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실천: 성경해석과 예배모범』 서평
- 정요석 2018.10.2 조회 1055
-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실천: 성경해석과 예배모범』 (리차드 멀러, 로우랜드 워드, 2007년, 개혁주의신학사 2014년)을 추천하며, 180611
가장 엄격한 영국 신사는 인도에서 영어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너와 예의범절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고, 역사와 가치와 기후 등의 다양한 영향을 받으며 형성됩니다. 이것을 모르고 영국 신사도를 문자적으로 머리로만 이해하면 엄격함과 경직성이 강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해설서를 썼고, 세움교회의 목사로서 예배모범에 따라 예배순서를 정하고, 이것들을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저에게 엄격함과 경직성을 넘어 왜 이런 신앙고백과 예배모범이 만들어졌는지 그 깊고 넓은 정황과 논쟁과 다양성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위의 책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전반부는 칼빈신학교의 리처드 멀러가 쓴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입니다. 멀러는 신앙고백 작성자들이 그들의 고립된 성경해석을 담은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 대륙의 정통 개혁주의의 성경 주해와 교리 전통을 담았고, 5세기까지 활동했던 교부들의 주해 전통도 반영하였다고 논증합니다.
멀러는 웨민 신앙고백의 성경(1장)과 작정(3장)과 행위언약(7장) 교리를 어떤 성경 구절이 뒷받침해주는지 흥미진진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멀러는 “성경으로부터 합당하게 추론한 결론이 성경 자체의 증언만큼 진리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융통성 없이’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 관계를 맺는 ‘특정 장면을 굳이 찾으려’ 할 필요는 없다”라는(135쪽) 버지스(Burgess)의 말을 인용하며, “오직성경”만이 아니라 “전체성경”이 중요함을 매우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의 뜻은 본문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의 뜻 안에 담겨 있지만, 이 뜻 자체는 성경의 본 저자로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그 궁극적인 뜻은 성경 전체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고(108쪽) 멋지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웨민 신앙고백의 작정(3장)을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6항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뜻의 영원하며 지극히 자유로운 목적을 따라 그들로 거기에 이르는 모든 수단들을 미리 정하셨다.(As God hath appointed the elect unto glory, so hath he, by the eternal and most free purpose of his will, foreordained all the means thereunto.)”를 강조하고, 꼭 시험문제로 출제합니다. 이를 이해하면 성경을 인간 사역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 사역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멀러는 이 조항에 대한 영국의 성경주해 전통이 무엇인지를 성경구절들과 학자들을 나열하여 보여줍니다. 벧전 1:2, 엡 1:4-5, 2:10, 살후 2:13를 『잉글랜드 주석성경』, 『화란 주석성경』, 길레스피, 휘틀리 등이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고 싶으시다면 위의 책을 어서 빨리 읽으시기 바랍니다. 맛보기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은 구원의 이차적인 원인을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택정이라는 영원한 계획을 이루는 방편이다.”라는 디오다티의 말을 소개합니다.
롬 8:28-39에 대한 주해 전통에 대하여 멀러는 대개 “황금 사슬”(the golden chain)로 명명된다며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결속되어 있기에 그 어떤 연결부위도 벌어지지 않는 사슬”이라는(128쪽) 휘틀러의 말을 인용합니다.
후반부는 로우랜드 워드가 쓴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입니다. 워드는 유럽대륙의 개혁주의 예배 형식을 거의 유사하게 따라는 스코틀랜드 총대들이 자유재량이 허용되지 않는 엄격한 예전 형식을 따르는 잉글랜드 총대들과 어떤 논쟁과 설득과 타협을 거쳐 현재의 예배모범을 만들었는지 보여줍니다. 인간적인 감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너무 밋밋하고 건조하고 무색무취로 느껴지는 장로교의 예배모범은 단순하고 진지하고 인위적이지 않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정면으로 깊이 만나려는 경건을 가진 자에게는 크게 은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모범은 목사가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다른 경우에는 저렇게 라는 지침을 줍니다. 지침의 실행에 있어서 “반드시” “필히”라는 표현만이 아니라, “적절한”, “편리한” “충분한”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것은 애매한 모호성이라기보다 각 지역 현장에 맞는 적절성을 의미하고, 건전하고 필연적인 귀결로써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신함과 감동이라는 명목으로 함부로 예배 내용이 도입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배 전체 길이에 대하여 카트라이트는 1시간을 설교에 할애하며 총 1:30분이 적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성찬식이 있을 때에는 “몇 마디”로 “간단히 권고”하는데 그쳐야 한다고 보았습니다(208쪽). 앤드류 맬빌도 1:30분을 적당하다고 보았습니다. 파렐은 칼빈에게 장시간의 설교로 비판받았습니다.
그 당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은 눈을 감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전체 회중이 한 목소리로 낭독했습니다. 스코틀랜드 목사는 관례상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설교단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216쪽). 그 당시 회중들의 글 읽는 수준이 낮아서 예배 중에 성경을 봉독하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시편찬송은 예배모범들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하였는데, 절차상 핵심 요소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제1치리서는 시편 찬송을 유익해도 필수적이지 않다라고 기술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시편찬송을 공중 예배에서는 의무로, 가정에서는 알아서 행할 요소로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문맹자가 많아 누군가 대표로 시편 가사를 앞서 한 줄씩 읽어주었습니다.
총회가 150편의 시편찬송만을 합당하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1562년판의 잉글랜드 시편가에는 20여 편의 찬송가도 포함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정경에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번역한 찬송가는 받아들였습니다. 1647년부터 시편 외 다른 성경 문구에 근거한 찬송가를 제작하는 일을 시작하여 1781년에 완수했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제1치리서는 성찬식 횟수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자면 성찬식은 1년에 4번 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횟수에 대한 미신을 가능한 한 멀리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합니다. 16세기에 스코틀랜드에서 성찬식의 평균 횟수는 꽤 오래도록 1차례였습니다.
스코틀랜드 교인들은 교회 앞에 기다란 성찬대를 놓고 그 주위로 둘러앉았습니다. 잉글랜드 교인들은 본당 좌석에 앉아 떡과 포도주를 받았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총대들은 2주가 넘는 논쟁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방식을 고수하여,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회중석에 둘러앉거나, 성찬대에 앉아서”라는 표현으로 조정했습니다.
결혼식이 놀랍게도 그 당시에는 주일 예배 중에 치러졌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이 복잡한 절차를 요구하므로 점차 이 관행이 줄어들었고, 예배모범은 주일을 피하라고 권고합니다. 반지 교환식을 금지하는데, 스코틀랜드 교회가 이 예식을 이교도에게서 온 로마인의 의식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에 있어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아무런 예식 없이 시신을 땅에 묻었습니다. 죽음과 부활에 관한 위로의 메시지는 교회에서 전했습니다. 카트라이트와 같은 잉글랜드의 청교도들도 비슷한 견해였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총회 기간 동안에 존 핌 의원이 죽었는데 스코틀랜드 측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모범은 6일간의 논의를 거쳐 장례식 설교를 허용했고, 그 후로도 스코틀랜드 교회는 150년 동안 장례식 설교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공중 예배를 위한 일시와 장소가 부록에서 다루어졌는데, 교회의 성인 기념일은 예외 없이 폐지되었고, 성탄절, 부활절, 승천절, 성령강림절은 미신적인 부가요소를 제거한 후에 그대로 존속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성경에는 이들 성일 준수의 명령도 확증도 없으므로 완전히 폐지했습니다.
워드는 예배모범이 정해진 배경과 신학적 논의를 알려주어, 독자들로 예배모범의 문자주의에 빠지지 않고 그 본래 의미를 보다 더 추구하도록 이끕니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성경적 예배를 더욱 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첨언: 신앙고백 제1장은 “Although the light of nature, and the works of creation and providence”라는 표현으로 시작되는데, 한국에서서 “the light of nature”를 “자연의 빛”으로 번역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멀러는 “웨민 신앙고백에 의하면 하나님을 아는 자연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계시의 출처로 내적 출처인 ‘이성의 빛’과 외적 출처인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역사’ 두 가지가 있다.”라고 설명합니다(86쪽). 즉 위의 표현은 계시의 내적 출처와 외적 출처에 대한 것이므로 “the light of nature”은 “본성의 빛”으로 번역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좋다는 의미입니다. 위 책의 번역자는 “이성의 빛”으로 번역했는데, 저는 내적 출처에는 이성만이 아니라 감성과 직관 등도 있으므로 “본성의 빛”이 좋다고 봅니다.
-
댓글 0