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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보봐리즘: 19930220 작성 정요석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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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봐리부인"은 모파상의 스승인 플로베르가 쓴 책이다. 우리들은 "보봐리 부인"하면 강한 낭만주의를 연상하지만, 이 책은 낭만성과는 거리가 먼 사실주의 소설의 전형적인 걸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플로베르의 아버지 쪽은 대대로 의사계통의 인물들을 배출한 집안이다. 메스를 잡은 외과의사는 자신의 개성과 감정을 몰각(沒却)하고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환부를 관찰해야 하듯이, 플로베르는 그러한 정신으로 메스 대신에 펜을 잡고서 5년의 세월에 걸쳐서 "보봐리부인"을 완성했다. 


이 소설은 1848년에 리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들라마르 사건"을 제재로 하고 있다. 플로베르는 이 사건에 개입된 인물들과 주변 현장에 대한 기초자료를 면밀하게 수집하여 자신이 철칙으로 삼았던 "관찰"과 "자료수집"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런 덕분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지형(地形)과 인물이 실재의 상황과 거의 틀림이 없을 정도로 정확했다고 한다. 사실과 실제에 충실하여 시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묘사되어진 이 책의 부제목이 "시골의 풍속"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플로베르가 보봐리부인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을 살펴보자.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녀는 자기가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랑에 당연히 따라야 할 행복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 되었었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극한 행복이라든가 정열, 도취 등 책에서 읽고 그토록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과연 세상에선 정확하게 어떤 것일까, 보봐리 부인은 그것을 알려고 애썼다." 


"보봐리부인은 자기가 레옹(남편의 조수)을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연애란 뇌성이나 번개처럼 별안간에 나타나는 것, 하늘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서 생활을 뒤엎고, 인간의 의지를 나뭇잎처럼 뿌리째 뽑아 버리고, 사람의 마음을 깊은 못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보봐리 부인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우리는 보봐리 부인이 연인간의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잘 못 알고 있는 사람을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때 열심으로 교회 일을 하고 기쁨이 충만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냉랭한 표정이 되어 겨우 교회나 출석을 한다. 오히려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설교 말씀을 열심히 듣고,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보며, "한때는 나도 그랬지. 너도 머지않아 곧 나와 같이 될거야. 종교가 별 수 없다는 것을 알 때쯤이면 나를 이해하게 될거야."라며 초월한 자와 같은 표정을 짓는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봐리부인처럼 정열, 도취, 맹렬함, 품위, 매력으로 생각을 한다. 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그 사랑은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생각하기보다는 감정으로 느끼기를 원한다. 뇌성이나 번개처럼 별안간에 나타나 자기의 의지나 이성을 뛰어넘어 황홀함 속에서 자기의 생활을 이끌어주기를 원한다. 더 이상 대인관계로 갈등을 겪어서는 안되고, 귀찮은 직장일로 시달려서는 안되며, 이성간의 문제로 마음앓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한다. 실황(實況)에 기초한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은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며 스스로 만들어낸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자기의 현재와 미래에 개입하여 승리만을 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러한 기분을 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더 잘 보이는 높은 산 위의 기도원에서, 하나님이 더 잘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한다. 

수개월 만에 열병처럼 번져 수천 군데로 불어난 노래방은 한국인의 심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미신이라고 하여 불교, 유교에 의하여 수백 년 동안,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에 의하여 그렇게 짓밟이고 배척받고 찢긴 무속(巫俗)이 아직도 잡초처럼 살아 남은 이유는, 무당이 춤과 노래를 통하여 요사스럽게 벌이는 굿 때문일 것이다. 그 굿을 매체로 하여 종교적 황홀경, 곧 엑스터시(ecstasy)를 도출한 것이 우리나라 사람의 심성에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경우는 찬양을 하는 과정 중에 가장 많다는 설문조사의 결과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이 얼마나 엑스터시를 선호하고 있는지 잘 말하여 주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필자가 찬양을 통한 구원의 확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찬양을 통하여 엑스터시를 도출하는 것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러한 황홀경을 신앙의 전부로 알고 그것만을 추구하는 신앙 태도에 관한 것이다. 


"...그가 하느님의 성체를 받기 위해서 입술을 내밀었을 때에는 이세상 것이 아닌 기쁨으로 해서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는 공중에서 들려 오는 천사의 하프 소리를 들은 듯했고, 또 푸른 창공에 초록빛 종려를 받쳐들고 있는 성자들에 둘러싸여 황금의 옥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본 듯해서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숙연한 빛을 온누리에 비치면서 사랑의 날개가 달린 천사들로 하여금 지상에 내려가서 자기를 안고 데려 오라는 신호를 보내고 계셨다." 


이 장면은 보봐리 부인이 자기의 정부(情夫), 로돌프가 그에게서 도망하자 병을 얻어 극도로 악화되던 어느 날, 죽음이 임박한 것으로 믿고서 영성체를 청하여 받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찬란한 환각과도 같은 광경은 극히 아름다운 것으로 그녀의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때만큼 격렬하지는 않지만 아직 계속되고 있는 기분좋은 그 감각을 한 번 더 단단히 잡아 보려고 애썼다. 그녀는 묵주를 사기도 하고 부적을 몸에 지니기도 했다. 머리맡에 에머랄드를 박은 성자의 유물 상자를 놓고 밤마다 그것에 입맞추기를 원했다. 그녀의 이러한 도에 지나친 열렬한 신앙에 사제는 사교(邪敎) 비슷해지거나 극단적인 것이 되지는 않을까 하고 근심하기까지 했다. 

정밀한 관찰력과 객관적인 판단력으로 시종일관 묘사를 한 플로베르가 그후의 보봐리부인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장면을 보자. 


"고딕식 기도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 그녀는 불륜의 정을 쏟았던 지난날의 애인에게 속삭였던 것과 같은 감미로운 말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것은 신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는 어떠한 환희도 내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사지가 피곤하고, 속은 것 같은 막연한 감정을 가지고 일어나곤 했다." 


보봐리부인이 영성체를 받으며 경험한 종교적 체험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를 형성하지 못함으로 인해 무너지고 만다. 보봐리부인은 연인으로부터 얻는 데 실패한 황홀한 사랑과 맹렬함을 얻으려고만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였지, 그 종교적 체험이 어떤 의미로 주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기에 그의 인품은 형편없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끝내는 황홀한 사랑을 다른 남자로부터 찾다가 실패하자 자살로 인생을 마쳐버린다. 

또 보봐리부인은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현재의 자기 모습은 참된 실제적인 모습이 아니고, 앞으로 변할 모습이 자기 모습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이것은 영성체를 받고서도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받는 가르침으로 건전하게 자화상을 형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의 모든 정서적인 열심과 영적인 능력을 이상(理想)적이고, 초인(超人)적인 자화상(super you)을 그리는 데 사용하였다. 

우리는 역시 주위에서 보봐리부인과 같이 자신의 실제적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성경에 근거하지도 않은 초인적인 자화상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접하게 된다. 실수, 나쁜 생각, 약점으로 가득찰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부인하고 순절무결한 모습만이 자기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괴로워한다. 감정은 단순히 감정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는다. 누구하고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누구로부터나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하며, 누구에게나 편안한 느낌을 주어야 하고 갈등이 없어야 한다는 비성경적인 견해로 자신을 고문한다. 위대한 바울과 바나바도 같이 일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아마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외적인 사건에 의하여 결정되는 행복지상주의에 빠져, 한번도 우울해서는 안되고 항상 보통 이상으로 행복해야 한다고 과대망상에 빠진다. 외적인 조건에 구애받음이 없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에서 오는 내적인 평온함을 나타내는 "기쁨"을, "행복" 대신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용해야 함을 망각했기 때문이리라. 

예수님은 어찌할 수 없는 우리 모습의, 어찌할 수 없는 한계를 잘 아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 우리가 완전할 수 있는 여지가 우리 내부에 있다면 예수님은 그러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을 부인하고 완전한 자아를 가지려고 투자하는 시간과 정열과 마음고생은 결코 사도 바울이 말한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갈 5:21), 우리는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real you)을 자유스럽게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것이다. 

보봐리부인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황홀감으로만 알아 매순간의 생활에서도 이것만을 찾아서는 안된다. 황홀감만을 찾다가 얻어지지 않자, 별 수 없는 기독교, 초라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며 점차 하나님을 떠나고, 이단에 빠지는 것은 말씀, 기도, 행함이 없는 주관적인 신앙에 기인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또 자기의 실제적인 모습을 모르고, 사도 바울과 같이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케 한다는 생각에 항상 자기를 자책하며 패배감에 빠지는 것은, 우리를 자기연민에 빠뜨려 자기의 결점만을 평생에 걸쳐 떨어내도록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은 하지 못 하게 하려는 사탄의 술책이다. 

우리는 사탄이 조장하는 이러한 신앙의 보봐리슴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읽고 깊이 묵상함으로, 진정으로 기도함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하여 평안을 누리는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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