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 20030314 작성 | 정요석 | 2017-03-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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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 부제: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여러분에겐 가보고 싶은 산이 있습니까? 저는 킬리만자로 산을 가보고 싶습니다. 하얀 눈에 덮인 그 산의 정상을 밟고서, "나는 표범이고 싶다"라고 외치고 싶네요. 짐작하시는 것처럼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란 노래의 영향 때문일 것입니다. 목사가 무슨 대중가요의 영향을 그렇게 크게 받느냐고 타박하실 지 모르겠지만, 아마 들어보신 분이라면 저를 그리 크게 타박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조용필이나 최진희 같은 가수는 외국의 어떤 가수 부럽지 않은 훌륭한 가수이고, 클래식 가수에 비추어도 뒤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여기에 그 노래의 가사를 적어 놓을테니 가사로나마 한번 음미하여 보십시오. (대사)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는 눈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련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노래)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처럼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대사)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그것을 위안해줄 아무 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새삼스레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건 사랑때문이라구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고독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사랑만큼 고독해진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지 너는 귀뚜라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귀뚜라미를 사랑한다 너는 라일락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라일락을 사랑한다 너는 밤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밤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나는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내 청춘에 건배 (노래)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아픈 정열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대사) 아무리 깊은 밤일지라도 한가닥 불빛으로 나는 남으리 메마르고 타버린 땅일지라도 한줄기 맑은 물소리로 나는 남으리 거센 폭풍우 초목을 휩쓸어도 꺽이지 않는 한그루 나무되리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을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노래)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매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라.. 라.. 라.. 라.. 이 노래는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입니다. 작곡가 김희갑씨는 어떨 지 모르겠지만, 작사자 양인자씨는 분명히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킬리만자로의 눈"이란 소설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리고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 입니다. 아메리카에 사는 그가 아프리카의 가장 높은 산을 소설의 배경으로 한 것은 그의 독특한 경험 때문입니다. 그는 1933년 동아프리카로 사냥 여행을 떠났다가이질에 걸려 소형 수송기로 킬리만자로의 높은 산을 넘어야 했던 것입니다. 킬리만자로의 산정은 만년설(萬年雪)로 뒤덮여 있습니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그 산정은 눈을 인하여 은백색을 띠고 있지 않겠습니까? 스와힐리어로 킬리만자로 산은 빛나는 산이라고 합니다. 만년설에서 나오는 은백색 빛이 이름으로도 표현된 것이지요. 헤밍웨이는 이질에 걸려 킬리만자로 산정을 넘으며 이 빛의 광경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부정적이던 삶에 대한 태도를 이 경험 이후 다른 색깔로 바꾸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결국엔 62세에 엽총으로 삶을 스스로 마감했습니다. 아마 킬리만자로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그는 더 젊은 나이에 자살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가 이 소설을 쓰고 난 이후 오래 동안 삶을 유지했지만, 자기의 삶에 대한 직관적 예감은 소설의 주인공을 죽음으로 처리하는 것에 배어있는 듯 합니다. 그는 왜 죽음의 위협이 있었던 킬리만자로 산행에서는 살아보려고 소형 여행기로 산을 넘기까지 했으면서도, 아무 죽음의 위협도 없는 인생의 여정에서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요? 그의 소설 첫머리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는 이 문구를 서두에 쓴 이후에는 주인공인 남편과 아내를 등장시켜 대화하는 것으로 소설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킬리만자로는 6,570미터 높이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들 한다. 그 산의 서쪽 정상은 마사이족의 말로 '누가예 누가이'로 불리우는데, 이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서쪽 정상 가까이에는 미라의 상태로 얼어붙어 있는 표범의 시체가 있다. 그런 높은 곳에서 그 표범이 무얼 찾고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다. 이 문구에서 표현이 되듯이, 이제까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던 얼어죽은 표범이 무얼 찾고 있었는지 그것을 헤밍웨이는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소설을 읽으며 그 답을 생각해보고, 자기의 인생에서 그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살폈습니다. 이 소설이 주는 그런 특성 때문인지, 몇 해전 일간신문에서 대입 논술 고사의 예제로 이에 대한 문제를 냈습니다. 소설 자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인용해보겠습니다. [논술주제]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대표작중 하나인 "킬리만자로의 눈"에는 다음과 같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제 시 문] 소설가 해리스는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나갔다가 심한 상처를 입은 다리에 독이 번져 한쪽 다리가 썩어들어가 죽어가고 있다. 비록 그는 비행기가 와서 무더운 아프리카 평원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자기가 죽고 난 후에 비행기가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죽음의 냄새를 맞지만, 병원으로 후송되기보다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하나님의 집"으로 알려진 킬리만자로의 정상으로 옮겨지기를 꿈꾼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의 게으름과 부유한 아내와 즐겼던 향락적인 결혼생활의 경험을 기억하며 작품을 쓰고자 한다. 해리스가 꿈꾸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정상에는 말라서 얼어죽은 표범의 시체가 눈속에서 썩지 않고 누워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 제] 문학작품의 숨은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속에 나타난 상징적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위의 제시문을 읽고 표범이 그와 같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죽은 이유를 작가 해리스의 꿈과 연관지어 1,00자 이내로 논술하라 논술고사의 수준이 이 정도로 높은 것에 놀라지 않습니까? 논술고사가 없던 시절이라 그나마 대학에 다닐 수 있었겠다는 생각에 일찍 태어나 다행이라며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런 형태로 고등학생들이 훈련을 받는다면 사고와 글쓰기와 논리 전개에 있어 큰 진보가 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한번 이 문제에 같이 답을 내도록 해봅시다. 그러면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동시에 이해할 것이고, 목사가 대중가요에 영향을 받는다는 타박도 줄어들 것 같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어떻게 존재하지? 나는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아야 하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존재하나? 사춘기를 시작하며 형성되기 시작하는 이러한 질문은 인생 내내 때로는 잠복해서 때로는 인생의 큰 일과 맞물려 자극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곤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례를 받으며 더욱 진지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성경이 이에 대한 답을 아주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초동에 있는 예술의 전당을 가는데 필요한 지도는 상세도가 아니라 약도(略圖)이면 충분합니다. 대개의 경우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예술의 전당 출구로, 아마 2번 출구일터인데, 그리로 나와서 쭉 15분 정도 올라오면 있어. 워낙 큰 건물이라 멀리서도 잘 보일거야"라고 간략히 말합니다. 서초역까지 어떤 역들을 거쳐야 하는지, 각 역들의 생김새는 어떠한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동차로 가는 경우도 "남부순환로 알지? 사당에서 양재 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있어. 강북쪽에서 온다고? 그러면 강북도로 타고 오다, 반포대교 알지? 그것을 건너서 계속해서 직진하면 예술의 전당이야"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반포대로가 어떻게 생겼고, 그것을 건널 때 한강 경치가 어떠한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비록 상세도는 아니지만 약도로서 사람의 기원과 존재 목적과 죽음의 이유와 그 이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질문이 여전히 남지만, 그래도 허무와 호기심의 날개를 충분히 접을 만큼 성경의 답은 넉넉합니다. 하지만 신이 없다고 여기거나, 있어도 사람의 모습에서 유추하여 온 신의 형상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불교와 같이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갈 수 있다고 여겨 혼자만의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는 이들은 우리와 다릅니다. 특히 후자와 같이 성경이 아닌 인생의 경험과 사고를 통하여 그 답을 찾으려 하는 이들은 잡힐 듯 하면서 잡히지 않는 그 답에 얼마나 괴로워합니까? 젊어서는 패기로 도전해보지만, 그것도 사그러들고 없어지는 늙음의 때에 그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허무뿐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답을 찾아보고자 한 사람이 하는 일은 허무를 앓는 것입니다. 허무의 늪에서 무의미에 치여 어쩔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자라고 일컫는 헤밍웨이와 같은 무리들은 이 비극적인 상황을 탈출하고자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그들 스스로는 진지하게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다고 말하겠지만, 실은 무의미를 탈출하고자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람은 보잘 것 없는 어떤 것에서라도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의미는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며 그래서 이것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데 있습니다. 모든 것에서 의미를 잃어버린 그들은 작위적으로 인간을 높이고, 그 존엄성을 들어내는데 가치를 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성을 지키려는 그들의 코드는 성실, 용기, 도전, 명예, 그리고 이상 등으로 어울러져 있습니다. "킬리만자로의 눈"은 이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인공 해리슨은 아프리카로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다친 다리 상처에 독이 번져 썩어 들어가는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그 때까지 그는 여러 명의 여자를 바꾸며 난잡하고 게으르고, 자포자기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지금의 여자도 사랑이라기보다는 그 여자가 지닌 상당한 부를 통한 향락적인 삶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썩어져 들어가는 죽음의 그 때에 무언가를 깨달은 주인공 해리슨은 오히려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정상으로 옮겨지기를 꿈꿉니다. 헤밍웨이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이렇게 산정 높이 올라가는 삶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헤밍웨이는 정직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삶이 인생의 답이 아닌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무언가 더 고결한 것을 찾아 몸부림을 쳐보았는데, 그렇다고 손에 딱 잡히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얻어지는 것이 없기에 그는 작품에서 주인공을 죽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에 대한 예의로 썩어 죽는 것이 아닌 미라의 상태로 얼어붙은 표범으로 표현하고, 신에 대한 예의로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 '누가예 누가이'로 불리는 하나님의 집이란 뜻을 갖는 서쪽 정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미라의 상태로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실은 신에 대한 예의인지 아니면 신을 찾아가면 썩지도 못하고 미라의 상태로 어정쩡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치열한 도전인지는 그의 말처럼 아무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표범이 무얼 찾고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다는 그의 말은 인생에 대한 그의 솔직한 말이고, 그러기에 그는 스스로 62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고에 있어 깊어지고 삶에 있어 성숙해지라는 취지를 가진 논술고사를 통하여 학생들은 헤밍웨이를 분석해 보는데, 노벨 문학상을 받기까지 한 헤밍웨이 그 자신은 엽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학생들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숙고하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깊이 자문하게 합니다. 하나님 없이 너무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해리스와 같이 산정 높이 올라가는 죽음을 택하게 하고, 헤밍웨이와 같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들을 때 저는 전율했습니다.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는 눈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라는 조용필의 간절함이 깃든 독백을 들을 때 저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노래가 발표된 1986년만 해도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헤밍웨이와 같이 스스로 인생의 답을 찾아가던 무신론자였습니다. 젊었기에 고독은 더욱 치열했고, 외로움은 살을 파고들고 뼈를 깎는 듯 했습니다. 허무를 맛보고 그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려본 사람은 이 표현이 결코 시적 표현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허무만 벗어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숨 쉬는 공기만큼이나 항상 따라 다니는 것이 허무입니다. 허무로 공기를 숨쉰다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살아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짐인지 모릅니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얼마나 다양한 시도를 했던가요?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얼마나 전전했던가요? 의미 있어 보이는 일을 발견하곤 정신없이 매달려 몰두를 하고, 그 덕에 그것의 정체를 빨리 알아내버리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알고 그곳을 빠져나오며 더 허무할 수밖에 없음에, 어디를 향해 화풀이를 해야 할지 몰라,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고 그냥 무턱대고 걸었던 그 시간들!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저였기에 조용필의 그 노래는 위로가 되었고 격려가 되었습니다. 최소한 저는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는 아님에 위로 받는 것이지요. 이런 상태에 빠진 저인지라 다소 현실감을 잃었습니다. 학문에 있어서도 사회과학 계열의 학문에서는 아무 의미도 찾지 못했습니다. 인생 본연의 의문이 풀리지 않는데 다소 잘 살고 다소 잘 분배하자는 학문이 무슨 필요로 와 닿겠습니까? 순수함과 상상과 이상이 있는 수학이 그 나마 위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수학을 바로 인생의 문제와 바로 연결을 시킬 수 있는 지적 능력은 되지 않았기에 겉만 맴도는 얕은 수준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현실감을 잃은 채, 현실이 부득이한 결정을 하라고 강요할 때만, 대학 진학과 졸업을 결정하고, 군대를 가고, 취직을 하는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질문들과는 상관없다는 듯 집중력 있게 대학 공부와 생활에 임하고 좋은 곳에 취직하여 잘 나가는 친구들과는 내가 참 어울리지 않는다는 절망감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최소한 제 입장에서는, 산의 정상을 바라보며 그 곳을 지향하여 나아가는 표범의 고독한 삶이 아니라, 편한 삶을 찾아 산기슭만을 어슬렁거리며 썩은 고기에 만족하는 하이에나로 보며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정작 조용필 본인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정상을 향해 열심히 뛰는 고독한 현대인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보다 형이상학적으로 그 작품을 본 것이지요. 저급한 하이에나가 산정 높이 올라가는 표범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해하지 못하는 하이에나에게 "묻지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라는 말로 진정한 흔적이 무어냐고 하이에나에게 물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이에나는 산정높이 오른 뒤에는 더 많은 싱싱한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겨우 굶어죽고 마는 표범의 삶을 평생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산정높이 올라가는 표범이지만 그곳에서 얼어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미라 상태로 썩지 않고 얼어붙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고, 하이에나의 죽음과 무슨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까? 하이에나는 끼니때마다 썩은 고기라도 있기 때문에 먹는 재미로, 먹이를 찾는 목적의식으로 열심히 살아갑니다. 표범의 눈에나 그것이 썩은 고기로 보이지 하이에나에게는 훌륭한 식사이고 의미로 가득 찬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지치지 않고 삶을 오래도록 영위할 수 있습니다. 하이에나가 자살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을지언정 자살하는 일은 없습니다. 삶에 대한 예의가 더 있는 자들입니다. 산정높이 올라가는 표범이되, 굶어서 얼어죽는 표범! 이것이 실존주의자와 같은 이들이 추구하는 실상입니다. 기껏 올라가서 굶어 얼어 죽다니요? 이들의 명백한 한계입니다. 62세에 엽총으로 산정에 높이 오른 삶을 스스로 마감한 헤밍웨이가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노벨 문학상도 그의 삶을 지탱하는 지렛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그는 도박의 짜릿한 긴장을 즐겼습니다. 노벨 문학상으로 받은 명예와 상금도 그의 느슨해지는 삶의 긴장을 당겨주지 못했는지 노름으로 많은 부분을 소진했다고 합니다. 그는 긴장이 있는 삶의 영역이라면 무엇이든 도전했지만, 모든 긴장은 끝까지 잡아주지 못하고 끝내는 그를 피해갔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산정높이 올라가되 굶어서 얼어죽지 않습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삶 자체에 대해서는 허무를 느끼고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느끼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전도서 1:2절을 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교회에서 먼저 듣지 않고 절에서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아 절을 다녔습니다. 학생회를 조직하여 열심히 활동하고 대학 때는 청년회장도 했습니다. 그 때 초빙한 스님으로부터 설법을 듣는데, 그분이 인생의 허무에 대해서 말하며, 불교만이 아니라 기독교도 인생의 허무함에 대하여 말한다며,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고 인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도 그런 언급을 한다는 내용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 인지, 늦은 20대에 다시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전도서를 먼저 찾아보았습니다. 불교처럼 인생의 허무함을 말하는 종교도 없을 것입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만이 아니라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말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제행무상에서 허무를 느끼고, 그것을 초탈하는 길을 찾고자 많은 사람들이 출가를 합니다. 목사인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볼지 모르지만, 제가 절을 다니며 만난 스님들은 모두 상식적인 분들이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며 악령에 사로잡혀 눈빛부터 이상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진지함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선 초연함과 기개와 고독과 처연함이 있는 분들입니다. 물론 사람 사는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땡중들도 많이 있습니다. 토정비결이니 일년 사 주니 점이니 하는 것으로 순박한 아낙네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복불교가 되어 초파일이면 돈을 많이 내는 정도에 따라 등의 크기가 커지는 웃지 못할 모순과 부패도 많이 있습니다. 스님들이 정진을 하다 지쳐버리거나 중 생활 자체에 의미를 못느껴 교권주의와 축재와 여자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상은 가톨릭이라고 없습니까? 개신교도 교권주의와 축재와 세습과 여자 문제에 걸린 목사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단편적인 현상을 뛰어넘어 불교의 원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스님들이 꽤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 중의 하나는 그렇게 진지하게 삶을 살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스님들은 어떻게 되냐는 것이었습니다. 최소한 제가 알던 몇 분의 스님에 대해서만은 그 인격과 합리성과 진지함을 알기에 참으로 고민이 되었습니다. 원시불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간직하고자 노력하며 득도(得道)를 위하여 정진하고자, 항상 자기들의 게으름에 부담을 갖고 있던 그 젊은 스님들에 대한 느낌은 지금도 나쁘지 않습니다. 불교는 딱히 꼭 집어 말할 수 있는 교리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문자 그 자체를 신뢰하지도 않고(불립문자, 不立文字), 특히 우리 나라 불교는 선종(禪宗)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논하며 숙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열려 있습니다. 진리를 논하는 여러 종파의 하나로 여깁니다. 산의 정상은 하나이지만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알던 스님들은 길에서 저를 보면 제가 목사라는 것을 알지라도 별 상관하지 않고 반가이 악수할지 모릅니다. 그런 열림으로 조계사는 성탄절이 되면 언제든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플랭카드를 걸고, 예수에도 불성이 있다는 축하의 말을 건넬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이 있어 자기들과 같은 가르침을 말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도 산을 오르는 또 하나의 길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넓다기보다 세계관이 그런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이 불교의 "제행무상 인생고"와 같습니까? 저는 전도서만큼 허무에 대해서 상세하고 확실하게 말한 것도 없다고 봅니다. 허무를 말한 면에서는 불교와 같은 면이 분명히 있기는 합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라고 말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라고 말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으니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사는 삶 자체는 쳇바퀴의 삶입니다. 이미 정해진 틀속에서 자유가 있는 줄로 알고 이것저것 바쁘게 해보지만, 그 기한과 때를 하나도 넘지 못하고 끄적거리다 죽는 삶입니다. 허무에 대하여 전도서의 무엇을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말씀마다 뼈마디를 저미게 하는 말씀이고 폐부를 찌르는 말씀입니다.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 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전 2:13-15)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전 3:18-19) 이 땅위의 삶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며 썩은 고기만을 먹는 하이에나나, 산정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는 표범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표범에게 임하는 일이 하이에나에게도 임합니다. 전도서 2장의 말씀과 3장의 말씀이 분명한 대칭을 이루지 않습니까? 2장에서는 지혜자와 우매자지만, 3장에서는 사람과 짐승입니다. 우매자의 당한 것을 지혜자도 당하고,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합니다. 진리를 말하는 전도자의 눈에는 지혜자와 우매자의 차이나,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같은 것입니다. 하이에나와 표범이 같고, 호흡을 하는 모든 사람이 같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말합니다. 모두가 같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같게 하시는 것은 사람으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입니다. 인생과 자연을 진리에 대한 비유로 주셔서, 궁극적으로 진리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사람은 인생을 살며 숱하게 좌절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넘지 못하는 벽을 부딪치고 부딪치며 무릎 꿇는 것입니다. 자기가 피조물임을 아는 것입니다. 짐승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겸손히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하나님은 손을 내미십니다. 진리를 선물로 던져주십니다.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그 영원을 아는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는 일의 처음과 끝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공개하며 진행하시지만 우리가 모릅니다. 비밀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secret과 mystery가 있습니다. secret는 일급비밀(top secret)과 같은 데에 쓰는 단어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밀봉하여 간직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비밀은 밀봉하여 간직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모르지만, 공개되는 즉시 그 문건을 읽으면 모두가 내용을 알고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mystery는 자연의 신비와 같은 데에 쓰는 단어로, 모든 사람이 보도록 공개하여도 그 처음과 끝이 노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비함을 자연에 더하셔서 모든 것을 개방하시면서도 그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자들에게는 당신을 알고 시종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비록 상세도는 아니지만 약도로나마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고 걸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넉넉하게 그 지식을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이 있고, 전도서가 불교가 담지 못한 진리를 담은 점입니다. 불교는 끊임없이 산정을 오르다 끝내는 굶어 얼어죽거나, 아니면 도중에 하차하여 산기슭으로 내려가 썩은 고기를 찾는 표범이 되되 하이에나가 아니기에 항상 허탈한 심정으로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 불쌍한 표범이 됩니다. 어느 길로 가나 허무의 늪일 뿐입니다. 제가 한 때 같이 많은 시간을 나누며 정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던 그 스님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나는 길에서 그분들을 만나면 반가이 악수를 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진리가 주어지고 생명이 주어지고 영생이 주어짐을 그래서 모든 허무가 사라짐을 역설해야 하겠습니다. 산에 오르는 길은 여럿이지만, 하나님께 가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뿐이라고 아무래도 말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것은 여러 길 중에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길이라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결코 이해심이 없어서도 아니고 마음이 좁아서도 아니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서도 아니고, 이유는 오직 하나 유일한 진리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간절히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초파일에 당신들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고, 세계 각지에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자들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해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그렇게 선교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야 하겠습니다. 스님들에 대한 좋은 추억과 나눈 정을 아직도 기억하기에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조용필씨의 아내가 미국에서 갑작스런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조용필씨의 음악을 좋아하고 그러다 보니 감정이입되어 가수까지도 깊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내의 죽음이 제 일처럼 안타까웠고, 그러기에 tv에서 이것에 관해 전하는 뉴스를 접하는 대로 다 봤습니다. 그때처럼 조용필씨가 슬퍼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연실색하여 무엇을 할 줄 몰라 울기만 하는 그를 보며 제 마음에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도 아마 더 젊은 나이였다면 그렇게 슬픔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대로 슬픔을 느끼는데도 어느 정도 나이를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슬퍼함을 보면서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나오는 문구처럼 그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음을 느꼈습니다.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사랑이란 이어지는 가사처럼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인가 봅니다.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요? 이에 대하여 이어지는 가사는 조금은 엉뚱하게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답은 역설이 있습니다. 정확한 대답은 아닙니다. 무의미를 뛰어넘으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정열의 마지막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 같은 것뿐입니다. 조용필 아내의 죽음이 이것을 여실히 말해주지 않습니까? 그 죽음을 슬퍼하고 그 이후를 외로워하는 조용필의 눈물이 그대로 보여주지 않습니까? 모두를 잃어도 후회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인생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런 코드로 실존주의자들이 환상 속에서 살아가려고 할지 모르지만, 환상은 깨어지는 것이고 그 이후에는 헤밍웨이와 같은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조용필 그에게도 하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49제를 절에서 드리는 그를 보며 그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죽은 지 49일 되는 날, 절에서 아무리 제사를 드려봐야 돈만 축나고 마음은 더 슬플 뿐이고, 그렇게는 결코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므로, 그만 그 언저리에서 벗어나 이곳 하나님에게로 달려오라고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지금 내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21세기는 이미 와 있습니다. 오고도 몇 년이 흘렀습니다. 21세기는 그런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세월의 마디는 없었습니다. 달력과 시계가 시간에 매듭을 지어놓을 뿐이지 시간은 단지 흐르고 있을 뿐이었고, 20세기와 21세기는 시간에 있어 아무 차이가 없었습니다. 1986년 이 노래가 만들어질 때, 21세기는 저 너머로 보였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훌쩍 시간을 넘어 21세기가 와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해주지 않은 채...... 우리의 죽음도 그러겠지요. 우리의 죽음이 먼 듯 하지만, 1986년에서 21세기가 훌쩍 와 버렸듯, 우리의 죽음도 그렇게 훌쩍 와 버리겠지요.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매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마지막 부분입니다. 21세기에도 수많은 이들이 배낭을 매고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라고 말을 하면서 말입니다. 산정높이 얼어붙는 표범이 된들 어떠하리라고 어떤 이는 낭만 속에서 어떤 이는 보다 진지하게 말하겠지요. 여러분에겐 가보고 싶은 산이 있습니까? 저는 킬리만자로 산을 가보고 싶습니다. 하얀 눈에 덮인 그 산의 정상을 밟고서, "나는 표범이고 싶다"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미라의 상태로 얼어붙는 그 표범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서 안식하는 그 표범으로서 "나는 표범이고 싶다"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은백색의 눈을 밟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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