여자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죄를 정죄하는 자는 상대방의 죄만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도 동시에 정죄합니다. 사람을 미워하여 사람 자체를 정죄하는 자가 상대방만을 정죄하고 자기에게는 한량없이 관대합니다. 예수님이 땅에 손가락으로 쓰시는 동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들의 양심에 그대로 명중되어, 그들의 양심을 울렸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자기들이 지은 죄도 동시에 본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갔습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이지 않습니까? 마치 나이순으로 줄을 서서 한 명씩 차례대로 나가는 듯한 느낌입니다. 아마 제일 늦게까지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모두 나가버려 어쩔 수 없이 나가버린 사람들은 서정주가 말한 20대의 나이에 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제일 늦게까지 남아 씩씩대다 겨우 자리를 떴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여인을 용서하냐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마지못해 자리를 떴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마리아 여인도, 간음한 여인도, 그리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여인도 기꺼이 마음 속 깊이에서부터 받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또한 젊음의 뒤안길을 걸어본 분들입니다. 기억하는 것도 있겠고, 이미 아득하여진 것도 있겠지만, 한 때 분명히 뒤안길을 걸어본 분들입니다. 사전은 뒤안길을 "한길이 아닌 뒷골목의 길", "햇볕을 못 보는 초라하고 음침한 생활"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상하지만 한길이 아닌 뒷골목의 길을 걸어봐야 하고, 햇볕을 못 보는 초라하고 음침한 생활을 겪어보아야만 사람이 됩니다. 이 길을 걸음으로,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하여 배울 수 없고, 법의 드러난 문맥으로 판단할 수 없고, 가슴 속 깊이서 눈물을 몇 번 흘러야만 배워지는 그러한 것을 배우게 됩니다. 뻣뻣한 목이 숙여지고 교만한 몸에 힘이 빠져야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인생의 깊고도 쓴 면들을 배우게 됩니다. 승자는 알지 못하고 패자가 실제로 되어야만 아는 씁슬한 맛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턱없는 자신감과 교만함으로 도덕과 윤리와 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자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고 말아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소쩍새가 우는 것과 국화꽃이 피는 것에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소쩍새가 울지 않아도 국화꽃은 잘도 피기만 합니다. 소쩍새가 우는 게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입니까? 소쩍새는 자기가 좋아서 울 뿐입니다.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우는 것도 그렇지요. 그런데 이렇게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들이 결국에는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들에 핀 국화 하나의 꽃핌을 위해서 이렇게 전 우주적인 참여가 있듯, 40대 여인의 안정과 성숙을 위해서도 전 우주적인 참여는 필요합니다. 인생을 살며 겪는 숱한 일들, 성숙과 깨달음을 위해 딱히 어떤 연관이 있어 보이지 않지만, 그것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어떤 것은 직접적으로 어떤 것은 우회하여, 어떤 것은 즉시 어떤 것은 먼 훗날 우리를 성숙시키고, 끝내는 인생을 관조토록 합니다. 이러한 관찰을 비그리스도인인 서정주 시인도 해내는 것이고, 아마도 이런 점들이 그의 비범함에 속하나 봅니다. 그는 이 시를 지을 때, 국화꽃을 보고 처음 시상을 품은 것이 아니라, 소복(素服)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는 40대 여인의 미에서 시상을 발견했습니다. 2,3년 그 표현의 그릇을 찾지 못한 채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날 문득 정원의 국화꽃을 보고 그 형상화 공작(工作)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3연을 제일 먼저 쓰고,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나머지 연들을 썼다고 합니다. 국화의 개화(開花) 과정을 통하여 어떠한 생명체라도 치열한 생명 창조의 역정을 밟고 태어난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 주는 이 시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 因緣說)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할 때, 그것이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강한 힘을 부여하는 인(因)과 약한 힘을 보태는 연(緣)과의 상호 결합의 결과로 본다. 이 시에서도 국화 자체의 힘(因)과 소쩍새·천둥·무서리가 봄부터 가을까지 작용(緣)함으로써 국화가 꽃을 피우는 것이다. 여기서 국화는 모든 생명체의 대유이자, 나아가 생명이 그러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된 상태의 상징이며, 동시에 시적 자아의 '누님'과 같은 40대 중년 여인이 도달할 수 있는 원숙하고 평온한 아름다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의 시를 평하는 양승준씨의 글입니다. 불교의 원인과 결과를 언급하는 것이 재미있어 적어봤습니다. 무엇이 근본 원인이 되어 다른 제반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관하여 철학과 여러 종교는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반 사람도 살면서 제일 원인에 대한 의문은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에 대해 불교는 모든 존재는 결과임과 동시에 원인이라고 봅니다.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강조하지, 남을 떠나 홀로 존재하는 절대적 자존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우주로부터 미생물까지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며 굴러간다고 봅니다. 이것이 현실적 관찰이지, 절대적 자존자를 인정하는 것은 몽매한 시절에 있던 어리석음이라고 봅니다. 우유를 발효하여 치즈와 버터로 만들려면 발효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너무 차가운 곳에 두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유가 아닌 물에 발효조건을 갖춘다고 해서 물이 치즈와 버터로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치즈나 버터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발효조건을 갖춰주는 동력인(動力因)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우유라는 질료인(質料因)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동력인을 인(因)이라고 부르고, 질료인을 연(緣)이라고 부릅니다. 원인은 직접적이고 연은 간접적이라는 입장에서 '친인소연(親因疏緣)'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 나라 말로 하면 먼 원인, 가까운 원인이 됩니다. 영어로는 제1차적 원인(primary cause), 제2차적 원인(secondary cause)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생각할 때, 먼 원인, 가까운 원인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살펴보기도 하는데, 단순히 보면 혹자는 비슷하다고 말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교인들은 이런 인연화합설을 가지고 인간의 흥망성쇠에 적용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외연(外緣)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상관없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반대로 아무리 외연(外緣)이 갖추어져도 사람의 노력과 능력이 없으면 역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위에서 본 양승준씨의 글은 불교의 이러한 인연설(因緣說)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사람 개인의 행동만이 아니라 소쩍새, 천둥, 무서리 같은 여러 환경 요소들도 개인의 성장사에 큰 역할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국화 하나가 꽃을 피는데도 국화 자신과 여러 환경들의 참여가 필요하듯, 40대 여인의 안정과 성숙에도 여인 자신과 그를 둘러싼 대소간의 여러 환경과 요소들이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평론가들은 이런 개념 하에서 미당의 시를 평하고 있습니다. 미당 서정주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의 많은 시가 직접적으로 불교를 다루고 있고, 불교 사상에 입각해 인간 구원을 시도한 《신라초》(1961), 《동천》(1969)이라는 시집도 있기 때문입니다. 필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불교의 세계관이 이 시에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성경은 사물의 처음과 끝을 어떻게 말하며, 제일원인에 대하여 무어라고 하며, 이 세상이 어떻게 유지된다고 말하는지 진리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국화와 같이 꽃에 대하여 언급하는 본문을 보겠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마 6:26-34) 들의 백합꽃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는데 잘 자라나기만 합니다. 들의 백합꽃도 피어나기 위해서는 봄부터 소쩍새도 울어야 하고 여름엔 천둥도 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합꽃과 국화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은 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꽃이 자라나는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의 꽃이 피어나는 데 전 우주적인 참여가 필요한데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꽃을 말하기 앞서 공중의 새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동물과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근원을 하나님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진행되는 논리는 공중의 새와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야 어떠하겠냐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베푸시며 전 우주의 참여를 통하여 더욱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노심초사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에는 우리를 입히고 기르게 하는 형태로 결말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앞에 보이는 일에만 신경을 쓰고 염려하면 됩니다. 지금 당장 닥친 일을 처리하는데 신경을 써야지, 알지도 못하고 영향을 미칠 수도 없는 내일 일을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불신입니다. 성경은 제일 원인과 이로 인해 연쇄적으로 발생되는 과정들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12연기론이라고 해서 12단계로 자세히 세분까지 하지만, 성경은 간단히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제하시고 주관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에 한정하여 생각하고 염려하라고 말합니다.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체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9-31절을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말합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땅에 떨어져 사람에게 잡힌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참새를 잡으려는 사람의 동기와 노력인 동력인(因)과, 그것이 가능하도록 받쳐주는 질료인(緣)이 모두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료인이라면 사람이 화살을 쐈다면 사냥을 허락하는 맑은 날씨와 화살의 진행을 방해치않는 적당한 바람과 공기의 저항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가장 적합한 길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보호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많은 참새보다 귀한 사람이야 더 하시지 않겠냐고 설의법으로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 원인과 가까운 원인의 근원이십니다. 사람과 환경 모두를 통제하십니다. 그 과정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오른손이 하시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실 정도로 우회하시며 일하시기도 합니다. 그렇게 멀리 우회하시며 일하시는데 어찌 우리가 과정과 단계를 알 수 있겠습니까? 오직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기르시고, 사람의 머리털을 다 세시는 분으로 그 어느 것보다도 사람을 더욱 사랑하시어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어떻게 기르시는지 보도록 합시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소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행 7:20-30)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그의 아비 야곱과 그의 형제 11명이 자식들과 함께 애굽에 내려와 살았습니다. 400년 동안 번성하여 넘치자 애굽이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애굽 왕은 태어나는 남자는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렸습니다. 모세는 바로 이러한 때에 태어났습니다. 그 어머니는 차마 죽이지 못하고 석 달을 기른 후에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담아 하수가 갈대 사이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애굽 왕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왔다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긍휼함을 느껴 궁중으로 데려가 자기 아들로 삼아 길렀습니다. 모세는 이 궁중에서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웠습니다. 공주의 아들로 그 당시 가장 앞선 학문과 문화와 매너를 배운 것입니다. 모세의 모친은 그를 하수가에 버렸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기르셨습니다. 애굽 공주가 하필이면 왜 그 때에 하수가에 나간 것입니까? 왜 모세를 담은 상자는 공주의 눈에 뜨인 것입니까? 공주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인 것을 알면서도 길렀습니다. 원래 본성이 착한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긍휼함을 느끼게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모세의 모친이 그를 하수가에 버림으로 해서 모세는 히브리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궁중의 앞선 학문과 문화와 매너를 배운 꼴이 되었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가장 앞선 학문을 가장 좋은 환경에서 가장 좋은 선생들에게 배웠으니 얼마나 총명하고 교양이 있으며 자신감이 넘치겠습니까? 공주의 아들로서 위엄도 갖춘 자였을 터이고, 궁중의 예의법도가 몸에 완전히 배었을 터이고, 패배와 2류를 모른 채 승승장구하며 자라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40년을 모세는 살아왔습니다. 모세는 40이 되었을 때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돌아볼 생각이 났습니다. 궁중에서 40년 배운 것으로 실력과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마침 그러한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으로부터 원통한 일 당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그는 동족에 대한 연민으로, 애굽 사람을 쳐죽였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이렇게 애굽 사람을 쳐죽이는 것을 형제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보고 자기를 하나님의 도구로 생각하리라고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튿날 다시 궁중에서 나와 보니 이번에는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번에도 바로 그 싸움에 개입했습니다. 그들을 화목시키고자 개입한 것입니다. 너희가 같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한 형제인데 왜 서로 해하느냐는 말을 하며 싸움을 말렸습니다. 그런데 이 어인 반응입니까? 싸움을 말리는 모세를 밀뜨리며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라고 대듭니다. 그러면서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고자 하느냐?"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애굽 사람을 죽인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퍼진 것입니다. 이제 모세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 들통이 났고, 그것도 우연히 죽인 것이 아니라 애굽 공주의 아들로 행세를 한 이스라엘 사람이 고의로 죽인 것으로 들통이 났습니다. 이런 그를 애굽의 왕은 죽이고자 찾고 있는데, 그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즉시 도망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미디안 땅으로 즉시 도망했습니다. 그리곤 달리 할 일이 없어 거기서 우연히 만난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아 살았습니다. 이러한 모세를 한 번 생각하여 보십시오. 공주의 아들로 모든 학문을 배운 최고의 지성인이 도망을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려고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오히려 배척을 합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착잡하겠습니까? 그가 도망한 곳 미디안 땅에서 그가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가 그곳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가 40년 동안 배운 학문과 경륜을 펼칠 만한 사회의 규모가 됩니까? 설령 그럴지라도 그런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신분과 위치를 거기서 모세가 획득하고 있습니까? 그는 양을 칠 뿐입니다. 우연히 만나 결혼한 여자의 아버지의 양무리를 치는 일 이외에 그가 할 일이라곤 없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양무리를 친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고급생활을 한 자가 40년 동안 양무리를 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양무리를 친 것이 아니라, 세월을 친 것이겠지요. 강태공이 그랬다지요. 고기를 낚은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은 것이라고. 세월을 치는 모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궁중에 있을 때는 세상을 삼킬 듯 하지 않았을까요? 모든 학문을 배우고, 피가 끓는 젊음이 있고, 지금까지 모든 일이 잘 풀려 공주의 아들로서 많은 걸 누리고, 그러니 어떤 거침이 있겠습니까? 앞에 태산이 막고 있어도 삼킬 듯 했을 것입니다. 이런 혈기가 있으니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도 함부로 죽였겠지요. 이 일도 잘 풀리리란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과 낙관을 갖고, 앞뒤를 돌아보며 깊이 생각함 없이 혈기대로 죽였겠지요.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무리를 치며, 광야 40년과 똑같은 세월을 보냈던 궁중의 40년을 뒤돌아보았을 것입니다.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겠지요. 바둑 두는 기사들이 바둑을 다 둔 후에 복기를 한다지요. 어떤 수가 좋았고 어떤 수가 나빴는지 한 수 한 수 검토하며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며 다음 판을 기약한다고 합니다. 모세는 수천 번, 수만 번 복기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이 어디에서 뒤틀리기 시작했는지, 자기가 어디에서 악수를 두었는지 살펴보고 또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그는 힘이 빠지지 않았겠습니까?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운 지식인이라는 자부심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뻣뻣한 목도 수그러들었을 것이고, 공주의 아들의 위엄과 교만도 꼬리를 내렸을 것이고, 교실에서 배운 학문을 단순하게 현실에 적용하려는 단순함과 무모함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모두 버렸을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환경과 틀에서 무려 40년을 보내며 새롭게 자기 인생을 짰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데 궁중에서 보낸 똑같은 세월 40년이 아마도 필요하셨는가 봅니다. 그만큼 사람의 내면은 복잡하여 잘 변하지 않나 봅니다. 그는 이제 80입니다. 80이면 노인입니다. 그렇게 늙도록 그는 복기를 했습니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여인네가 되었습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자라는 것을 깨닫는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공주의 아들로 여김을 받은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잘나서 애굽의 모든 학술을 배운 것도 아님을 그는 뼈가 시리도록 느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조금의 자부심도 우쭐댐도 모두 빠져나갔습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못나서 장인의 양무리를 친다고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이유없이 교만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유없이 자기를 학대하고 비하하지도 않았습니다. 인생의 화려함과 비참함이 꼭 당사자의 선택과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만이 아님을 알게되었기 때문에, 화려함에서 교만하지 않고, 비참함에서 비굴하지 않는 초연함을 배웠습니다. 자기의 손을 떠나 진행되는 자신의 인생을 보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 때 즈음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요? 회한의 기도를 드렸을까요? 자기를 다시 높여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자기의 잃어버린 세월을 찾아달라고 매달렸을까요? 장인의 양무리를 치는 초기에는 그러했을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원망도 많이 하고, 하나님에 대해 서운한 마음도 자주 표현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세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에 모세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40년의 양치기 생활 즈음에 그는 분명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지만, 그는 정녕코 너무나 크신 하나님을 깨닫고 그 감격에 눈물 겨워 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로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서게 하신 하나님이시여, 감사합니다. 저의 이 모습을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게 하고,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게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런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40년이 차자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그를 불렀습니다. 모세가 40이 되어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보겠노라며 애굽 사람을 쳐 죽일 때는 하나님이 돌아보시지 않다가, 이제는 다 늙은 늙은이가 되어 양무리만을 40년째 치고 있는데 그런 사람을 부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지도자로 쓰겠노라고 하나님이 직접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불렀을 때 모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모세는 몇 번이고 사양을 합니다. 완곡한 거절의 뜻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노를 발하시까지 할 정도로 모세는 거절합니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며 거절합니다. 자기는 말에 능하지 못한 자라고 변명을 하며 거절합니다. 하나님은 그렇다면 말을 잘하는 네 형 아론을 너 대신 말하게 할 터이니 가라고 말하십니다. 이렇게 몇 번을 거절하고서야 모세는 겨우 하나님의 명을 받습니다. 모세가 왜 이렇게 합니까? 괜히 튕겨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거절은 진심이 담긴 거절입니다. 40년 동안 양무리를 치며, 40년 동안 세월을 치며 교만과 우쭐이란 독성이 빠진 결과인 것입니다. 궁중에서 배운 학문에는 결코 나오지 않는 것들을 그는 40년의 양무리를 치는 생활에서 배웠습니다. 궁중의 어떤 스승도, 궁중 도서관에 있는 어떠한 책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을 그는 40년의 양치기 생활에서 배웠습니다. 궁중에서는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가 높아졌지만, 광야에서는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오히려 자기가 낮아졌습니다. 자기가 자랑할 것이 참으로 있는지 살펴본 것입니다. 자기의 순수한 힘만으로 이룬 것이 진정 무엇인지 살피고 또 살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거절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젊어서는 스스로 앞장서서 하려고 했던 그 일을 이제는 물러서서 따라가고 싶은 것입니다. 40년의 광야생활이 이렇게 만들었고, 40년의 풍화작용이 그를 이렇게 쪼고 다듬은 것입니다. 화려함과 비참함에 가슴 조이며 보낸 80년의 시간의 풍화가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함을 보이게 했습니다. 모세에게는 이런 과정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젊어서의 패기와 성급함이 온유로 바뀌어 갑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유한 자란 평을 받았습니다. 민수기 12:3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 두 사람이 "하나님께서 모세하고만 말씀하시느냐? 우리와도 한다"며 모세의 리더쉽을 드러내놓고 비난했을 때, 하나님은 오히려 모세를 온유한 자라고 평하며 칭찬했습니다.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욕심과 질투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리더의 권위와 명예가 별거 아님을 깨달으면 자기에 대한 질시도 눈 녹듯 사라질 것임을 모세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온유한 상태로 그들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모세 그는 이미 40년 동안 양무리를 치며 이것을 복기하고 복기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궁중에서 배우지 못한 명예와 질시의 진정한 모습을, 광야 40년 동안 수천 번 쌓고 헐은 애욕의 감정을 통해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듯, 온유함으로 그들을 대면하며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습니다. 모세의 생애를 보니 우리의 마음에 생채기 나게 한 그 사건들도, 그 아픔들도 모두 품어야겠다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그것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는 것임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궁중의 40년이었고, 무엇이 광야 40년이었습니까? 우리에겐 궁중도 광야도 모두 필요합니다. 학대하는 마음으로광야만이 필요하다고 여기지는 마십시오. 모세에게 궁중이 없었다면, 좋은 학문과 리더쉽에 대한 훈련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엔 전 우주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소쩍새의 울음도 천둥의 울음도 우리의 자양분(滋養分)들입니다. 한 때 몸서리치며 싫어했던 그 일들이 모두 소쩍새의 울음과 먹구름 속의 천둥소리가 되어 우리를 길렀습니다. 그 일들이 없었다면, 우리 중 다수는 저 딴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른 체, 잘 나가는 지상 생활에 취해 고속질주를 하고 있습니다. 설령 이곳에 있을지라도 정신은 다른 데 가고,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들의 꿈을 이루는데 사용되는 강력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축소되고 왜곡된 하나님만을 믿을 뿐입니다. 힘든 상황에 놓여있는 분이 계십니까? 필시 먼저 자기를 용납하셔야 합니다. 남이 자기를 용납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자기를 용납해야 합니다. 그런 어려움에 있게 된 것은 본인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떤 더 큰 원인과 보이지 않는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노력과 지혜로 임해도 매번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통제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에게 초점을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상황이 아니라, 상황의 조절자이시고 유지자이신 하나님을 인해 감사하고 기뻐할 줄 알아야, 최종 승리자가 됩니다. 잘 나가는 분이 계십니까? 자기를 관찰하며 잘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시면 한 순간의 거품인 줄 아시고, 결과를 즐기고 누리되, 동시에 반드시 모세처럼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지 화려한, 사회의 성공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공은 하나님이 주시기도 하고 빼앗기도 합니다. 주시는 자를 모르고 자기의 힘으로 성공이 된 줄 알고 뻐기는 모습이 얼마나 가소롭겠습니까? 참된 성공은 하나님을 알고 즐거워하는데 있습니다. 아직 여러분의 나이가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는 10대와 20대의 시간들입니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쉽고 아깝습니까? 분명 그 젊은 시간대가 좋을 것입니다. 그 젊은 시간대는 분명 그립고 아쉽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뿐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 너무 그것에 현혹되어 이리저리 방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너무 자신 만만해하지 마십시오.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이미 선 사람들의 사고를 배우기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젊음을 더 그립고 알찬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젊어서 늙은 이들의 사고와 행동거지를 눈여겨보고 그들이 왜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하는지를 알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많은 세월을 절약한 것이 됩니다. 걷지도 않고 뒤안길을 걸은 자가 될 것이고, 눈물 흘릴 일 없이 인생을 배우는 자 될 것입니다. 공자가 40을 불혹의 나이라고 했나요? 40이 되면 이러 저리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서정주도 시간을 통한 연단과 성숙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보다 너 낫지 않습니까? 그들은 진리가 없는 관찰력으로 이만큼 그려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시간이 사람을 연단시키고 성숙시키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며 우리를 기르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전 4:6-7) 모세를 낳은 부모도, 그를 키운 애굽의 공주도, 그를 광야에서 사위로 받아들인 장인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만을 했을 뿐입니다. 그것들이 조합되어 어떤 일을 미래에 잉태시킬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순간의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여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조합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바울이 심을 지라도 그 씨를 나지 않게 하면 끝입니다. 아볼로가 물을 주었는데, 물을 준다고 식물이 모두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물을 받아 식물이 광합성을 해야만 하는데, 바로 그것들이 가능토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오늘도 하늘엔 구름이 떠있고 햇살은 눈부시게 빛납니다. 바람은 어디선가 불어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3월 초순입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바야흐로 봄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이 봄에 숱한 꽃과 풀들을 키우실 것입니다. 겨우내 움추렸던 꽃망울이 터질 것입니다. 얼었던 땅을 뚫고 싹이 날 것입니다. 소쩍새는 울겠지요. 여름이면 천둥이 치겠지요. 그리고 가을엔 국화가 필 것입니다. 서리가 내리는 가을날 국화가 꿋꿋이 피어있는 모습은 우리의 선인들이 사군자라하여 칭송한 이유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고 피우실 것입니다. 서리가 내려도 노오란 꽃잎이 피도록 머언 먼 뒤안길을 걷게 하시며 연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종의 원인자이시고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시고 집행하시는데, 어찌 눈앞의 천둥에 기가 꺾여야 하겠습니까? 불어오는 바람에도 감사함을 느끼며 주어진 길을 걸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 말입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